[인권칼럼] 동백의 눈물에서 인권의 숲으로: 4.3과 이행기 정의의 완성
이삭빛(본명 이미영·문학박사), 시인·문학평론가
□ 꺾이지 않는 존엄, 동백의 꽃말로 피어난 기억의 부활
제주 4.3은 78년 전, 국가라는 거대 권력이 보호해야 할 자국 시민의 생명을 총칼로 짓밟은 현대사의 가장 깊은 흉터다. 흔히 동백꽃의 꽃말을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78년 전 제주의 동백은 그 지극한 사랑의 말을 차마 건네지 못한 채, 차가운 동토(凍土) 위로 붉은 비명처럼 송이째 떨어져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던 시민들의 목숨은 겨울을 견디다 낙화한 동백의 처절한 눈물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 배와 같고, 생명은 죽음의 자리를 빌려 다시 피어난다. 땅에 떨어진 꽃송이가 스스로 거름이 되어 대지를 적시듯, 그날의 희생은 이제 ‘생명과 평화’라는 푸른 잎을 틔워내고 있다. 수십 년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4.3의 진실은 이제 평화와 인권이라는 돛을 달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제 4.3을 단순한 비극의 역사가 아니라,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 시민의 권리를 복원해가는 이행기 정의의 역동적인 과정이자 생명의 부활로 정의해야 한다.
□ 수치로 증명된 진실, 대만 2.28과의 국제적 연대
이행기 정의의 핵심은 철저한 규명과 책임 있는 보상이다. 2026년 현재, 제주 4.3은 세계적인 과거사 해결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과 정부 통계에 따르면, 확정된 희생자는 14,800여 명, 유족은 94,000명을 넘어섰으며, 2022년부터 시작된 보상금 지급은 올해까지 약 5,600억 원 규모가 집행되며 실질적인 명예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는 대만의 2.28 사건이 겪은 경로와 매우 흡사하다. 두 사건 모두 국가폭력에 의한 시민 학살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며, 대만이 1995년 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 차원의 사과를 이끌어냈듯, 제주 4.3 역시 이행기 정의의 4대 기둥인 진실, 정의, 배상, 재발 방지를 견고히 세워가고 있다.
□ 한승헌의 인권 철학, 전북 인권의 거점을 향한 역지사지(易地思之)
이러한 정의의 길을 닦은 이들은 고(故) 한승헌 변호사와 같이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런 사람이 늘어감으로써 역사는 진보합니다”라고 외쳤던 인권의 파수꾼들이었다. 전북이 낳은 거목이자 시국 사건 1호 변론의 대가였던 그는 법을 권력의 도구가 아닌 약자의 방패로 삼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역지사지’의 정신을 제도적 결실로 맺어야 한다. 제주의 동백이 전북의 산하에서도 평화롭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도민의 인권을 상시 보호하고 인권 감수성을 일깨울 실질적인 전북 인권사무소(인권센터)의 건립이 절실하다.
현재 전북도민들은 인권 침해의 구제와 상담을 위해 멀리 광주에 있는 인권사무소까지 찾아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도민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인권 서비스는 '멀리 있는 국가 기관'이 아닌 '우리 곁의 거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힘은 기록에 있고, 현재의 인권을 지키는 힘은 그 기록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지근거리의 거점에 있기 때문이다.
□ 상생의 숲을 가꾸는 우리들의 고귀한 사명
결국 4.3의 완성은 보상금의 액수가 아니라, 이 땅에 다시는 국가에 의한 시민 유린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와 인식의 변화에 있다. 4.3의 기록은 죽은 자를 위한 위령문을 넘어 산 자를 위한 인권 선언문이 되어야 하며, 그 선언문은 지역 사회의 인권 전담 기구를 통해 일상의 언어로 실현되어야 한다.
4.3의 동백이 진 자리에 이제는 평화와 상생의 숲이 우거지고 있다. 그 숲이 전북의 대지까지 더 넓게 퍼져나가도록 우리는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정의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전북 인권사무소는 그 여정의 든든한 파수대이자, 우리 곁의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따뜻한 산실이 될 것이다. 그것이 오늘 4.3을 맞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다해야 할 가장 고귀한 책무이자 사랑의 실천이다.
출처:
제주4.3평화재단 2026 통계 자료 및 제주특별자치도 보상금 집행 현황.
대만 228사건기념재단(二二八事件紀念基金會) 공식 리포트.
한승헌,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그림 강종열 서양화백 시국사건에 맞선 고) 한승헌 인권 변호사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