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론에 나타나는 보리심
2)밀교 문헌에 나타나는 보리심
대승불교의 보리심 개념은 밀교 문헌들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밀교에서 보리심은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금강살타(vajra-sattva)와 동일시되어 인생의 궁극적 목표 혹은 승의적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대승불교에 비해 그 의미가 격상된다. 조쉬는 이러한 현상을 '점진적 변화'라고 부르며, 위에서 살펴본 Nairātmyaparipṛccha-sutra에서 이러한 변화의 단초가 어렴풋이 보인다고 말한다. 또한 나마이(生井)는 보리심이 단순히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에서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으로 전개되는 것을 사상사적으로 필연의 귀결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격상을 보리심 개념이 사상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평가하기를 주저하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밀교가 대승불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사상이라기보다는 중관과 유식, 그리고 여래장의 사상적 입장을 기저에 두고 그것을 구체적인 사물, 즉 종교의례나 만다라와 같은 도형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쯔나가(松長)는 밀교의 성격을 단적으로 '대승사상의 의궤화(儀軌化)'라 지칭하고, 스즈키(Suzuki)는 '순수한 대승불교의 퇴화'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특히 다스굽타(Dasgupta)는 불교 딴뜨라(밀교)가 대승불교의 사상을 채용함에 있어서 동일화와 체계화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종의 비교적(秘敎的)인 신학이나 교의로 변용시켰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밀교 경전에 산재해 있는 철학적 기술들은 밀교의 독자적인 철학체계라기보다는 대승불교 교의의 단순한 차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밀교의 교의와 수행의 중심에 있는 보리심 사상 역시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밀교의 보리심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도 중기밀교 경전을 대표하는 『대일경』의 「주심품(住心品)」에 서술되어 있는 3구(句)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래는 어떻게 해서 일체지(一切智)를 얻었는가에 대한 물음, 즉 일체지라는 지혜는 무엇을 인(因)으로 하고, 근(根)으로 하고, 구경(究竟)으로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여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보리심을 원인(因)으로, 자비를 근본(根)으로, 방편을 목적(究竟)으로 한다." 여기서 원인은 종자에, 근본은 뿌리에, 구경은 열매에 비유된다. 즉 보리심이라는 종자가 싹이 트고, 그 뿌리에 있는 자비심에 의해 양육되어, 마침내 열매에 비유되는 여러 가지 방편이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기능을 지닌 것이 바로 일체지이다.
「주심품」에서는 계속해서 깨달음(菩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비밀주여,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니, 비밀주여, 그것이 바로 무상정등각이다." 그렇다면, 그 보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대일경』은 "깨달음과 일체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구해야 하나니, 비밀주여,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즉 본래 청정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며 일체지이기 때문에,「주심품」의 3구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내용은 '구하는 대상'(所取)인 깨달음이 '구하는 주체'(能取)인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보리심이란 원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지만,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이기도 하는 셈이다. 『대일경』을 주석한 붓다구히야(Buddhaguhya)는 『대일경광석』에서 이러한 두 종류의 보리심, 즉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byaṅ chub kyi phyir sems)과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byaṅ chub kyi ran bshin gyi sems)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대일경』 「주심품」에서 설해진 보리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대일경』에 부속한 의궤류에 다음과 같이 정형화된 구로써 정리되어 있다.
"보리심은 일체의 존재(법)에서 벗어나, 온·처·계 및 소취와 능취를 버리고, 법무아평등성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自心)은 원래 생기하지 않는 것이며, 공성을 자성으로 한다."
이처럼 공성을 본성으로 하는 무자성인 자기 자신의 마음, 즉 보리심이 『대일경』 「세간성취품」과 「설본존삼매품」에서는 월륜(月輪) 혹은 종자라고 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상징화되어 기술된다. 또한 그 상징성은 요가의 관법을 통해서 수행자에게 체득이 가능하도록 의궤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마쯔나가(松長)는 밀교에서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전개시키지 않고 의궤의 형태를 취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밝히고, 이것을 '대승사상의 의궤화'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대일경』이 3구를 중심으로 보리심 사상을 전개하는데 비해, 그것보다 조금 뒤에 저술된 『보리심론』은 '3가지 문'(3門)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보리심론』은 보리심을 대비로자나불신(大毘盧遮那佛身)을 구하는 마음으로 정의하는데, 대비로자나불신을 성취하고자 보리심을 발한 후에 순차적으로 수습해야하는 것이 바로 행원(行願)·승의(勝義)·삼마지(三摩地)는 3가지 문이다. 행원이란 일체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그들을 자기 자신의 신체처럼 돌보는 것으로 자비심을 닦는 것이다. 승의란 일체법이 무자성이며 공인 것을 보는 것으로 반야심을 닦는 것이다. 행원과 승의를 바르게 수습한다면, 삼마지를 통해 모든 붓다의 본성에 통달할 수 있다. 삼마지는 월륜관(月輪觀)과 아자관(阿字觀)을 중심으로 수습하고 삼밀행(三密行)과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에 의해서 우주와 합일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모든 붓다들의 법신을 깨닫고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를 깨달을 수 있어, 마침내 대비로자나불의 자성신·수용신·변화신·등류신을 얻을 수가 있다고 『보리심론』은 기술한다.
무상유가밀교(無上瑜伽密敎)의 대표적인 성전(聖典)인 『비밀집회딴뜨라』(Guhyasamāja-tantra)의 2장은 「보리심장」이라고 하여, 보리심에 대한 고찰이 주제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금강계를 구성하는 다섯 붓다 각각이 보리심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피력한다. 먼저 비로자나(Vairocana)가 다음과 같이 보리심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대일경』의 의궤류에 나타난 보리심의 정형구를 그대로 인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일체의 존재에서 벗어나 온·처·계, 소취와 능취를 버리고 법무아평등성에 의해서 자심은 불생이며, 공성을 본성으로 한다." 이어지는 나머지 붓다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불생이고 법도 없고 법성도 없다. 허공과 같이 무아인이 깨달음의 실상은 견고하다."라고 공경하올 아촉(Akṣobhya)금강여래는 말한다.
"일체 모든 법은 존재하지 않고, 법의 상을 떠나 법무아에서 생겨난다. 이 깨달음의 실상은 견고하다."라고 공경하올 보생(Ratnaketu) 금강여래는 말한다.
"모든 법은 불생이기 때문에 존재도 없고 수습도 없다. 허공의 구(句)와 상응하기 때문에 존재는 사라진다."라고 공경하올 무량수(Amitāyus) 금강여래는 말한다.
"모든 법은 본성으로서 청정광명이고, 완전한 청정이어서 허공과 같은 것이다. 깨달음도 아니고 현관도 아닌 이 깨달음의 실상은 견고하다."라고 공경하올 불공성취(Amoghasiddhi) 금강여래는 말한다.
다섯 붓다는 모두 보리심을 찬양하고 있는데, 그 어느 정의나 『대일경』에 설해져 있는 보리심에 관한 이해의 선, 즉 일체법이 무자성이며 공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속(續)딴뜨라』라고 일컫어지는 『비밀집회딴뜨라』 18장에는 보리심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진술이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고요하고 존재와 비존재를 떠난 주존(主尊)으로써, 공성과 자비가 불가분하게 연결된 것(空悲不二)이 보리심이라고 알려진다."
이것은 새로운 진술인데, 공성을 승의의 보리심, 대비를 세속의 보리심으로 보면, 이러한 보리심의 정의는『속딴뜨라』가 저술되기까지의 다양한 보리심 사상을 일단 정리하고, 새롭게 정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제지간인 Anaṅgavajra의 Prajñopāya-viniścaya-siddhi와 Indrabhūti의 jñāna-siddhi에도 보리심에 관한 설명이 있다. 먼저 Anaṅgavajra는 보리심을 반야와 방편이 불이(不二)의 상태에 있는 지고의 존재로 파악한다. 반야와 방편은 물과 우유의 혼합과 같이 아무런 구별이 없어져 반야방편(Prajñopāya)이 되고, 이것이 우주의 창조원리이자 모든 것이 이로부터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 반야방편은 영원한 행복을 주기 때문에 대락(大樂, mahāsukha, 최상의 지복至福)이라 불리고, 완전한 길상(吉祥)이기 때문에 보현(Samantabhadra)으로 알려진다. Prajñopāya-viniścaya-siddhi 중의 한 장은 궁극적인 진실에 대한 명상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는 반야와 방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이란 함께 융합되어 있는 반야이기도 하고 방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현상을 지멸한 것이므로 반야이고, 그것은 또 여의보주처럼 중생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것이라도 성취하므로 자비이다." 그의 제자 Indrabhūti 역시 이 반야방편이 보리심이고, 또 일체의 불성을 지닌 금강(金剛)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반야와 방편의 불이(不二)의 상태인 보리심은 밀교문헌에서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에 의해서 다양하게 기술되는데, 반야는 여성으로, 방편은 남성으로 불린다. 이러한 비유는 『헤바즈라딴뜨라』(Hevajra-tantra)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러, 반야와 방편이 무드라(mudrā)와 요가행자(yogin)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무드라는 요가의 성취법에 채용된 위대한 여성을 가리키며, 보리심은 바로 여성인 무드라와 남성인 요가행자의 완전한 합일에서 생긴다. 또한 무드라는 공성을, 요가행자는 자비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성인 공성과 남성인 자비의 합일이 곧 보리심인 것이다. 게다가 『헤바즈라딴뜨라』에는 다양한 여성 원리와 남성 원리의 화합에 대해서도 기술되어 있는데, 연꽃과 금강·모음과 자음·적(赤)과 백(白)·오른쪽과 왼쪽의 맥관(脈管) 등의 합일로부터 보리심이 생기고 그것이 최상의 지복이라고 말한다. 또한 종교적인 법열의 극치가 남녀 합체의 성적쾌락에 비유되어, 그것이 보리심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특별히 중요시된 보리심은 후기대승의 시대에 이르면 종래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서의 보리심 외에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의 보리심이 나타나게 되고, 나아가서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 그리고 반야와 방편의 합일이라는 의미의 새로운 보리심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