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심론』의 선정론
4.해탈십육지
2)수도와 무여지[육지에서 십육지까지]
이 단계부터는 견도 이후의 본격적인 수도(修道)의 단계로 오위의 수습위(修習位)이고, 나아가 구경위(究竟位)와 오상(五相)의 다섯 번째인 불신원만위(佛身圓滿位)에 해당한다. 해탈십육지는 이처럼 십지 이후의 구경각(究竟覺)까지 설하며, 열두 번째부터 마지막 지위까지는 유가십칠지와 거의 유사하다. 즉, 성문‧연각‧보살‧불지의 순서이며, 차례대로 수도와 구경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6)희락지(喜樂地, prīti-sukha-bhūmi)
'희락지'는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지위이다. 선정으로 느끼는 몸과 마음을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초선(prathamadhyāna)의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와 이선(二禪, dvitīyadhyāna)의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가 생기는 경지이다. 전자는 욕계의 생을 여읨으로 기쁨(saumanasya)과 행복(sukha-vedanā)이 생기며, 비(鼻)‧설식(舌識)의 인식이 없으므로 무분별의 행복과 상응한다. 의식은 유분별의 기쁨과 상응하니 색계의 초선천이다. 후자는 다시 미묘한 희락이 생기는 지위로, 이 지위 이상은 모두 다섯 인식을 여의고 다만 의식만 있다. 혹 기쁨과 상응하거나 행복과 상응하니 이선천이며, 수행자는 금강좌에 앉아 공무변처를 관하고 염하면 이생희락지에 이르고, 식무변처를 관찰하고 생각하면 정생희락지에 이른다.
앞의 해탈십육지 가운데 오지인 금강지와 육지인 희락지는 보살십지의 '환희지'에 해당한다. 십바라밀의 보시바라밀을 성취하고 십진여 가운데 '변행진여(遍行眞如)'를 증득한다. '변행진여'는 아‧법공에서 나타난 것으로 한 법에도 있지 않음이 없다. 이 지위는 성문십지의 여덟째 사다함지(斯陀含地)와 공승십지의 다섯째 박지(薄地)에 해당한다. 또 금강지와 희락지에 대응하는 유가십칠지는 세 번째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네 번째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 다섯 번째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이다.
(7)이구지(離垢地, vimalā-bhūmi)
'이구지'는 온갖 때를 여의는 지위로 보살십지와 이름도 같고 계위도 동일하다. 삼선(tritīyadhyāna)의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로 이선(二禪)의 기쁨을 여의고, 정묘한 무분별의 행복에 머무는 삼선천(禪天)이다. 또 이희묘락의 경계를 거쳐 사선(caturthadhyāna)의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에 이르며, 청정무위한 평정(upekṣā-vedanā)의 마음에 머무는 사선천이다. 무소유처를 관찰하고 생각하면 이희묘락지에 이르고, 비상비비상처에 머무르면 사념청정지에 이른다. 성문십지의 아홉째 아나함지(阿那含地)와 보살십지의 두 번째 이구지에 부합하며 지계바라밀을 성취한다. 또 끝없는 덕을 구족하여 일체법에 가장 뛰어난 최승진여(最勝眞如)를 증득하며, 공승십지로는 여섯 번째 이욕지(離欲地)에 해당한다. 유가십칠지로는 여섯 번째 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 일곱 번째 비삼마희다지(非三摩呬多地), 여덟 번째 유심지(唯心地)가 여기에 상응한다.
(8)발광지(發光地, prabhākarī-bhūmi)
'발광지'는 보살십지의 명칭과 계위도 동일하다. 인욕바라밀과 진여의 교법이 지극히 수승한 승류진여(勝流眞如)를 증득한다. 힘써 수행한 공덕으로 일시적으로 삼계를 벗어나 마음 빛이 나타나며, 구차제정의 마지막 지위인 멸수상정(滅受想定)을 음미하는 경지이다. 유가십칠지로는 아홉 번째 무심지(無心地)에 해당한다.
(9)정진지(精進地, vīrya-bhūmi)
'정진지'는 보살십지의 네 번째 염혜지에 해당한다. 정진바라밀과 속박과 취함이 없는 무섭수진여(無攝受眞如)를 성취한다. 또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정진을 잘 일으키며, 남의 이익을 위해 견고한 마음을 잘 일으킨다.
(10)선정지(禪定地, dhyāna-bhūmi)
'선정지'는 보살십지의 다섯 번째 난승지에 해당한다. 선정바라밀을 성취하고 차별 없는 무별진여(無別眞如)를 증득한다. 다섯 신통으로 자리이타하며, 번뇌 없는 마음 작용이 성숙하여 멸진정(滅盡定)이 현저하게 된다.
(11)현전지(現前地, abhimukhī-bhūmi)
'현전지'는 보살십지와 이름과 계위가 일치한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고 본성이 오염됨이 없는 무염정진여(無染淨眞如)를 증득한다. 장애 없는 반야바라밀로 번뇌가 다함이 현전하므로, 멸진의 자재함을 얻으므로 청정(淸淨)이라 한다.
(12)나한지(羅漢地, arahant-bhūmi)
'나한지'는 성문십지의 마지막인 아라한지(阿羅漢地)이며 무학과(無學果)이다. 연각십지의 아홉째 철비밀지(徹秘蜜地)의 무학과를 증득하며, 보살십지의 일곱째 원행지에서 방편바라밀을 성취한다. 또 여러 법을 안립하지만 다름이 없는 법무별진여(法無別眞如)를 증득하고, 공승십지로는 일곱 번째 이판지(已辦地)의 아라한과에 해당한다. 사무애변(四無礙辯, catuḥ-pratisaṃvid)으로 잘 결정하여, 삼매문에서 자재하고 점차 모든 지(地)에 들어가 보리분법(菩提分法)을 구족한다.
(13)지불지(支佛地, pratyekabuddha-bhūmi)
'지불지'는 연각십지의 마지막 습기점박지(習氣漸薄地)에 해당한다. 보살십지의 부동지에서 원바라밀을 성취하고, 염정(染淨)에 따라 증감되지 않는 부증감진여(不增減眞如)와 모습과 국토에 자재한 상토자재소의진여(相土自在所依眞如)를 증득한다. 또 무분별을 얻고 일체법이 요술과 꿈 같음을 보며, 심의식의 허망 분별을 떠나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
(14)보살지(菩薩地, bodhisattva-bhūmi)
'보살지'는 보살십지의 아홉째인 선혜지에 해당한다.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의 역바라밀을 성취하고, 수용법락지(受用法樂智)와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의 지자재소의진여(智自在所依眞如)를 증득하며, 이후에는 걸림 없는 지혜의 자재를 얻는다. 공승십지의 아홉째인 보살지에 상응한다.
(15)유여지(有餘地, sopādhikā-bhūmi)
'유여지'는 보살십지의 마지막 법운지에 해당한다. 이 계위에서 지(智)바라밀을 성취하고 업자재등소의진여(業自在等所依眞如)를 증득한다. 널리 일체 신통으로 다라니와 삼마지에서 모두 자재를 얻는다. 유가십칠지의 제십육 유여의지(有餘依地)를 줄인 말이며 등각(等覺)의 지위와도 상응한다.
(16)무여지(無餘地, nirupādhikā-bhūmi)
'무여지'는 유가십칠지의 마지막 무여의지(無餘依地)를 약칭한 것이다. 공승십지의 끝인 불지(佛地)이고 묘각(妙覺)의 지위에 해당한다.
한편 벽산은 수행계위로 55위설과 삼현육성설을 지지한다. 즉, 초지에서 삼지까지 삼현위, 사지를 입성지문(入聖之門), 오지부터 십지까지를 육성위(六聖位)라 하는 삼현육성설이다. 55위도 차례로 닦는 점수설(漸修說)은 부정한다. 50위는 오위십중과 십위오중을 종횡으로 관하여 오온개공을 깨닫는, 곧 오지여래를 성취하는 방편이라 설한다. 다시 말해 삼계 사대의 색음을 걷고 제법공을 증득하면 바른 믿음의 초신(初信)이고, 수음을 걷고 이무아를 증득하면 초발심주이다. 상음을 걷고 분별심을 제거하면 여래의 묘덕으로 시방에 수순하는 초환희행(初歡喜行)이고, 행음을 걷고 일체를 통하면 일체중생을 구호하는 초구호일체중생회향(初救護一切衆生廻向)이다. 식음을 걷고 처음 정각에 올라 환희용약(歡喜踊躍)하는 초환희지이다. 그리하여 초신(初信)과 같은 믿음이 생기고 초주(初住)와 같은 경지에 머물며, 초행(初行)과 같이 행하고 초회향(初廻向)과 같이 회향하는 것이다.
이처럼 50위를 차제수행으로 보지않고 원융수행으로 보며, 초신‧초주‧초행‧초회향의 깨달음이 전체의 깨달음이 될 수 있다. 즉, 신만‧해만‧행만‧증만성불이며, 『화엄경』에 "하나가 곧 다수이고 다수가 곧 하나이니," 혹은 "처음 발심했을 때 곧 정각을 이룬다."라는 것을 상기시키게 한다.
사실 화엄의 수행과 성불은 인과를 분별한 삼생의 계위를 설하지만, 동시에 각 계위마다 그대로 성불의 뜻을 나타내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성불을 주장한다. 그러한 경계는 인과가 둘이 아닌 중도행이며, 각기 차별적인 행포문(行布門)으로 전개되지만 일성일체성(一成一切成)의 원융문으로 회통된다.
이와 같이 벽산은 열여섯 단계의 성불을 설하지만, 수행계위를 회통하며 원융무애한 수증론(修證論)을 전개하고 있다. 끝으로 수행자는 초생(初生)에 삼귀지에 들고 내지 십육생에 무여지를 얻어, 구경성취하면 십육생성불설에 부합한다고 설한다.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