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2025. 3. 23(주일낮예배) 마태복음 28:16-20
북미 최대 규모의 원주민 부족은 체로키 인디언(Cherokee)이다. 1만여년 전부터 미국 대륙에서 살던 체로키 인디언들은 서양문물을 대폭 수용하여서 1769년에는 디트머스 대학을 설립하였고, 또 1821년에 고유문자를 발명할 정도로 똑똑한 원주민이다. 이렇게 똑똑한 체로키 인디언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이야기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같이 말이야!.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이고 또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 할 때 손자는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하고 물었다. 그때 추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인디언 추장은 손자에게 힘이 센 놈이 이긴다고 하지 않고,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다고 하였다. 내 마음에 내가 응원하는 그 놈이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놈이 이기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선과 악 중에 어느 놈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마태복음 28장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예루살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첫번째 기록된 이야기는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올라간다. 그리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무덤과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그래서 여인은 두려움과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을 향하여 달려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였을 때의 모습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여인들과 같이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여인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달려갈 때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경비병들은 대제사장을 향하여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음을 알린다. 그때 대제사장은 많은 돈을 주면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말하라고 시킨다. 그래서 경비병들은 대제사장이 가르친 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누군가가 도둑질하여 갔다는 소문을 내었다.
이것이 당시 예루살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은 부활의 복된 소식을 기쁨으로 전하였다. 그런데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은 경비병들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 소문을 낸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과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당했다는 말이 난무하였다.
누구의 증거가 더 신뢰를 받았겠는가? 효암학원 이사장을 지낸 故 채현국 이사장님은 이런 말을 한다.
못된 놈들을 보면 엄청 부지런합니다. 특히 돈과 권력에 환장한 놈들은 잠도 안자요. 오늘도 내일도 서너 시간만 잡니다.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보편적인 삶을 사는 우리가 부지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좋은 의도니까 받아들여지겠지! 상식이니까 지켜지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돼요. 선의만 믿고 게을러지면 선의도 부서집니다. 못된 놈들한테 먹혀요.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는 안타깝지만,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지키고 싶은 선의나 자신만의 신념이 있다면 부지런해야 해요. 못됐다 욕만할게 아니라, 그놈들 이상으로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것 말고는 지킬 길이 없어요.
효암학원 故채현국 이사장은 진리와 선이라서 지켜질 것이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악한 사람들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보다 더 열심히 진리와 선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는 거짓이 열심을 내는 것만큼 진리를 열심으로 전하였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11명의 제자는 예수님이 지시한 산에 이르러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경배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경배하였는지 오늘 본문 17절을 읽기 바란다.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경배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인정하여 높이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경배한다는 말에는 절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어 절할 때 어떤 제자는 아직도 의심하고 있었다. 여기서 의심하다(διστάζω)는 단어는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14장 31절에 한번 더 나온다. 풍랑이는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베드로가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는 말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오라고 한다. 그래서 물 위를 향하여 달려온 베드로는 바람이 부는 순간 물 아래로 빠져든다. 그렇게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건지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였다.
여기서 의심하다는 말은 믿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풍랑이는 바다를 걷고 있던 베드로가 믿음이 흔들렸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 앞에 나아와 절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제자 중에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제자를 삼기 위한 구체적 행동지침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를 삼기 위하여 ①세례를 베풀고, 또 ②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침을 주신 것이다.
혹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세례를 베푼다는 말은 소유권을 이전하다는 의미가 있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가게에서 빵을 사기 위하여 돈을 지불한다. 그러면 그 빵은 가게 주인의 소유에서 나의 소유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를 베풀다의 의미이다. 우리가 이전에는 죄와 사망의 소유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선언이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예수님의 소유가 된 사람을 예수님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감격하고 경배하는 제자만이 아니었다. 지금 예수님을 경배하면서도 아직도 믿음이 흔들리는 제자들에게도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인류전세계 인류의 10억 이상이 집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지구촌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 가난한 사람 중 150만명을 위하여 밀러드 풀러는 30만채의 집을 지어주었다.
대단하지 않는가? 3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밀라드 풀러는 어린 시절 외롭게 자라야 했다. 그때 밀라드 풀러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에 결심한다. 왜냐하면 변호사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면 인생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였고, 또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사업하는 것마다 성공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다. 밀라드 풀러는 자신이 꿈꾸었던 것보다 더 풍족한 삶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밀라드 풀러의 삶에는 만족함이 없었고, 매일 조금만 더 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러한 밀라드 풀러는 삶에 무리가 있었는지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또 가정을 소홀히 하는 남편이 되어서 아내에게 이혼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가 왔을 때 밀러드 풀러는 아내와 함께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들어간다. 그래서 5년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에는 콩고에 가서 극빈자들의 형편없는 집에서 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집짓기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자기의 사명이요, 하나님이 맡긴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운동이 해비타트 운동이었다. 사실 밀러드 풀러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있으면서부터 가진 돈을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해비타트 운동을 시작할 때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런데 해비타트 운동을 통하여 150만여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30만채의 집을 지어줄 수 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러드 풀러는 가진 것이 많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이다는 믿음으로 일하였다. 그랬더니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건축자재를 사서 섬기는 사람도 있고, 또 직접 몸으로 섬기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서 전세계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집을 많이 지어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면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이 제자를 삼는 역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 삼는 일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28장 11절을 읽기 바란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당시 전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의 황제는 피지배국에 황제를 대신하여 총독을 보내었다. 그래서 총독은 황제의 권위로 그 지역을 다스림으로 모든 백성이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서 제자를 삼을 때에 제자들의 권위와 힘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권위가 함께하기 때문에 세상은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나는 부족하여 제자가 될 수도 없고, 또 제자 삼으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함께 함으로 그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 삼는 사명을 감당할 때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로다 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예수님이 함께한다는 말은 내가 병들었을 때 고쳐주시고,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힘과 권위로는 제자를 삼을 수 없는데, 예수님의 힘과 권위로 제자가 삼아지는 것을 볼 때에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사명이 이루어지는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깨닫고 있는가? 얼마 전에 목사고시가 있었다. 그때 면접을 하면서 저는 목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답변을 들은 후에 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목사는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에는 국경지역에 왕의 동상을 만들어 놓고 여기가 왕의 땅이라는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는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는 것을 이 시대에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형상이 되어야하는 사명은 목사만 가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여교회 성도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대에 이런 사명을 감당할 만큼의 믿음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형상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이루시는 예수님이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이 역사는 나를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더 의지하고, 바라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