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밤이 길수록
잠은 달아나고
눈은
말똥말똥
많던 팥죽은
밤이 깊어가기도 전에
동이 났었지.
기다림
남진원
내일 아침이면 아름다운 것들이 기다릴 것이네
밤이 늦도록 TV를 보거나 글을 쓰고
자리에 누우면
내일 올 아침이 반갑다
맛있는 밥과 국이 기다리고
작품을 정리할 일들이 환희롭다
자다가 입이 마르고
몇 번씩 깨어 한동안
소화가 안 되어 힘들어하지만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즐거운 일들
평범한 내일이
축복처럼 기다려진다.
얄궂다
남진원
똥을 잘 싸서 기분이 좋다
딱딱하게 굳은 똥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긴 줄기의 똥
요즘엔 이런 똥을 눈다
예전엔 똥끝이 말라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똥을 누고 나서
얼굴을 만지니
매끌매끌하다.
손도 순한 여자애들처럼
보들보들하다
숨 쉬는 것 때문에 자주
힘들어도
이렇게 똥을 누고 나면
기분이 좋다.
얄궂다
밥
‘밥’은 늘 곁에 함께 하며
건강을 지켜주었다는 걸 알았다.
든든히 속을 채우고 나면
부러울 게 없지
더러 외로우면
어떠랴
먹을 게 없으면
외로움도 사랑도 사치일 뿐이다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충성스러운
伴侶이다.
(2022. 12. 24.)
저간의 자랑거리보다
남진원
지나침도 많았고 모자람도 많았구나
모두가 의미 있어 돌아보니 다 보배네
저간의 자랑거리보다 허물들아, 고맙다
오늘, 바보 같은 즐거움을 얻고 나니
하루가 하루가 기적이고 기쁨이다.
마음은 어리석어도 행복해서 뜨겁다
肉身의 집
남진원
움직이는 근골이 모두 허공이었구나
살은 또 뼈와 함께 億劫이 지워지니
생사가 타버린 이 집, 즐거운 무소유
시루떡 한 덩이
사랑해요,
좋아해요!
야단스럽고 달콤한
이런 말을 하지만
이런 사랑이
추운 겨울 날
눈빛으로 손으로 온 몸으로
말없이 건네주던
뜨끈한 네 시루떡 한 덩이만 하랴.
소년처럼
수돗물을 틀자, 봄 냄새가 활짝 났다
시낭송회를 가는 도중 매화나무 옆을 지났다 ‘한 달이 지나면 활짝 매화를 볼 수 있겠구나’ 매화 송이가 발걸음만 싱그럽게 했겠느냐
가슴도 소년처럼 뛰었단다.
(2022. 12. 31)
거 울
한 세상 살다 보니 사람이, 자연이
모두 거울이다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이 거울이었다
사람에 따라 내 모습이 다 달랐다
웃는 모습, 행복한 모습
화내는 모습, 일그러진
내 모습이
거기에 모두 살아 있었다
꽃을 보고 나무를 보면
그들이 모두 또 거울이었다
미워하고 증오하던
부끄러웠던
내 모습들이
향기 나는 꽃 속에서 우뚝한 나무 속에서
다 勃起하곤 했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야 겨우 볼 수 있는
뿌연 세상이라는 거울 속에는
기계와 욕망이 배설해놓은
부유물들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한 세상 살다 보니 사람이, 자연이
모두 거울이었다
멍청이
2023년의 한 달이 하루 남았다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하는 데 …
절집에선 이런 인간을 ‘衲子’라든가 뭐라든가 …
자꾸 멍청이가 된다
ㅎ ㅎ
눈 떠 보니 세상이 바뀌었다
하긴 날마다 바뀌는 세상이었는데
오늘따라 새삼스러운 게 있었지,
집 주위에 작은 스티로폼 같은 흰 눈이 깔리고
TV에선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에서 권고로
바뀌었다고 야단들이다
나애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듯 ….
…
…
마을버스 타고 내려가
바닷가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
ㅎ ㅎ 또 멍청이가 되었나보다
말줄임표
사는 동안
젤 편한 게
자주 말 줄임표로 사는 거야
내 시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 줄임표
요즘 의원들 바가지로
욕 처먹는 것도
말 줄임표 개무시하는 것 때문이야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겠나
……
미운 사람 욕 나올 땐
말 줄임표를 써 먹으면
특효약
많은 사람 모인 곳에서도
말 줄임표로 있으면
높은 인격자처럼 보이지
너도 실행에 한번
옮겨 봐.
사는 동안
젤 편한 게
자주 말 줄임표로 사는 거야
** 시조문학에 작품을 정리하여 보냈다.
살구꽃 피는 밤에
미워한 그날 일들, 사랑했던 그 날 일들
미움이든 사랑이든 분별이 어리석어라
지금은 술이 필요하다네 그대 살결 같은 밤
(시조문학 2023년 봄호 송고)
고요 곁에 앉다
난 화분 두서너 개 창가에 두고 보니
봄볕이 스며들고 고요도 깃을 편다
그 곁에 또 누가 와서 텅 빈 채로 앉았나
(시조문학 2023년 봄호 송고)
役夫의 삽질
( 어느 모임을 보고 …)
남 진 원
오늘, 다시 조선의 役夫를 본다
서슬 퍼런 조선 선비
검은 머리카락을
떠내고 있다
무지의 칼을 들고 언어를 휘두르는
21세기 초현대라는 서투른 작품 뒤에 숨은
망나니들의 칼춤, 현재진행형이지
현상만을 유지하고
지위만을 독차지하려고,
지기 변명, 자기 모순의 역사를 쓰며
벌거벗은 욕심을 드러내놓은 채
시대에 아첨하는
발 빠른 죄의 하수인들
오늘, 다시 役夫의 삽질을 본다
서슬 퍼런 조선 선비
살아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을
떠내고 있다
수명 백세 시대, 역부의 삽질을
보는가
시대의 아첨꾼, 현대의 무자리인
너희는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