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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먹는 뱀 (창 3:14-15)
창 3:14-15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광우병이란? 소가 미친병이다.
왜 소가 미치는가?
이는 풀을 먹어야 할 소에게 고기를 먹였기 때문이다.
풀을 먹어야 할 소가 고기를 먹어서 미친 것을 보니,
이는 소에게만 국한 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 양식을 먹지 않으면 이렇게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소가 광우병에 걸리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신 각자의 양식을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하는 양식을 먹을 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경고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소가 고기를 먹으면 미치게 되는가?
아주 단순하다.
자기가 먹을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창조섭리를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정하여준 것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모두가 인간의 탐욕이 빗어낸 결과이다.
풀을 먹고 살아야 할 소에게 고기를 먹였으니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이게 어찌 비단 소에게만 국한 된 일이라 하겠는가?
인간도 먹어야 할 것을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면 광우병 증상이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먹어서는 안 될 양식을 먹어서 미쳐버리고 말았다.
미치면 눈에 뵈는게 없다.
안하무인이 된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한 짓이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였다.
이런 일이 바로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짓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부모를 대적하고 폭행하는 자식을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라고 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해(害)를 가하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술을 처먹고 미쳤든지, 마약을 처먹고 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는 패륜아를 미친놈이라고 주홍 글씨로 낙인을 찍는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각자에게 먹어야 할 양식을 지정해 주셨다.
어떤 짐승은 고기를 먹게 하셨고,
어떤 짐승은 풀을 먹게 하셨다.
동일한 짐승임에도 어떤 짐승은 풀을 먹도록 하셨고,
새들도 풀을 먹는 새가 있고 고기를 먹는 새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각자에게 맞은 양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창 1:29-30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각각의 피조물들에게 각자가 먹을 양식을 지정해 주셨다는 것은 각자의 소화 기관과 음식을 소화할 능력이 다르다는 말이다.
흔히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는 말을 한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고 햄버거를 먹게 되면 죽어버린다.
사자는 고기를 먹고 소는 풀을 먹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준 양식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양식을 먹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생명에 속한 지혜가 된다.
하나님은 피조물 각각에게 먹거리에 대한 본능을 주셨는데 각자가 먹어야 할 양식을 정확하게 찾아서 먹는다는 것이다.
뷔페 집에 가면 각자 좋아하는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 오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여러 가지의 음식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면 잘 먹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초대 할 땐 초대 당하는 사람의 식성(食性)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배려이고 예의이다.
예를 들어서 보신탕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초대 하고선 보신탕을 먹으라고 내어 놓으면 난감해 진다.
이슬람교 신자를 초대하고서는 돼지고기 삼겹살을 먹으라고 하는 것과,
힌두교 신자에게 소고기 국을 끓여주고 먹으라고 하면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모르고서 대접을 하게 되면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서 대접을 하겠다고 한 것이 상대방을 모독하는 일이 될 수가 있다.
이를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도 나타난다.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하기 이전에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가를 먼저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딴엔 충성하였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가인처럼 왜 내 제사는 받지 않느냐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일갈하신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바라신다고,,,,”
유대인들이 망한 것은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이다.
호 4:6-7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백성이 무지하여서 망한다고 하였다.
무지하면 번성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죄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앎이다.
앎이 먼저이고 제사는 나중이다.
호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몰랐다.
열심히 하나님께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시간 시간 모였고 갖다 바쳤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였다.
하나님은 제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신다.
내가 언제 이런 걸 원했느냐고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신앙에 역겨움을 드러내셨다.
사 1:10-14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시간 시간마다 소를 잡아 바치고 양을 잡아 바치곤 하였다.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대회 때마다 틈만 나면 찾아 와서 하나님 안녕하세요 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겹다고 한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갖다 바치는 것도 신물이 난단다.
얼마나 역겨웠으면 이스라엘을 유황불로 저주를 받았던 소돔 고모라 사람과 같은 인간들이라고 한다.
섬뜩해지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 왔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아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예수님도 요한계시록 3장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 하시기를 토해 내겠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헤야 하는가?
난 아닌 데요 라고 하는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면 된다.
하나님의 식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제사를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먼저 들으라고 하신다.
먼저 듣고 난 후에 열심이니 충성이니 하는 밥상을 차려도 차려야 한다.
속된 말로
갈비를 좋아하시는지,
잡채를 좋아 하시는지,
생선회를 좋아하시는지 들으라고 하신다.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차려 놓았다간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짝이 나기 십상이다.
난 죽도록 충성을 했는데 하나님은 받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날에 난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딴에는 엄청난 일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정작 주님은 모른다고 하시면 어찌 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저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눅 16장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돈을 좋아하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온통 돈 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신앙을 돈으로 판단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십계명을 확대해석하여 아주 잘게 썰어 놓아서 백성들이 죄에 걸려 들게 하여서 제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안식일에는 밥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것도 노동이라고 유권해석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미리 밥을 지어 놓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바느질을 해서도 안 된다.
행여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옷이 뜯어져도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기워주어야 한다.
만약 옷을 기우면 어김없이 죄가 되면 그럼 그 죄를 탕감 받기 위하여 양을 갖다 바쳐야 한다.
그래야 안식일을 범한 죄과가 사라진단다.
참으로 해괴한 법이다.
이런 하나님을 가르쳐 놓았으니 백성들이 하나님을 좋아 할 리가 없다.
안식일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안식일이 즐거운 날이 아니고 고역의 날이다.
안식일이 돌아오는 것이 며느리들에게 명절날처럼 싫은 날이 되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나쁜 하나님을 가르쳐 놓은 것이다..
여행을 가도 몇 키로 이상 움직이면 안 된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길이를 벗어나면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죄목으로 제물을 갖다 바쳐서 속죄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성전에는 백성들이 바친 제물로 차고 넘쳤다.
제사장들은 속죄 제물을 자기 분깃으로 차지하여 이익을 챙겼다.
그러니 백성들을 더 많은 죄목으로 가두어서 더 많은 제물들을 바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 성도들의 신앙을 돈으로 평가하는 목사들과 비교하면 막상막하이다.
목사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교인들이 소경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서기관, 제사장, 율법사)”들을 한 통속으로 묶어서 소경들이라고 하며 지옥으로 가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마 23:16-33절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돈을 갖다 바치면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었다.
잘못을 하여서 속죄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본인이 제물을 준비하면 안 된다.
바리새인들이 지정해준 업자로부터 구입을 해야 한다.
업자들이 준비한 양이라야 거룩해서 하나님이 받으신단다.
예수님 당시에는 거룩은 제사장들의 몫이었다.
제사장의 말을 안 듣고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가기가 어렵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얼마나 역겹고 화가 났으면 지옥에 갈 저주 받은 독사 새끼들이라고 하였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시면서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신 것이다.
가난하고 돈 없는 자는 제사도 드리지 못하였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소굴” 이라고 하였겠는가?
또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돈을 긁어모았으면 강도라고 했겠는가?
그럼에도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신들은 지도자(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한다.
결국 백성들은 소경에게 인도를 받아서 함께 망하게 된 것이다.
소경을 인도자로 두었다는 것은 자신도 소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소경을 소경에게 붙여서 함께 지옥으로 데리고 들어가게 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돈 버러지와 같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 들이라고 한 대목이다.
마 23: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돈을 좋아한다고 가르치는 자를 뱀 새끼라고 하셨다.
이로보건데 이 시대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로 신앙을 판단하는 목사들은 뱀 새끼들이다.
돈을 좋아하면 뱀 새끼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돈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목사인 나도 돈을 누구보다도 더 좋아 한다.
꼼짝없이 뱀 새끼이다.
모든 인간은 뱀 새끼이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여도 피할 길이 없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라고 하여도 그 악의 뿌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기에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 정도 되면 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 새끼” 들이라고 하셨는지를 추적해 보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개인 감정 때문에 거룩한 제사장들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시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뱀 새끼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왜? 예수님은 야! 이 소대가리들아! 돼지 대가리들아! 말 대가리들아!
아니면 코끼리 새끼들아!
이 더러운 바퀴벌레 새끼들아! 라고 하지 않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을까?
그럼 지혜가 허락하는데 까지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를 보면 뱀 이야기가 나온다.
창 3:14-15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뱀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특히나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뱀이라는 놈 때문에 인류가 죄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뱀에 대한 피해 의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뱀을 보면 왠지 기분이 나쁘고 죽이고 싶어지도록 밉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뱀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뱀에게 속은 인간들이 바보이지,,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뱀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뱀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선악과가 지니고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해 주었을 뿐이다.
만약 뱀의 후손들이 시비를 가려 달라고 재판을 벌린다면 승소하게 되어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육적으로 보면 뱀의 말대로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다.
눈이 밝아진 것뿐이다.
물론 죽음을 영적으로 보지 않고 육적으로 본 것은 잘못이지만,,,,
뱀의 말대로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선과 악에 대한 눈이 밝아졌다.
밝아진 눈으로 하나님과 같이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 라는 식으로 심판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자기 기준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같이 심판하는 자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뱀은 어떤 놈인지를 살펴보자.
창 3: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고 되어 있다.
“간교하다” 는 말의 어감은 부정적인 말이다.
마치 “간사스러운 사기꾼 같다” 또는 “비열하고 얍삽한 놈” 과 같은 뜻으로 들린다.
꼭 캬바레에서 유부녀 들을 등 쳐먹는 제비족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간교하다” 는 원문의 뜻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나쁘게 표현되지 않았다.
“간교하다” 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아룸” 이라는 말을 쓴다.
히브리어의 “아룸” 이라는 말을 신약의 헬라어 70인 역에서는 “프로니모스(frovnimos)” 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원래 “교활” 이나 “간교하다” 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지혜롭다” 는 뜻이고 “슬기롭다” 는 의미이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개역 성경에서도 역시 “슬기롭다”, “사려깊다”, “신중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도 이 “아룸” 이라는 단어를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 질 때는 “간교”나 “교활”의 의미로 번역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로 사용하였다.
그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잠12:16절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13:16절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14:8절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니라”
잠언에서 사용하는 “슬기롭다” 라는 말은 창세기 3장 1절의 “아룸” 과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아룸”을 사람에게 사용 할 때는 “슬기롭다” 고 한다.
그러나 유독 뱀에게는 “간교하다”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단어를 가지고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뱀에게는 나쁜 의도로 사용하고,
인간에겐 좋은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반칙이다.
만약 뱀의 후손들이 인간들에게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다.
뱀은 짐승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뱀에게는 간교니 교활이니 해 놓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슬기니 지혜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들이나 할 법한 일이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으로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뻔뻔스러움과 추악함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왜?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더라” 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는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상대방을 깔보고 무시하는 심정이 들어가 있으면 상대방의 지혜를 보더라도 간교로 보이고 슬기를 보더라도 교활로 보인다.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가 죄가 인간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도록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뱀을 어떻게 보았는가?
예수님께서는 뱀을 인간들처럼 편견으로 보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뱀을 있는 그대로 지혜로움으로 보았다.
그래서 12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오히려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다.
뱀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다.
마 10: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단어가 바로 구약 히브리어로 “아룸” 이다.
신약 헬라어로는 “프로니모스(frovnimos)” 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프로니모스(frovnimos)” 하라는 말씀을 지금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창세기 식으로 번역을 하면 “너희들은 교활하라” “간사스러워라” 가 된다.
과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야비하고, 얍삽하고, 교활하고, 사기꾼처럼 간사스럽게” 행동하라고 하였겠는가?
여기엔 모두가 손 사래질하며 이구동성으로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편견이 예수님은 좋은 말만 하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님처럼 뱀의 이야기를 지혜로움으로 생각해 보자.
뱀은 선악과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여자에게 알려 주었다.
굳이 뱀의 잘못을 따진다고 하면 너무 올바르게 알려 준 것이 죄라면 죄이다.
알다시피 뱀은 사단 마귀의 상징이다.
계 20:1-3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욥기서를 보면 사단은 인간을 참소하는 자로 나타난다.
사단은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거나 천국으로 보내지는 못한다.
인간이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해 놓으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누가 천국백성이고 누가 지옥백성인지를 가려내는 일을 한다.
누가 하늘 사람이고, 누가 땅 사람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찾아낸다.
하지만 누가 천국백성으로 작정이 되었고, 누가 지옥에 갈 사람인지는 모른다.
다만 사단은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지옥에 보내고, 어
떤 자를 천국에 보내는지를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뱀은 선악과 속에 담긴 그 비밀을 아는 지혜로 인간에게 접근한다.
창 3:1-6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이 선악과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곧 생명과의 비밀도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뱀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과를 가리는 작전을 구사한다.
뱀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라고 함으로서 인간의 관심사를 먼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돌려버리는데 성공한다.
만약 뱀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실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인간은 당연히 생명과로 눈이 고정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선악과를 따 먹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잘 아는 뱀이기에 뱀은 인간의 눈을 선악과에 붙잡아 두는데 성공한다.
관심사가 선악과에 고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마음을 단박에 빼앗을 만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할 만한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마음에 먹고 싶다는 그림이 그려지면 인간의 모든 신경은 먹고자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뱀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에 눈길을 사로잡게 함으로서 이미 게임을 끝냈다.
언제 따 먹느냐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뱀의 잘못은 인간의 눈을 선악과로 빼앗은 것이다.
그래서 저주의 길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뱀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에겐 알려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 준 것 때문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에게는 선악을 아는 일은 해(害)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른이 어린 청소년에게 소화하지도 못할 성인비디오 내용을 알려 준 것과 같다.
성인비디오는 그것을 소화 할 수 있는 성인에게는 전혀 해(害)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性)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보면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가 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어린아이가 성인비디오를 보지 못하도록 꼭꼭 감추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혜는 예수님처럼 온전하신 분이 가지고 있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가지게 될 때는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가 있다.
세상을 창조주 입장에서 판단치 않고 피조물 입장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만든 것도 피조물 입장에서 좋지 않다고 할 수 있어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강한 경고를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선악과를 먹고 난 후의 인간들은 모든 것은 인간 중심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가 선한 것인데 다만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기 생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어서 악한 것이 되고 만다.
가장 쉬운 예로 보면 인간들은 자연을 보호 한답시고 자연을 훼손한다.
자연 보호는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자연을 보호를 잘하는 것이다.
제발 가만 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속된 말로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으면 되는데,
괜히 먹어가지고 이런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감당하지도 못할 선악의 지식을 가져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서 안식하시던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 때문에 안식하시지 못하고 지금까지 일하시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을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깨트리고 만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과유불급이라고?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지혜도 절제하지 못하고 넘치게 사용하면 화를 입게 된다.
뱀처럼,,
반대로 지혜가 부족하여 자기 뜻대로 판단하는 것도 화를 입게 된다.
인간들처럼,,,,
뱀은 지혜가 넘쳐서 망하였고,
인간은 지혜가 부족하여서 망하였다.
둘 다 지혜를 잘못 사용하여서 함께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뱀은 인간에게 선악과의 비밀을 알게 해준 죄로 저주를 받았고,
인간은 지혜가 부족하여 뱀의 술수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은 죄로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뱀과 인간에게 떨어진 저주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 다 흙에 가두어진 것이다.
창 3:18-23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나님은 뱀과 인간들을 둘 다 흙을 떠나지 못하도록 저주하셨다.
인간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 흙으로 돌아가도록 저주 하셨다.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도록 저주하셨다.
인간은 일평생 근본 된 토지를 갈게 되었고,
뱀은 배로 기어 다니면서 종신토록 흙의 기운으로 살게 되었다.
뱀과 인간은 흙을 근거로 살아가는 한 통속이 되고 말았다.
뱀과 죄인은 유유상종이다.
중요한 것은,
뱀이 인간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뱀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뱀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종신토록 흙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뱀이나 인간은 흙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뱀은 비록 배로 기어 다니기는 하지만 흙을 먹지는 않는다.
이 땅에 그 어떤 뱀도 문자대로 흙을 퍼먹고 사는 뱀은 없다.
뱀이 종신토록 흙을 먹는다는 것은 비유이며 상징인 것이다.
흙이란? 아담을 만들 때 사용한 재료이다.
그렇다면 뱀이 흙을 먹는다는 것은 곧 인간을 먹는다는 말이 된다.
육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육이란? 영의 반대말이다.
육을 죽음이라고 하고,
영은 생명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영(靈)이라고 한다.
생명의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를 영이라 한다.
반대로 죄인인 인간들 세계를 육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마귀는 육이라는 죽음을 지배 한다.
죽음은 죄의 삯이다.
마귀는 죄를 주관하여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일컬어 세상 신이라고 한다.
세상 신이란? 육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이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뱀에게 육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마귀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하였다.
마귀는 예수님까지 흙에서 난 것을 먹으려고 하였다.
마귀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굶주린 예수님을 찾아 갔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마저 자기에게 무릎 꿇게 하려고 수작을 건다.
눅 4:1-13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사십일을 굶은 예수님에게 먹을 것으로 시험한다.
육신은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다.
아무리 항우장사라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사흘 굶어 담장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하질 않는가?
예수님은 사십일을 굶으셨다.
당연히 몸이 요구하는 대로 떡을 구하여야 했다.
그래서 마귀는 몸에 필요한 떡을 주겠다고 한다.
마귀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먹을 양식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
이는 마귀가 알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양식이다.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떡을 거부한 인간은 단 한사람도 없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마귀는 놀라면서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아니 떡을 싫어하는 인간도 있단 말인가?
당연히 떡을 먹어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먹는다고 하는가?
마귀는 당황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떡을 거부한 것은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겉으론 분명히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소화시키는 기관을 가지고 계시는 이상한 분이시다.
이것은 장차 이 땅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살아갈 희한한 족속들이 출현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말씀으로 난 성도들이다.
첫 공작에 실패한 마귀는 두 번째 공작을 한다.
이번엔 마귀가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이라는 세상 것으로 다시 흥정한다.
마귀는 당당하게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자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한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영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마귀가 하는 말 중에 의미심장한 것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마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상(像)”이 들어가 있다.
마귀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세상에서 영웅이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왕이 되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것은 세상나라의 대통령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뱀 사상이다.
마귀는 세상을 정복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여서 하나님 아들 됨을 드러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여기시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신다.
왜?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는가?
이는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것은 흙에 속한 자는 거절할 수 없는 최고의 것들이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매력적인 것들이다.
흙에 속한 자들은 오매불망 바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흙의 생명을 가진 분이 아니고, 하늘의 생명을 가시진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흙에 영광이란 쓰레기 같은 것이다.
바울은 세상의 영광을 가까이 두기 싫은 “똥(배설물)”이라고 하였다.
이러 할진데 예수님께서 뭐가 아쉬워서 똥을 쌓아두고 똥에 묻혀서 산단 말인가?
그러나 이 시대 한국교회 목사와 교인들은 똥을 많이 쌓는 경쟁을 벌린다.
똥을 많이 쌓아놓은 놈이 신령한 목사로 칭송을 받고 있다.
포복절도할 일들이 지금 이 순간도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여 똥을 많이 주세요!
밤낮을 잊은 채 산에서 들에서 굶어가면서 다고 다고 한다.
그러면 광명의 천사처럼 마귀가 주님으로 위장하고 다가와서 오냐 여기 있다! 라고 한 움큼 집어 준다.
그러면 축복 받았다고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간증을 한다.
기독교 방송은 한 술 더 떠서 생방송에다 위성 중계방송까지 한다고 지랄을 떤다.
아! 이 포복절도 할 코미디여!
이를 어이할꼬!,,,
아무튼 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흙에 붙잡아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뱀 보다 더 지혜로우셔서 뱀의 달콤한 속삭임을 단호하게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일갈하면서 쫓아버리셨다.
하지만 뱀보다 지혜가 부족한 인간들은 뱀이 천하만국에서 영웅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말에 현혹되어서 영원히 흙에서 왕 노릇하고자 한다.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흙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뱀의 독(毒)을 마신 증거임을 알지 못한다.
도리어 교회마다 목사들이 세상에 영웅이 되라고 가르친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 영웅이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도 세상 건물보다 화려하고 웅장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돈을 맡겨둔 것처럼 일수 돈 받아내듯이 받아내고 있다.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단다.
목사도 세상나라 장관급 정도의 최고급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최소한도 한국교회에서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은 창피스러운 존재이다.
이 시대 대형 교회들을 보라!
교회가 궁전처럼 화려하다.
최고급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감히 더러운 사람들이 그 의자에 앉을 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거지 나사로가 교회에 간다면 교회 물을 더럽힌다고 쫓아 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어서 오늘도 노숙자로 떠돌고 계시진 않은가 싶다.
예루살렘 성전같이 화려한 교회에 감히 거지 왕초와 같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들어 갈 수가 있겠는가?
사실이 이러 할진데도 이 시대 무지한 교인들은 뱀의 종들에게 찾아가서 천하만국에 영광을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간청한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세상에서 으뜸만 되게 해 달라고 한다.
목사들은 복채(헌금)를 가지고 와서 자기에게 기도를 받으라고 한다.
사업이 성공하게 해 준다고 하고, 하는 것마다 만사형통하게 해 주겠다고 한다.
삼중축복이니 오중복음이니 라고 하면서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만사형통하게 해 주겠다고 한다.
수험생들에겐 좋은 대학 보내 주겠다고 하고,
혼기를 앞둔 처자들에겐 좋은 혼처를 만나 결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란다.
그러면서 “네 시작은 미역하였으니 나중은 창대 하리라”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리라”
“주여 종의 집에 영원히 복을 주옵소서” 라는 글귀가 적힌 부적들을 준다.
무식한 교인들은 목사가 들고 온 이런 액자를 부적처럼 사업체마다 식당마다 가게마다 집집마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신주단지 모시듯이 달아 놓고 기원한다.
뱀과 한 통속이 된 인간은 절대로 흙에 영광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뱀의 말을 뉘라서 미혹으로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마귀를 이기려면 마귀의 무기를 알아야 하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뱀처럼 흙에 기운에 흠뻑 취하여서 황홀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알 턱이 없다.
사도요한은 세상에 푹 빠져 있는 종교를 일컬어 음녀라고 하였다.
계 17:2-5절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종말 교회의 모습을 음녀라고 한다.
교회가 땅에 거하였다고 한다.
땅에서 임금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 반대이다.
마귀에게 절하여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고 땅에서 왕 노릇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땅에 속한 목사와 교인들이다.
뱀 새끼들이다.
이 시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경쟁적으로 세상에서 왕이 되겠다고 한다.
목사들은 마귀의 자리에 앉아서 교인들에게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했던 말로서 미혹한다.
교인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으뜸이 되어서 하나님 아들 다움을 보이라고 한다.
세상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한다.
신자가 거지같이 살면서 어떻게 전도를 하겠느냐,
잘 살아야 전도가 될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
거지같이 되어서 하나님 망신시키지 말라고 한다.
한국교회에선 가난은 죄악이다.
부자는 선(善)이고!
가난은 악(惡)이다.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의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이나 12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망신시킨 자들이 되고 만다.
가난하게 십자가 도만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망신시키는 자들이다.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가 크면 자랑스러워하여도 교회가 작은 것을 부끄러워한다.
교인이 없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심지어 한 지붕에 사는 가족들조차도 복음을 모르면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는 목사는 싫어한다.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만나서 이 모양 이 꼴인가 신세타령한다.
복음을 인하여 고난당하는 것은 싫어한다.
이는 모두가 흙에 속하여 하늘에 비밀을 모르는 소경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흙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먹거리가 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짐승의 밥통에 나신 것은 흙을 먹는 짐승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먹고 하늘나라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눅 2:5-7절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자기백성들의 양식으로 보내셨다.
그래서 짐승의 밥통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먹거리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양식이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다.
예수를 먹고 하늘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요 6:47-58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늘의 양식인 줄 모른다.
도리어 정신 나간 말을 한다고 하여 다 떠나가 버렸다.
아니 사람이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고 살지 어떻게 사람을 먹는단 말인가?
식인종도 아닌데,,,
그러면서 수군거리고 다 떠나갔다.
요 6: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60-61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맞는 말이다.
어찌 예수가 양식이란 말인가?
사람이 떡을 먹고 살지 어떻게 예수를 뜯어 먹고 산단 말인가?
그럼 누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양식이라는 것을 안단 말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알게 해 준 사람만이 알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알 수가 있다.
예수님은 수군거리면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떡)이신데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떠날 수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우린 안 떠난다고 한다.
요 6:67-65절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65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양식임을 알았다.
떠나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제자들은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나에게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알려 주신다.
제자들의 실력이 아니란다.
이 모두가 예수님에게 선택을 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흙에서 나는 양식을 먹고 사는 자와,
하늘에 양식을 먹고 사는 자가 있다.
흙에서 난 자는 흙에서 난 양식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하늘로서 난 자는 하늘에 양식을 먹고 살다가 하늘로 돌아가데 된다.
성도의 육신은 비록 땅에서 난 음식을 먹지만,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임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살과 피란? 새 언약을 말한다.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세우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하늘에 떡을 먹는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하늘에 가치로 살라고 한다.
골 3:1-5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땅에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육신의 가치로 살지 말고 영생의 가치로 살라는 것이다.
떡의 가치로 살지 말고 말씀의 가치로 살라는 것이다.
영생의 가치로 살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도를 일컬어 이 세상에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한다.
나그네는 어디를 가든지 곧 떠나야 할 것을 알고 미련을 두지 않는다.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산다.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치가 잘 되어가든 말든,
경제가 잘 돌아가든 말든,
광우병 걸린 소고기가 수입이 되든 말든 목소리 높여서 따지지 않는다.
다 지나가는 형적이기 때문이다.
무공해 한우고기를 먹어도 죽고,
광우병 걸린 소고기를 먹어도 죽는다.
왜인가?
다 흙이기 때문이다.
뱀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세상과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저주 받은 흙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성도는 흙을 먹고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도가 먹고 배부르게 할 양식이다.
흙을 먹고 사는 세상에서 말씀을 먹고 산다는 것은 비정상이다.
그러니 정상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을 포기하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도 말라.
나그네는 하루 하루 떠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련 둘 필요도 없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산 사람들을 보라.
히 11:13-16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들은 우리의 증인들이다.
이들 속에 우리가 있다.
세상 살기가 힘이 드는가?
그건 당연한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후면 주님이 오신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