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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찾아낸 생각의 진솔한 기록들
경암鏡巖 이 원 규
글을, 특히 시를 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내면의 고통 없이는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더구나 시詩 짓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짧으면서도 독창성 있게 예술 감각까지 살려야 하는 고급스러운 문장文章이므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문장은 단순한 기호의 나열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담고 욕망을 충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반영하므로 세상 밖으로 발표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난 평범한 주부니까 생활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진실하게 기록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신문이나 잡지의 가십만도 못할 것이 뻔이다. 그래서 시인은 단어부터 신경 써서 잘 고르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들을 골고루 잘 버무려서 어떻게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만들 것이냐 하며 깊은 생각으로 밤새워 고뇌한다.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요란스럽게 치장하고 아무리 길게 쓴 장편 시라고 해도 그것을 읽은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나 감동으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문장 축에도 못 가는 ‘죽은 글〔死文사문〕’일 뿐이다.
예로부터 많은 지식인은 ‘시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여러 가지 답을 내놓았다. 호라티우스는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읽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했고, 백거이白居易는 ‘시는 정情을 뿌리에 두고, 말[言語언어]로 싹을 틔우며, 소리[音律음율]로 꽃을 피우고, 의미意味를 열매로 한다’고 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시는 참삶의 기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달 말경(2012. 2. 27) 황현산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는 번역飜譯 예술’이라고 말했다. 즉 ‘일상의 말을 뒤집어(飜번), 시의 말로 풀이하는(譯역) 게 시인의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가 되고 일상 언어의 경계를 허물 때 시적 상태가 시작된다’고 했다.
필자도 요즘엔 황현산 교수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집의 저자인 양길순 시인이 첫 시집에서 <끌어내린 하늘 호수에 잠긴 날>부터 끌어당겨 읽어 보고 시작하자.
끌어내린 하늘 호수에 잠긴 날
설익은
홍시 한 알
자꾸 보채며
아우성일 때
눈 시린 햇살 호수에서 빈 하늘로
튕겨
날아오른다. - <끌어내린 하늘 호수에 잠긴 날> 전문
위의 작품에서 시인은 ‘끌어내린 하늘 호수에 잠긴 날’이라면서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고 있다. 도무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도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이처럼 다른 작품들도 다소 엉뚱해 보이면서도 비유와 은유 그리고 상징들이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다소 어렵게 읽히지만 고리타분하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도 뜬금없이 ‘설익은 / 홍시 한 알 / 자꾸 보채며 / 아우성일 때’ 빈 하늘로 튕겨 날아오르는 햇살을 그 ‘호수’에서 보았다고까지 하는 대목에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끌어내린 하늘 호수에 잠긴 날>은 <가을 백서>라는 부제까지 달고 있다. 그야말로 호숫가에서 본 가을 풍경을 한 폭 비단 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휘갈긴 채색 한국화처럼 시원스럽게 그려냈다. 비록 8행으로 호흡은 짧은 작품이지만, 문단에 들어와 활동한 지 20여 년의 저력이 엿보여 믿음직하다.
그동안 많은 작가가 ‘호수’를 소재로 삼아 작품을 써 발표했다. 그중 필자가 애송하는 정지용 시인의 <호수 1>을 보자.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정지용, <호수 1> 전문
이 시를 애송시로 삼게 된 이유는 보고 싶은 얼굴은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지만, 그 마음이 ‘호수만 하다’라며 절절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하지만, 그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한 단계씩 더 성숙해지는 것이다.
시 짓기는 산문과 달리 단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면서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해야 한다. 글을 무조건 짧게 하라는 게 아니라 압축된 언어로 표현해 보라는 뜻이다. 필자는 문청文靑들 앞에서 강의할 때 작가의 문장은 <최소의 단어로, 최대의 효과>가 나야 한다며 늘 힘주어 말했다.
위의 시는 다섯 글자씩 6행을 2연으로 나눠 읽는 맛을 살린 하나의 문장이나 다름없다. 2연의 ‘보고픈 마음’은 ‘보고 싶은 마음’이 올바르고, '눈 감을 수밖에'에서는 '눈 감을밖에'라고 ‘수’ 자를 빼 다섯 글자로 맞춰 운율을 살리고 있다. 이처럼 문법적으로는 당연히 어긋나지만, 시에서만큼은 허용되는 것을 ‘시적 허용’이라고 한다.
저물녘
시린 손 호주머니에 살며시 넣고
고개 들어 우연히
노을 보았다
어느새
은빛 십자가 위로
유유히
비행하고 있는 새떼
개천가 징검다리 건널 때
고삐 풀린 물줄기 용트림하는
이제는
입춘이다. - <입춘> 전문
해가 바뀌고 입춘쯤 되면 누구나 마음부터 바빠지게 된다. 옛날 농촌에서는 입춘 날에 어르신들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붓글씨로 써서 대문이나 대청마루 기둥에 붙였다. 겨울이 끝나고 새봄이 되었으니 슬슬 농사 준비를 서두르자는 뜻이 담겨있고, 올해도 만사가 형통하게 해주십사는 염원도 곁들여 있다.
하지만 입춘 무렵에는 오는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다. '입춘 추위 김장독 깬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입춘 날 해가 질 무렵에 시인은 산책하기 위해 샛강에 나갔다가 우연히 저녁놀을 보게 된다. 금빛 찬란하게 물들어 있는 저 노을도 곧 사라지고 이내 어둠이 오게 될 것이다. 겨우내 얼었던 물줄기가 용트림하며 흐르는 징검다리를 조심조심 건넌다. 시인도 어느새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으니 모든 게 조심스럽고 마음도 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입춘이다!’라고 외친 것이다.
나이 쉰은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천명天命을 알고 인생을 보는 관점도 달라질 시점이다. 하지만 살면서 이렇다 하게 이루어 낸 것이 없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 입춘 무렵, 양길순 시인은 내게 100여 편쯤 되는 작품 원고 묶음을 보여주면서 이것으로 ‘시집詩集’이 되겠느냐고 했다. 늦깎이 출간이니 빨리 서두르자고 오히려 내가 더 흥분되었다. 그러던 며칠 후 또다시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에게 보여줄 작품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조금 더 미루겠다’는 거였다. 필자는 급히 황지우 시인의 시 1편을 그녀의 메일에 쏘았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이십 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겨울이 되어야 진짜 나무를 볼 수 있다. 가지에 매달렸던 그 많던 잎이며 탐스럽게 영글었던 열매까지 모두 떨쳐버리고 알몸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나무는 나무로 된다. 보라! 춥고 긴 겨울을 참아내고 봄이 되면 어김없이 잎을 밀어내면서 스스로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들!
그렇다. 나무처럼 남이 보거나 말거나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며 죽지 않고 또 살아나야 시인이다. 양길순 시인도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말 접어두지 마시라. 달 밝은 밤, 달맞이꽃이 꽃잎을 활짝 열듯이 말문이 확 틔어 정말 신바람 나게 시를 지으며 살아 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지금은
너무 밝아서
고해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어둠 내리고
별이 총총 빛날 때
노란 꽃등 일제히 켤 테니까
그때
접어두었던
속마음 이것이요 하며
꽃잎들 활짝 열어 보여줄 거야.
- <달맞이꽃> 전문
시는 소재로 삼은 대상 자체를 사진 찍듯이 그 앞에서 찍어내는 게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읽는 이가 상상력이 발동될 수 있도록 실감 나게 묘사해야 한다. 아래의 시구詩句들을 보면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든다. 무엇인가 술술 풀려나갈 조짐도 보인다.
‘갈대숲 그늘에 / 물안개 / 드리우면 / 꼬물거리는 / 저 갯버들 / 눈 뜨는 것 좀 봐’라던 <봄, 징검다리 건너다>, ‘세월에 밀리어 / 떨어지는 / 꽃잎 / 바람에 날릴 때 / 함께 볼래’라던 <연둣빛 일기>, ‘전사처럼 / 푸른 수염 세워 / 붉은 꽃잎 밀어내는 사랑의 괴로움 / 온몸으로 / 피었다가 이내 지고 마는 / 찰나의 꽃’이라고 묘사한 <아네모네>, ‘젖가슴 / 사 알 짝 / 풀어헤치고 / 귓불 붉힌’ 배나무 꽃눈들이 은근히 다음 시들도 읽어 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하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그녀가 남편과 함께 갔었을 낚시터부터 잠깐 둘러보자.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먼 곳으로 여행하여 낯선 풍경을 만났을 때 ‘와! 정말 멋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글로 쓰라면 한 문장도 쓰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시어詩語는 별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어라고 일상어와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시에 쓸 때는 새로운 감각이 있는 세련된 언어가 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시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똑같은 조건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보았지만, 시인처럼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시인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 그런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연작 시 <낚시터> 1, 2, 3, 4에서 발췌한 시구들이다.
1) 햇볕은 / 어디에 숨었나? / 이웃집 모모 / 속마음 닮았는지 /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 / 물결 흔든다
2) 물풀들 속절없이 너울거리는 / 그 찰나 / 물속 그리움 / 물 위로 / 잽싸게 낚아챘다
3) 어둠은 사방으로 흩어진 정적 모으고 / 밑창 닳아 버려야 할 / 절망마저 / 낚을 듯 꼿꼿하게 / 더욱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찌
4) 고개 들어 하늘 보니 / 수박덩이만 한 보름달 / 하늘 끌어안고 있다가 / 손닿을 듯 낮아지더니 / 어느새 호수 속으로 텀벙 빠졌다.
낚시터(꾼)는 단순히 물고기만 낚는 곳(것)이 아니다. 흔히 ‘강태공’ 하면 낚시꾼의 대명사로 비유한다. 강태공은 72세의 나이에 주周 나라 문왕에게 등용되어 은殷 나라를 멸망시킨 재상이며 후에 제濟 나라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가 본보기로 삼아도 될 그의 일화 1편을 소개한다.
어느 날 낚시를 하고 싶다는 친구 셋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친구들을 배에 태워 넓은 바다로 나갔다. 맨 앞자리엔 강태공, 그 뒤에 차례로 한 사람씩 자릴 잡았다. 똑같이 낚싯대를 던졌는데 이상하게도 고기들은 그의 낚시에만 물렸다. 그런데 그는 물고기 담을 바구니에서 이상한 막대기 하나를 꺼내더니 잡은 물고기를 나무 자로 재어 보고는 그보다 크거나 작으면 모두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친구들이 의아해서 그에게 ‘왜 애써 잡은 물고기를 버리느냐?’ 물었더니, 왈, ‘우리 집 그릇 크기가 이 막대기만 하니 요리해 먹을 할 수가 없으니 버리는 거라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밤새도록 내린 함박눈
아랫녘 과수원
배꽃 벙글었다던데
마른 나뭇가지에
핀 눈꽃
먼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찾아온
순백의 손님
내 애틋한 소망
초봄의 희망
하얗게 덮어주고. - <춘설春雪> 전문
봄에 내린 눈을 보고 썼을 위의 작품은 과수원 풍경이 아련하게 보이는 듯하다. 행간을 1줄씩 떼어놓아 천천히 거닐면서 읽기를 유도하고 있다.
시를 짓다 보면 단번에 시가 되는 행운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 좋은 시는 오랫동안의 퇴고 과정을 거쳐서 나온다. 양길순 시인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원하는 이미지와 들어맞는 시어를 찾아서 바꾸고 또 바꾸며 퇴고推敲 했던 것이다.
‘퇴고’란 백과사전에 ‘글을 쓸 때 여러 번 생각하여 잘 어울리게 다듬고 고치는 일’이라고 풀이했다. 모든 일에는 그 마무리가 중요하다. 퇴고는 그 작품의 마무리 작업이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밀한 종합 진단이다.
그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잘못되었으면 강태공처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미련 두지 말고 가차 없이 도려내야 시다운 시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명문장가치고 퇴고하는 일에 애쓴 일화가 없는 사람은 없다. 고치면 고칠수록 더욱 좋아지는 것이 글쓰기의 진리다. 이 진리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 일이다.
제1부 <봄>의 뒤쪽에 배치된 작품들은 대부분 <시詩>를 향한 열정이 담겨있기에 10편 중에서 각각 1문장씩 발췌하여 1편의 시처럼 엮어보았다.
자! 소리 내어 빠른 속도로 낭송하며 <여름>으로 달려가자.
- 낮은 포복으로 오는듯한데 어느새 앞서 가고
-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끈질김으로 파도와 맞서는 너에게
- 그들의 슬픈 죽음에 대하여 늦은 밤 고해하듯 마음 털어놓고
- 젊은 날 첫사랑 편지처럼 풋풋하게 다가온 4월
- 꽃이 피기까지 꽃잎을 향한 의지의 바람 맞으며
- 들길 민들레도 못자리 볍씨도 물올라
- 아카시아 향은 나를 유혹에 빠져들게 하여
- 그는 창 너머 들판을 가로질러
- 카타르시스 맑은 시 아카시아 꽃잎에도
- 내 사랑 그는 나를 종일 적셔줍니다.
여름은 뜨거운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제2부 <여름>은 정열적인 사랑 타령 일색이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그야말로 수준 높은 도道를 깨우치는 것이다. 길거리나 찻집에서 만나 가볍게 대화하는 말과는 그 차원부터 다르다. 그래서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시에 대입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보라! 아래의 작품들이 사랑 사랑하며 <사랑>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제1부에서처럼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끝없는 <문학사랑>으로 가 닿고 있지 아니한가!
양길순 시인의 첫 시집 표제이기도 한 <꽃의 연대기>에서도 ‘발돋움하여 키 세우고 / 잠시, 그들을 엿보았을 뿐인데 / 나에게로 다가와 /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그런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기왕지사 시를 지으려거든 주장하는 바가 어느 관점, 어느 누가 보더라도 명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어차피 시는 문자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의사전달 행위이다. 이때 시어詩語로 쓴 단어가 단순히 사전적 의미인 한 가지 뜻으로만 해석된다면 굳이 어려운 시를 써서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읽을수록 상상력이 증폭된다면 일반적인 문장이 아닌 ‘시’라고 보면 된다.
그 무덥던 여름날에 ‘귀 밝혀 쌓아둔 시어들’을 뽑아 이렇게 펼쳐놓으니, 1편의 시 맛이 난다.
- 귀 밝혀 쌓아둔 시어들 윤유월 장맛비에 쏟아져 내려
- 환장하겠어, 봉오리 터뜨릴 수 없어
- 문득, 바람 사이로 사라지는
- 홀연히
날개 접고
자폭하는
거룩한
순례자
- 넌, 찻잔 너머 젖은 새 날갯짓만 바라보고
난, 창틀에 떨어져 흩어지는 물방울만 세었지
- 어머니 따라 들이며 밭 오갈 때면
- 장독대에 쏟아지던 햇살
- 빗밑 잰 6월 그믐밤
- 뻐꾸기 나직하게 울어대고….
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나와야 감동으로 살아나는 법이다. 없던 일 꾸미려고 애쓰면 머리로 쓰는 시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무엇인가 가슴에 남아 썼다면 가슴으로 쓴 시다.
이번 첫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양길순 시인이 겪은 사소한 사랑이야기지만, 그것이 저속하지 않게 읽히는 까닭은 바로 비유법을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비유법에서 직유법보다 어려운 것이 은유법이다. 은유법은 직유법에서 사용하던 ‘~처럼, ~같이’ 등을 생략하고 곧바로 '무엇은 무엇이다'의 형태로 표현해야 한다.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를 은유법으로 바꾸면, '하늘은 푸른 호수’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대화할 때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오해를 사기도 한다. 글도 마찬가지라서 아무리 길게 써도 읽는 이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양길순 시인은 현실의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대상에게 다가서고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대가 켜질 무렵 포구의 풍경을 그린 다음 작품이 그러한 예다.
닳고 닳은 몽돌
은빛 출렁이는
그 사연
그는
알까
해거름에 와
그리운 추억 토하듯
왝, 왝,
자맥질하는 물꽃
짐꾼 떠난 선창
빗장 채우면
간절한 상심 두고 올 미련에
불 켜는
등대가 있음을
그가
알까. - <갈남포구 ․ 2> 전문
시는 길게 할 말도 최대한 짧게 줄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그야말로 산뜻하고 감칠맛이 나야 시다. ‘나는 슬프다’고 원고지에 100장을 썼다고 해서 ‘슬픔’의 장편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작품의 이야기꾼인 화자話者를 통해서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대로 틀에 맞춰 재구성해야 한다. 즉 비유, 은유 등의 수사법을 활용하여 또렷한 이미지〔image(심상心想)〕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는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써지지 않는다.
작은 새 한 마리
희망을 굴리지만
주
룩
주
룩 - <여름비> 부분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속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는 순수한 ‘자기 찾기’이며 ‘아름다운 삶’ 그 결정체이다. ‘아름다움’이란 외면적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적 아름다움 즉,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되고 가치 있는 생각을 말한다. 작가는 일사일언一事一言으로 시의 소재를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고심한다. 가히 종교와도 같은 괘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은 음절로 내리는 여름비
창유리에 하얀 물방울 매달린 오후
귀에 익은 팝송 흐르는 공간
찻잔 사이로 마주한 당신
돌풍처럼
불사조처럼
어느 날은
보석 같은 친구로 다가오던 당신
지금 창밖만 바라보고
바다만큼의 내 오만 앞에 당신은
한발 한발 추억 묻으며
뒷걸음질치고 있었어
이별의 예감
커피의 온기 사라지기 전에
고백하려 했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려고 했는데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창유리에 흩뿌리는
물방울만 세고 또 세었어. - <고백> 전문
<고백>도 여름비가 오는 날에 글쓰기의 어려움을 간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사는 삶에서 지극히 긍정적인 시선과 특유의 섬세함으로 삶의 시련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밤길>도 그러한 작품이다.
어둠이 동행하자며
온밤 풀어헤친다
그림자마저 거두어 간
아! 여기쯤
끝 간데없는 길
온밤 지새우며
눈감아도 넘어지지 않는 건
세월의 시련 때문일 거야. - <밤길> 전문
이러한 시적 감성은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말을 잘 활용하면 시인이 되고, 잘 쓰지 못하면 사이비가 되기도 한다.
뒤돌아보면
당신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에
또박또박
걷겠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 <사랑 ․ 1> 중에서
차마
고백할 수 없어
서글펐던
마음자리
그리운 이여!
이제는
사랑한다
말하겠어요. - <사랑 ․ 2> 중에서
지금까지 제1, 2부의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지만, 작품마다 결코 사소하거나 하찮은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작은 것들을 자신의 내면세계로 데리고 와 자신의 삶에 활력을 넣어주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성당의 고백소에서 이런 하소연도 한다.
내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내 논리와 틀린다고
그들을 미워했다
고백소에서
신부님께 고백하기를
“저는 잘못 없어요, 모두 그들 때문입니다.“
똑같은 고백 또 되풀이하곤 했다
용서받기 위한 고백인데
이기심을 합리화시키려 했다
우울해지는 마음과
자꾸 작아지는 내 모습
달라져야 함은 나 자신인데
그들을 바꾸려 했던
내가 봐도 나는 틀렸어. -<고백소에서> 전문
제3부 <가을>은 사계절 중 가장 시 쓰기에 좋은 계절이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가을에는 모든 오곡백과가 결실을 보는 계절이기에 마음조차 풍족하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자연을 즐기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시인이 되고, 멋진 풍경을 화폭에 담는 화가가 되기도 한다. 정말 산과 들을 거닐면서 가수라도 된 듯 흥얼흥얼 노래하며 살고 싶은 충동이 불끈 솟는 계절이다. 이 낭만의 계절 가을 속에서 호연지기를 꿈꾸어 본다.
물 긷습니다
차오르는 초가을 밀물입니다
헛구역질하며 꼼지락거리는
어제와 그제도 퍼 올립니다
메모리 된 기억들 자루째 쏟아 붓습니다
소갈머리 없이 가을볕이 마냥 좋습니다.
- <가을 바라기> 전문
시인이 자신의 생활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으면서 시 쓸 대상에 다가서면 그 안정성이 더욱 큰 울림으로 커지면서 독자를 향해 한발 더 바짝 다가선다. 시는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체험이 밑바탕이 되어야 함은 필자 혼자만의 아집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시인다운 예리한 관찰력과 타고난 상상력이 보태진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가을날
풀잎으로부터 오는가
마른 잎 사각거림은
체념으로 비워지는 술잔 같아
- <사랑은 가을날 마른 풀잎에서 오네> 부분
살랑살랑
갈바람 수신호에
자줏빛 이름 모를 꽃
톡,
떨어지겠다
담벼락에
나지막이 엎드린
잎사귀
그 푸른 서러움
붉게 물들었구나. - <예감 ․ 1> 전문
세상 만물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인간사도 또한 그렇다. 시에서는 같은 사물 혹은 사건일지라도 보는 사람이나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하여 시가 된다. 그래서 시 창작을 할 때나 읽을 때는 사물에 대한 선입견부터 우선 버려야 한다.
애당초
반죽부터 잘 개야 해
양념이 너무 많으면
감칠맛 덜하고
금세 싫증 나는 법이지
적절하게 배합하는 게 최고야
- <시인이 되려면> 부분
때로는
휘청거리고 싶지만
느리게 더욱 느리게
분명한 것은
내부로부터 날 바라보는
곤혹스런 그 시선
그것 때문이다. - <변명> 전문
시는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보내기 위해 준비하는 정중한 메시지다. 그러므로 절제되지 못한 감정 즉 자기 혼자만 흥분해서는 정말 안 된다. 시는 그 시인의 속에 품은 마음조차 훤히 보이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지면상 언급하지 못한 시들 중에서 뽑은 시구를 맛보기로 훑어보고 <겨울> 속으로 들어가 마무리하겠다.
<가을>
- 새우잠 청하며 젖은 몸 뒤척일 때
- 어느새 벽면에 입맞춤하는 으스스한 한기
- 억새 흔드는 바람 늪은 물거품 토해내며
- 지상에 눈꽃 날리고 숲마저 동면에 들면
- 명치끝까지 차오르다 멈춘 독백은
- 그리움 찍으며 잰걸음으로 돌아오는
- 아, 가을은 그저 바라만 보는 그리움이네.
<겨울>
- 누군가 문 두드려 안부 물어주길 바라던
- 문풍지 떠는 동지섣달
- 마른 장작처럼 채워도 허허로운 절박한 언어
- 온밤 지새우며 낮은 음절로 노래하지만
- 저편에서 눅눅하게 살아있는
- 몇 점 섬들은 마음의 언저리에 자라나는 보고 싶음처럼
- 종일토록 그대로 멈춰 있어야 했어
- 하지만 소복소복 함박눈 쌓여도 차마 고백할 수 없어
- 애써 버리지 못한 연민 감내하기 힘에 겨워
- 생은 무한정 돌고 돌아간 길모퉁이로
- 언제나 같은 곳 바라보며
- 흐린 밤 달무리 속으로
- 맑은 그리움 눈송이처럼 폴폴 날리네.
우리가 새로운 현상이나 보지 못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할 때 일반상식적인 언어로는 쉽지 않다. 그때 예술의 한 장르인 문학으로 표현한다면 불가능도 가능해진다. 그중에서도 시의 말로 표현하면 상상력을 증폭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시어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암호나 신세대끼리만 통하는 신조어를 제멋대로 남발한다면 글도, 말도, 시도 아닌 해괴한 짓거리일 뿐이다.
벌써 겨울까지 왔다, 하늘 끝 멀리
내가 버렸던 영혼
하얀 깃발 흔들며
돌아오는데
그때 그 사랑
누굴 향한 것이었나.
- <깃발처럼 첫눈 내리고> 부분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시어는 줄일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줄여야 한다. 물론 시어라고 특수한 전문용어는 아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매일 쓰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다 아는 그 평범한 단어들을 가지고 시인이 어떻게 갈고 다듬어 제 위치에 놓느냐에 따라 제구실을 하는 신비로운 시어로 되살아난다.
우선 제4부의 <겨울>에 있는 짧아도 빛나는 시 3편을 감상하자.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완벽한 구도에 음악적 운율과 회화적 심상을 되살린 수작들이다.
밤새
길 위로
흰 눈이 살짝 내린 줄 알았습니다. -<달빛> 전문
마디마디
차오르는 슬픈 얼굴
속내 보일까
겹 울타리치고
안으로만
아파하는
통증 -<미련한 사랑 ․ 1> 전문
환장하겠어
봉우리 터뜨릴 수 없어
꽃잎 접어
안으로
벙그는
열꽃 - <미련한 사랑 ․ 2> 전문
양길순 시인은 차분한 성격에 질서와 규범을 잘 지키는 현모양처이다. 충청도 부여의 양반댁에서 이곳 오산으로 시집온 그야말로 평범한 주부시인이다. 문학 모임 때에도 귀가시간이 늦을라치면 어느 틈에 슬그머니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행동이나 불순한 생각은 아예 찾을 수 없다. 그런 성격 탓인지 작품까지 어찌나 다듬고 매만졌는지 뼈대만 앙상하게 남겨두었다. 소재도 대부분 생활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래서 추상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가끔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작품들이 끼어 있어 시를 읽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 ‘오호!’ 하며 감탄사를 터트리곤 한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울지 마시라!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조명도 꺼지지 않았는데
무대 뒤에서
한 여인이 울고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움직임은 아직 멈추지 않았는데
세월 앞에서
그 여인도 울고
아무도 없는
성모상 앞에서
내가 웃고
울고 있다. - <여인이 울고 있다> 전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양길순 시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시적 매력은 생활 속에서의 경험이나 사소한 사물들까지도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자신의 생각으로 동화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그때 동원되고 있는 언어들도 평범한 일상어이지만 시의 행간 속에서 편하게 자리 잡고 있어 친밀감이 있다. 이번 시집에는 시작활동을 하면서 부딪친 창작의 어려움과 고통을 미래의 희망찬 메시지로 바꾸어 전달하고 있다. 평범한 소재를 그것도 일상어로 쉽게 썼지만,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삶의 곡진한 무게를 녹이고 있어 신선하게 읽힌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이렇게라도 첫 시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양길순 시인도 자신의 모습을 한 번쯤 객관적으로 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 여기에 실린 작품은 모두 독자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양길순 시인도 20여 년 이상을 늘 마음 구석에 쌓아두기만 했다가 모두 내놓았으니 한편으로는 홀가분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더욱 새로운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해야 할 시점이다. 늘 건필하시라.
첫댓글 시사 평론만 예리한게 아니다. 시평론도 이처럼 예리할수 있다. 그러나 예리한 칼로 환부를 도려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원규는 이 쓰라린 상처 부위에 잊지않고 치유의 약을 발라준다. 그래서 이원규는 시 의사와 같다. 멋지다.
선배님~~~~~~~~땡큐!!!!!!!!!!
최근 한 시인의 시집에 평설을 읽어보았습니다. 참, 읽어보고 글을 평가해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읽지 조차않고 엉뚱한 글을 쓴 자칭 평론가가 있습니다. 한심합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평론가들이 작품을 읽지 않고 글을 쓰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원규는 다릅니다. 골백번 또 읽고 또 읽고 ...그만 읽으라고 소리처야 슬그머니 밥상 밑에 책을 내려놓고 식사를 합니다.. 울화가 터집니다. 그만 읽으라고 하셔도 또 한 술뜨고 또 보고...그날 전 같이 밥은 먹었는데 반주로 술을 먹고 나만 취했습니다. 원큐리 언젠가는 복수할끼다.
흐 흐 흐 흐
고대영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자주 들리셔요^^
양시인님의 <꽃의 연대기>도서관에서 찾아 열심히 탐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