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모임이다. 교회는 믿는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예수를 믿는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믿는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그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자신을 그 머리에 따른몸으로 하여 살아가는 자들의 모임으로 오직 머리만을 위하여 몸바치는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우리가 과연 그의 몸이라면 머리가 시키는 일만을 해야한다. 그러면 머리는 어떤일을 시키시는가? 예수께서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늘 말씀하셨고 예수께서는 그의 보여주셨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그 머리의 기능을 보여주는 많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곳곳에서 그의 기능을 보여주셨는데 오늘은 삼손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 우리는 삼손을 잘 안다. 삼손은 사사중에서도 유명하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인물중에 가장많은 장을 차지하고 있다. 13-16장까지 4장을 사사기는 할예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 날때부터 죽을때까지의 모든 생애를 기록한 사사는 사사기에서 삼손밖에 없다. 사사기는 그를 상당한 비중을 두고 스케치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삼손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라고 하면 잘 내리지 못한다. 사사는 사사인데 별로 꺼름직한 사사이다. 힘이 세다는 것외에 별로다. 그의 끝이 비참했기에 그를 신앙의 인물로 소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그의 사적을 이렇게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고 또한 구약성경 어디에 보아도 삼손이 잘못되었다고 내모는 곳되 없다. 도리어 히브리서 11장에서 신앙의 선배들중 믿음의 사람을 이야기 할때 여기 삼손이 등장한다. 성경은 삼손을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지않고 결국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삼손의 사건을 이렇게 자세히 기록한 성경저자와 그가 가졌던 믿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삼손에 대한 기록은 사사기 13장부터 나오는데 삼손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전에 기자는 먼저 이스라엘의 현재형편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의적으로 불레셋사람의 손에 붙이셨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택한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면 이스라엘 취급을 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미 40년동안 불레셋의 다스림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지파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이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게 할것이며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게 할것이며 머리를 깍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손이 자라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인생이 될것(13:5)이다. 그녀는 그의 남편 마노아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는 믿지 않았고 여호와의 사자를 직접 만나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한번 더 나타났고 그때 그의 아내는 남편 마노아를 불러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게 했다. 그래서 삼손이 태어난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의도적으로 블레셋의 손에 붙이셨고 한 구원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하는데 그 구원의 임무를 띠고 태어난 자가 바로 삼손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할까 그의 생애를 보면 알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노아는 그의 아들을 낳자 나실인으로 키웠을 것이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했고 또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게 했을 것이다. 삼손은 아버지께 물었을 것이다. 나는 왜 머리를 안깍아 주느냐고 아버지는 말했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구별된 나실인인데 하나님께서 널 지목하여 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했다고... 어릴적부터 그 말을 들었을 것이고 삼손은 자신의 그 사명을 늘 염두에 두고 커갔을 것이다.
이제 삼손이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는데 어느날 삼손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장가를 보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찍어놓은 처녀가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삼손은 블레셋동네 딤나에 블레셋처녀를 찍어놓았다고 했던것이다. 아버지 마노아는 놀랐고 하필이면 우리민족 처녀들도 많은데 왜 블레셋처녀냐고 반대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삼손은 그녀가 좋으니 어쩔수가 없다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웠고 삼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의 고집에 져서 그 처녀를 보기위해서 딤나의 동네로 내려갔다. 사실 삼손이 딤나의 블레셋처녀를 고집했던것은 사실 그녀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녀를 빌미로 블레셋을 치려함이었다고 14:4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딤나의 동네로 내려 가던중 포도원을 지나다가 삼손은 어린 사자를 만나게 된다. 그때 삼손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하게 임하여 삼손은 어린염소를 찢듯이 사자를 찢어 죽여 버렸다. 그의 부모와 딤나의 블레셋 처녀를 만나고 돌아가던 중 삼손은 사자안에 벌이 꿀을 친것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얼마후 블레셋에 내려와서 결혼잔치를 벌이는데 축하객들로 가득할 쯤 신랑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하여 내기를 건다. 베옷 삼십벌 겉옷 삼십벌 내기로 걸자 블레셋사람들은 그러자고 했고 삼손은 문제를 낸다. 수수께끼란 지혜의 싸움인것이다. 삼손이 낸 문제는 이렇다. 삿14: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강한것과 단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였다. 직접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런 문제를 누가 맞추겠는가? 삼일이 지나도 아무도 풀지 못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내기에서 질것같았다. 그들은 문제를 푸는 방법을 달리했다. 그들은 신부를 불렀다. 그들은 신부를 더욱 협박하여 삼손에게 답을 가져올것을 강요했고 신부는 삼손을 조르고 졸랐다. 칠일째 되는날 삼손은 못 이기는 척하며 답을 가르쳐 주었으며 신부는 그 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로 그 문제를 푼냥 답을 말했으며 삼손은 너희가 내 신부를 통하여 답을 알았다는 것을 안다고 화를 내며 블레셋의 다른동네 아스글론이라는 동네로 가서 삼십명의 사람을 쳐죽이고 옷을 뺏어다가 삼손은 그 옷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온다.
신랑이 집으로 돌아가자 파혼이 된줄 알고 신부의 아버지는 신부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린다.
이제 15장으로 들어서니 얼마후 밀추수때가 되자 삼손은 기다렸다는듯이 다시 자신의 장인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신부를 내어놓으라고 한다. 그러나 신부는 이미 다른사람의 아내가 되었다고 장인은 말한다. 삼손은 너무나 화가 난척하며 이 원수를 갚겠다고 하며 여우 삼백마리를 생포하여 그만 그 꼬리끼리 묶어서 그 꼬리에 불을 붙여서 블레셋의 들판으로 쫒아 버린다. 여우가 미친듯이 들판을 쫒아다니자 사람들은 구경만 할뿐 완전히 당한다. 그리고 그 들판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삼손은 자신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였다. 이 모든것은 삼손이 미리 블레셋여인에게 장가들려할때부터 계획된 놀음이었다. 그는 정당한 시비거리를 찾은 것이다. 그의 머리는 이렇게 뛰어 났다. 그리고 그의 힘또한 대단했다. 여우 삼백마리를 생포할 자가 누가있는가 누가 산 여우의 꼬리를 묶겠는가 삼손의 힘은 대단했다. 삼손은 아마도 그의 이런 지혜가 아니 그에게 있는 힘으로 하나님께서 블레셋에서 자기의 민족을 구원하라고 준줄로 알았다. 그는 그의 힘과 지혜를 다하여 지금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 에담 골짜기의 바위틈에 숨어 있었다. 블레셋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안있어 블레셋은 군대를 동원하여 삼손을 잡으러 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놀라서 삼손에게 왜 이런짓을 했느냐 우리가 그 화를 당하겠다고 하면서 삼손을 나무랐다. 삼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묶여서 블레셋사람들에게 내어주었으나 삼손은 자신을 묶은 줄을 썩은새끼 풀듯이 풀었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었던 나귀의 턱뼈를 집어서 삼손을 향하여 달려오는 일천명을 죽였다. 그 죽인것을 성경은 표현하기를 두더미가 되게 쌓였다고 한다. 나귀턱뼈 하나를 들고 두무너기 즉 오백명씩 두무더기를 만들었는데 탁구 칠때 탁구채로 빽과 스매싱을 하듯이 그렇게 한방에 다 죽여서 두무더기가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힘인가? 삼손은 이렇게 블레셋사람을 죽이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삿15:18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니" 삼손은 이것을 구원이라 생각했고 삼손은 이렇게 한 자신이 구원자로서의 올바른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삼손은 이런 생각가운데 이십년동안 사사로 지냈다. 삼손이 이십년동안 다스리면서 그는 하나님은 더큰힘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 구원하는 방법인줄로 알았다.
16장에 넘어가서 보면 삼손은 이상하게도 꼭 이스라엘의 처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꼭 블레셋의 동네로 가서 거기서 기생을 취하여 놀았다. 블레셋여인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나는 이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마치 몽고제국에서 고려를 침입하여 많은 여인을 끌고가서 자신의 첩이나 노예로 삼았듯이 삼손이 일부러 가사라는 블레셋사람의 땅으로 가서 거기 여인만 취했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그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죽이려고 온갖 꾀와 힘을 모았고 삼손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성문을 부수고 빠져나왔다.
힘과 힘의 대결, 머리와 머리의 대결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자신의 힘과 지혜를 믿었던 삼손은 블레셋의 끈질긴 꾀에 속아 결국은 머리를 깍이고 힘을 잃고 눈을 뽑히고 만다. 역시 힘과 지혜라면 블레셋이 앞서는 것이다.
세상나라의 특징은 머리고 힘이다. 그것이 블레셋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사사기 전반에서 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왕이 없어서 잘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지배를 받게 되는 이유를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고 늘 그 힘과 지혜없음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을 통하여 힘과 지혜를 주시고 그 힘으로 해결하는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다. 눈을 뽑히고 머리가 깍인 삼손은 고뇌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신다고 했는데 거짓말인가? 아니 이 방법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하나님은 날 통하여 구원하실까?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그를 나실인으로 불렀다. 나실인은 어떤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것인데 나실인은 그 사명을 다하는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깍아서 제단의 불로 태워서 드리는 것으로 나실인의 사명을 마친다. 나실인 평소에도 그 서약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구별해야 하며 최후까지 자신의 모든것을 드린다. 이것으로 나실인은 그 사명을 다한다.
삼손은 그가 눈이 뽑히고 힘을 잃고 그 사명을 성취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삿16: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삼손은 그가 죽어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는줄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자신의 힘과 지혜가 커져야 이스라엘을 구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과 지혜를 버리고 오로지 자신은 죽고 하나님만 바랄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성경은 이 부분을 너무나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되는가? 힘으로가 아니다. 지혜나 세상적인 방법도 아니다. 오로지 우리의 힘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뢰할때 비로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사사기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힘이 없음으로 신앙생활못한다했고 지혜가 없고 세상적인 조건이 다른 나라 다른 사람만 못하여서 실패한다고 생각했지만 힘과 지혜는 세상의 방법이고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죽이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고린도서에서 사도바울은 주니을 표현하기를 지혜를 원하는 헬라인의 방법도 기적을 원하는 유대인의 방법도 아닌 아주 어리석고도 이해되지 않은 하나님의 방법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방법으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했다. 사도바울은 내가 예수와 예수의 십자가만 자랑할 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신다.
오늘날 나실인은 교회요, 성도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성도를 통하여 불레셋과 같은 세상에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방법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 한사람의 힘과 지혜로 청년회가 되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조건을 의뢰하면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교회가 이끌어져 간다면 교회는 능력있는자들의 무대가 되고 말것이다. 바로 그런곳이 세상인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중요성은 너무나 크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한다. 제사장이 무엇하는 사람인가? 제사장은 제사를 지낼때 그것을 집례하는 자며 이스라엘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자이다. 그러나 제사장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때는 아무리 백성들이 좋은 예물을 바쳐도 제사장으로 인하여 그 제사가 열납되지 않는다. 제사장 한명이 잘못하면 모든 백성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고 제사장 한사람 하기에 따라서 백성의 죄는 사해진다. 그래서 성소에 제사장이 들어갈때도 방울을 달고 들어가며 끈을 묶고 들어가는 것이다. 제사장이 죽으면 그 제사는 헛것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가지고 들어가는 유일한 사람이다. 제사자의 역할을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제사장 나라라 하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한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속에서 하나님만 신뢰하고 살아가면 이방의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예하며 하나님이 백성이 되어 그 은혜를 누릴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도 세상을 구원 할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이다. 그런데 이 제사장나라가 세상나라와 같이 하나님이 아니라 힘을 구하고 높아지려고하고 잘될려고만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수 가 없다.
오늘날 성도는 제사장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제사장이다.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힘의 논리로 세상의 논리로 간다면 어디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없다. 교회만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자인것이다. 이 교회는 오직 예수의 말만 들어야 할것이다.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빛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빛이라는 말앞에서 자신이 없을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 세상의 빛이란 말은 세상을 염두에 두었을 때 빛이란 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빛이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늘 교회안에 있기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안에 머물러 있기에 빛끼리만 모여 있기에 빛속에 있으니 우리가 무슨 빛축에도 못든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성경은 등경위에 두지않고 말(되박)속에 있다고 한다. 자리를 잘못잡았다는 말이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세상에 있어야 한다. 어둠속에서는 반딧불도 밝게 빛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끼리 모여서 있기에 스스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 교회안에서만 찬양하고 기도하고 훈련하고 오로지 교회의 부흥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쇼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하신다. 세상의 빛으로 우리를 부르신것이다. 교회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세상에서 죽을자는 없고 모두가 교회에서 살려고만하고 있으며 교회가 커져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자신을 태우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이 녹지 않으면 빛과 소금이 될수 없다고 하고 있다. 빛은 어둠속에 소금은 썩어가는 세상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리를 잘못 잡고 있는것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세상속에서 밝혀지며 희새의 방법 죽어짐만이 하나님의 요구이다.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가? 그것으로 자신이 살고 자신이 힘을 키울려고 하는가? 우리는 주님이 주신 힘만 필요할 뿐이며 또한 그 힘으로 세상에서 다른 이를 위하여 죽음만이 주님의 뜻을 이룰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
주께서는 교회를 신부라고 하신다. 신부란 신랑을 염두에 둔 말인데 신부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신랑을 위한 순결의 유지이다. 신랑을 위하여 순결하지 않은 신부는 그 자체가 수치이다. 주님은 우리가 신부로서 늘 순결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늘 자정작용을 해야한다. 교회가 아닌것은 잘라야 하며 신랑을 바라보지 않는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많은 이물질들을 받아들여 온갖 세상의 잡동사니들이 되어가고 있다. 예수만이 아니라 다른 오물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들을 몰아내어야만 바른 교회가 될수 있다. 다른 몸이 자기 몸에 붙으면 그만치 폐만 끼치고 피차 도움이 될수 없다. 말씀으로 날마다 확인하여 구별해야 할것이다.
교회는 몸이다. 몸은 커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몸은 그 머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나감이 그 정상인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커나갈려고 하고 있다.
1990년 이후로 한국교회가 정체되고 있다고 한다. 부흥이 멈췄다고 한다. 어떤사람은 교육의 부재를 말하며 성경공부면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살기가 너무 좋아졌다고 한다. 일리는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걱정해야 할 바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해야할 택한 백성을 한사람도 놓치지 않으셨음이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 북한의 택한자도 하나님은 놓치지 않으신다. 그분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한국교회의 수가 늘지않는것이 청년회의 수가 늘지 않음으로 그것을 목표로 더욱 닥달하고 있는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믿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다. 몸으로서 얼마나 머리의 명령에 순종하며 머리만을 자랑하고 있는가 이것을 늘 생각해야 할것이다.
결문)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가? 또한 한 교회된 청년회는 어떠한가? 서로 살려하지 않는가?
커질려고 하지 않는가?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가? 예수를 알기를 원하며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자가 여기 있는가? 여러분은 과연 예수라는 머리에 붙은 몸으로서의 교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