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보는 신라의 흥망성쇠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역사관 네 개의 전시관을 돌아보고 나면 신라의 흥망성쇠가 한 줄에 꿰어진다. 경주박물관의 전시실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물로만 존재하는 것을 뛰어넘어 오늘까지 살아 숨 쉬는 지나간 시간을 부활시키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힘 때문에 경주박물관에서 역사기행을 제대로 시작하라는 권유를 편하게 할 수 있다.
신라 역사관은 경주에서 신라의 흔적을 더듬어보기 위한 사전 전초작업장이라 할 수도 있다. 신라의 흥망성쇠를 웅변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자리다. 작은 단초를 시작으로 그들이 발굴된 현장으로 찾아가는 답사의 발걸음은 살아 꿈틀거리는 신라의 향기를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박물관에 고요하게 지나간 시간을 보듬고 앉아 있는 유물들이 옮겨져 오기 전의 역사의 현장들이 경주 곳곳에 상처를 안고 남아 있다. 역사기행의 단초를 제공하는 박물관의 유물들과 현장을 더듬어 사라진 역사의 퍼즐을 맞춰본다.

남산신성비
❚신의 후예
신을 동경하는 인간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다.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나타나는 신들의 잔치는 인간의 무대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또 고조선의 단군신화를 비롯한 삼국시대 왕들의 신화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신라를 건국한 최초의 왕 박혁거세는 알에서 부화한 신인의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대목도 신격화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6부 촌의 촌장들도 신인들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인간들은 모두 신인들의 후예인 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기록된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신화와 전설들이 오늘날 경주의 곳곳에 흔적을 남겨두고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우물 나정. 경주시 탑동 남산의 뿌리에 신궁 터로 짐작되는 팔각건물과 우물, 담장, 부속건물, 배수로 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경주시는 사적지로 지정해두고 2020년까지 복원정비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중국 서안시 건륭의 장희태자 이현의 묘에 그려진 예빈도를 복제한 그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신인들로 기록되고 있는 6부 촌장들이 우물 근처에서 이상한 기운이 맴돌아 가보니 백마가 무릎 꿇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가고 붉은색의 큰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세상을 밝게 할 것이라 여겨 혁거세라 이름 짓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고 성을 박(朴)이라고 했단다.
또 오릉에 대한 역사서를 보면 남산의 서남쪽으로 5기의 능이 모여 있어 오릉으로 불리는데 제1대 박혁거세, 제2대 남해, 제3대 유리, 제5대 파사왕 등 4왕과 박혁거세의 부인 무덤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제1대 박혁거세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에 승천했다가 7일 만에 유체가 5체로 나누어져 땅에 떨어져 이를 모아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하므로 5체를 각각 장사지내 오릉이 됐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시대나 지금이나 서로 경쟁하고 싸움하는 모습은 똑같다. 신의 후예라는 신화와 전설을 머리에 이고 이전투구하는 걸 보면 신들의 세계 또한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박물관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고증하는 유물들 앞에서 되새김질하게 된다.
❚신라를 일으킨 불교
신라시대 초기에는 민간신앙이 판을 치면서 백성의 생각은 따로따로였다. 정치를 하기가 오히려 지금보다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도 사람들의 생각과 개성이 천양지차로 다르지만 다양하게 발전한 대중매체를 통해 여론몰이가 쉽게 되면서 정치 방향의 키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래전 신라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들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하나로 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답이 없다. 결국 종교를 통해 의식적 합일점을 찾고 교육의 방편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신라시대에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부터 성행하게 됐다. 법흥왕이 아끼는 신하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 나타난 이변을 증표 삼아 신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불교를 공인해 국론을 통일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불교는 절대적인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각자 다른 신을 믿는 6부 촌장들을 위시한 귀족들을 불교를 믿게 하면서 왕은 곧 부처라는 공식으로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됐다.
경주박물관 신라 역사관 중앙부위에 높이 106㎝ 크기의 이차돈 순교비가 있다. 순교비는 육각기둥으로 한 면에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는 모습의 조각이 됐고 나머지 면에는 그의 사적이 기록돼 있다. 글씨는 마모가 심해 자세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신라 역사문화의 뿌리는 대부분이 불교로 귀결된다. 왕궁과 절터, 거대한 무덤 고분까지 불교의 교리와 흔적들로 가득하다. 경주 관광의 최고 백미로 손꼽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남산의 유적은 온통 불교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신라의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걸작들 또한 모두 불상과 석탑, 불화 등으로 불교 유적들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신라를 일으키고 융성하게 한 밑바탕에는 불교가 있다.
신라 삼국통일에서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까지 불교의 힘을 빌렸던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신라 역사기행의 길은 불교순례의 길로 착각하게 하기도 한다.
❚신라 통일의 주역 화랑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삼국 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했던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그렇지만,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돼 천 년의 화려한 통일시대를 이끌었다. 대부분 신라 삼국통일의 근원은 불교를 통한 국론 결집, 화랑들의 문학과 무술연마에 의한 국력신장을 가장 앞자리에 기록한다. 삼국유사는 활약이 두드러진 화랑들에 대해 많은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화랑세기는 화랑들의 우두머리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소개하고 있다. 가야국 정벌에 공을 세우고 친구 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해 울다 7일만에 죽었다는 사다함, 선덕여왕의 사랑 용춘공, 통일의 주역 유신공과 춘추공 등등 화랑 우두머리들의 태어남과 사랑, 전쟁, 죽음까지 기록돼 전한다.

진흥왕순수비 탁본
신라가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것은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에서의 계백 장군과 맞섰던 관창을 비롯한 죽음을 불사하며 나라를 위한 충성으로 칼을 들었던 어린 화랑들의 용기였다는 평은 지금도 유효하게 교과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물론 어린 화랑들을 앞장세워 전장을 지휘했던 장수들 또한 노련미를 더한 화랑 출신들이다. 김유신과 김춘추 등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대표적인 화랑출신 장군이다.
신라 역사관에는 화랑의 교육지침이 되었던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법사, 열심히 공부할 것과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두 명의 결의가 새겨진 ‘임신서기석’ 등이 화랑의 활약상과 당시 청소년들의 교육목표를 엿보게 한다. 임신서기석은 해석에 따라 맹세를 새긴 연도가 다르지만, 화랑들의 다짐이라는 해석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여름방학 기간을 맞아 박물관을 찾는 발걸음이 부쩍 늘어났다. 연필과 종이를 들고 부지런히 적어가면서 지나간 시간이 말하는 교훈들을 학습하는 모습들은 역사기행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화랑들의 지표가 됐던 세속오계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으로써 임금을 섬기라는 충,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라는 효,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라는 신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도록 하라는 용맹, 살생유택(殺生有擇) 생명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자비의 가르침으로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연회
신라는 56대 경순왕 대에 국가로의 패망이 기록되고 있지만 실상 패망은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목숨을 내주면서 이미 결정됐던 것으로 대부분 분석하고 있다. 경애왕과 경순왕은 대부분 고려와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신라 후반기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라 55대 경애왕은 924년 왕위를 물려받아 고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해군을 길러 고려의 왕건과 바다에서 여러 번 부딪쳤다.
포석정에서 왕비와 함께 있던 경애왕은 견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군사들도 포로가 됐다. 결국 경애왕과 왕비는 포석정에서 비운을 맞은 것이다. 927년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3년 만의 일이다.
견훤은 공격하며 왕비를 비롯 후궁들을 욕보이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만행을 피해 춤과 노래 솜씨가 뛰어났던 후궁 ‘죽라’는 견훤의 손길을 피해 달아나다 물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죽라소, 죽라보, 죽라평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서남 산의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국호를 내린 임금은 제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995년 신라 천 년의 사직을 “죄 없는 백성들의 참혹
한 죽음을 볼 수 없다”며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며 신라 백성의 안녕을 당부했다.
그러나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며 항전을 주장하던 경순왕의 아들 태자는 항복에 동의하지 않고 궁궐을 벗어나 마의를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평생 ‘범공’이라는 법호를 받아 스님으로 생을 마감했다.
신라 역사관을 돌아 나오는 마지막 관문에 신라 천년의 막을 내린 경순왕의 왕 답지 않은 풍모로 앉아 있는 모습의 그림이 붉게 채색돼 있다.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역사기행의 일단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