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 답사 후기 - 최유선
8월 한여름의 의릉 답사는 매우 기대가 되었다. 의릉은 돌곶이역에 위치하는데 ‘돌곶이’는 한자로는 ‘석관(石串)’이다. 지형이 곶이로 되었다는 것과 마을 동쪽에 위치한 천장산의 한 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지하철 돌곶이역에 내려 의릉 방면으로 15분 정도를 걸어갔다. 큰길 안쪽으로는 크고 작은 빌라들이 모여 오밀조밀 모여있고, 중간중간 음식점과 가게들이 위치한 동네길을 걸어 의릉에 닿았다.
해설사님과 오늘 답사할 멤버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왕릉전문 해설사님을 모시고 의릉을 돌아보았다. 해설사님 말씀이 여기만 오면 마음이 짠하다고 하셨다. 의릉은 천장산에 영역에 조성되었는데 천장산(天藏山)의 장은 감추다라는 뜻으로 하늘이 감춰둔 산이라는 의미라고 설명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천자문을 배울 때 ‘가을추(秋) 거둘수(收) 겨울동(冬) 감출장(藏)’ 구절을 익히면서 유독 ‘감출장’은 한자가 어려웠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선의왕후가 잠들어 계신 의릉(懿陵)은 조선왕릉 중 이름이 가장 아름답다. ‘아름다울 의(懿)’를 능호로 가졌기 때문인데, 이곳에 잠든 ‘경종’의 삶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100일도 되지 않아 원자로 책봉되었다. 서인 세력은 인현왕후가 젊다는 이유를 들어 원자책봉은 시기상조라 하였으나 숙종은 서인을 실각시키고 인현왕후를 폐위시켰다. 이로써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었는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희빈 장씨는 빈으로 강등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 속에 노론은 물론이고 아버지 숙종도 연잉군을 총애하며 정유독대까지 하던 시절이었으니, 불안한 세자시절을 보내며 경종의 속은 아마도 까맣게 탔을 것 같다.
왕이 된 경종은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립 속에 동생인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노론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여기에는 또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감을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경종은 돌아가신 이후에도 편치 못한 기구한 운명이 되고 만다. 이곳에 능이 조성되었으나 1962년 중앙정보부가 능역에 자리하면서 훼손이 되었고 왕릉으로써의 위엄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정보구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에는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캠퍼스가 준공되었고, 능역 복원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본래의 의릉 능역은 석관동캠퍼스와 주택가가까지 포함하는 크기라고 해설사님은 설명하셨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편치 않았던 경종의 삶을 들으며 홍살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넜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은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으로 나뉜다. 왕릉이 시작되는 진입공간을 지나면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공간인 제향공간이 자리한다. 능침공간은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과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해설사님 말씀으로는 중앙정보부 시절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양지못’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금천교는 당시 파괴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위쪽으로는 축구장까지 있었고 일본식 정원 조성에 심지어 뱃놀이도 했다고 한다. 훼손된 능역이 제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나 건너편에 있어야 할 수라간과 수복방은 아직 미복원 상태다. 홍살문을 통과하자 오른쪽에 편편한 판위가 보였다. 왕은 여기서 4번을 절 하고 어도를 따라 정자각 방향으로 걷게 된다.
정자각에 이르는 길은 울퉁불퉁한 박석이 깔린 2개의 길이 놓여있는데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게 만들어져 있다. 높은 왼쪽길은 능묘에 계신 혼령이 다니는 신도, 오른쪽에 낮게 만들어진 길이 어도이다. 향로와 어로, 즉 ‘향어로’로 표현하기도 한다. 울퉁불퉁한 길이니 조심스럽게 고개 숙여 아래를 살펴야 했으니 선왕의 묘에 참배 온 왕의 마음가짐이 엿보였다. 우리는 향어로를 피해 옆쪽으로 비껴서 정자각으로 걸었다.
정자각을 오를 때도 예법이 있어 아무렇게나 오르내리는 게 아니었다. 계단에는 오른발이 먼저 오르고 왼발이 따라가 멈추었다가 다시 오른발이 올라가고 왼발이 따라붙는 식이다. 해설을 듣던 참가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한 걸음씩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정자각 월대에 올라 과거 의릉이 조성되고 능참봉이 관리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능참봉 아래에 수복(능지기)만 70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넓은 산림과 능역을 관리하려면 그 정도 인원은 되어야하지 않을까 수긍이 갔다.
경종과 함께 부장된 선의왕후 어씨는 경종의 봉분 아래쪽으로 배치되었다.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위쪽 경종의 능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다. 조선 왕릉 중 동원상하릉은 효종의 영릉과 이곳 의릉 두 곳뿐이라고 한다. 상하릉 형식으로 조성한 것은 능혈의 폭이 좁기 때문에 생기가 정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해설사님이 설명하셨다. 우리 선조들은 땅의 생긴 모습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곡장을 두른 것도 바람을 막기 위함이고, 땅의 기운도 물을 건너지 못하게 왕릉 내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음택의 발복이 후손에게 전해지도록 한 것이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기 위한 지혜가 아니었나 싶다.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며 절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능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능이 프레임에 담기지 않는 모양새다. 정자각에서 내려가 능침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가까이서 더욱 자세히 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혼유석, 망주석, 문석인과 무석인, 난간석, 석양과 석호 등을 살펴보았다. 선의왕후 능의 석양과 석호는 남편 경종 능 방향으로는 올려다보지 못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또한, 해설사님으로부터 왕이 승하 후 장례를 치르고 능이 조성되기까지의 과정과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여러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릉에 병풍석을 둘렀으나, 후대로 가면서 비용절감 차원에서 난간석만 유지한 것도 알게 되었다.
능 뒤쪽으로 돌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중앙정보부 강당으로 이동하였다. 복원공사를 하면서 철거를 할 예정이었지만 보존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건물이다. 독재 시절 민주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이 좌파로 몰려 고문당하고 죽어갔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음산한 기운이 건물 전체를 뒤덮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신성한 능역에 이런 건물을 지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선하디선한 경종의 영혼은 이곳에서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고문당하는 이들의 비명과 중정의 가든 파티의 소란스러움이 경종의 영혼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당을 제외한 옛 중앙정보부 건물 일부는 현재 한예종이 학교 건물로 사용 중이다. 중정이 철거되고 훼손된 산은 소나무가 심어져 복원 중에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의릉 능역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오늘의 답사는 마무리되었다.
경종은 짧은 재위기간과 아버지 숙종 그리고 동생 영조 사이에서 유약한 왕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해설사님은 다른 평가를 하셨다. 숙종과 영조가 잘 이어질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한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어머니의 죽음으로 극심한 마음의 병도 얻었을 터이지만 4년의 짧은 시간 안에 노론을 제압하며 카리스마를 보여주었고, 노론의 세자내치기 전략에도 휘말리지 않고 자리를 보존한 지혜로운 왕이 경종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경종의 의릉을 돌아 나오며 이곳이 제모습으로 복원되어 왕의 영혼이 편안히 머무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