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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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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스크랩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바당 집(이승익) 추천 0 조회 75 12.07.04 11: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使人生爲藝-인생이 곧 예술이 되게 하라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 목 차 -

0. 머리말

Ⅰ. 몸말

1. 생애 / 연보

2. 사상

1) 정치 - 도덕정치

2) 종교 - 밥을 중심으로

3) 생명사상

4) 예술세계

Ⅱ. 맺음말

Ⅲ. 참고문헌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 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 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로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김지하, <말씀>

 

 

0. 머리말

 

몇 해 전 미학파트 행에 동행하게 되어 원주를 찾았던 기억이 났다. 우리 일행은 원주에서 장일순을 기리는 모임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났다. 그분들에게서 원주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살림운동,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의료생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렇게 이끌어주신 장일순 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다. 그 만남은 여행에서 가장 신선했던 충격 중 하나였고, 꼭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라도 지역에서 지역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행위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몇 해가 흘러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며 내 아이를 위한, 더 나아가 우리 아이들을 위한 희망의 대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때 다시 장일순 선생님의 책을 들었다.

그 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사셨고 누군가의 앞에 서시지 않고 항상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아가셨던 분이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고난을 준 이까지 용서하려 하는 큰 용서의 전문가이자 세상에 못나고 실패한 이들을 보듬어 주는 삶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 분은 또한 노장사상을 비롯한 고전에서부터 서구의 기독교 사상, 나아가 우리의 동학사상까지 아우르며 그 안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진리,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설파했던 생명사상가였다.

또한 전문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옛날의 선비들이 시서화 악가무를 일상적 행위의 하나로 즐기듯이 문화예술을 벗하며 살아온 문인화가, 문인예술가였다고 보인다.

책 속의 진리를 책 밖으로 꺼내 직접 이를 구현하고자 했던 실천가이자 인위적 예술이 아닌 무위(無爲) 안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문화예술, 상품가치로써의 예술이 아닌 사람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문화예술을 구현하였던 실천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삶, 그것이 바로 미학적 삶이고 장일순 선생님이 추구하였던 삶일 것이다.

정말 단순하고 쉽지만 좀처럼 현실에 구현되기 어려운 삶의 진리, 생명의 진리를 실천하고 자 했던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Ⅰ. 몸말

 

장일순(張壹淳, 1928년 9월 3일 - 1994년 5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이다.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만들었고 생명운동을 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걷는 동학'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궁금하다. 장일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 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고, 30대 초반에는?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30대 중반에는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파워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말하자면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고, 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 살림의 세계관, 곧 생명의 세계관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우리 겨레의, 아니 전세계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고, 요컨대 평생 돈벌이 한번 하지 않고 했는데도 부부간이나 가족이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제가와 평천하를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잘 아울렀다.

거기에는 가문의 힘도 있었다. 장일순은 3대를 통해 핀 꽃으로 보면 좋을 듯 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쳤고, 할아버지는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흔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할아버지를?낙타를 타고 바늘 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러웠다. 부드럽되 한마디, 한 행동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일년 내내 빌 틈이 없었다.

단 한번을 보고 장일순에게 크게 반했다는 김종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땅의 풀뿌리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람사는 도리를 가르쳤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지금 단순히 동학이나 천도교의 스승이 아니라 이 겨레, 이 나라 사람들 전체의 스승이듯이 장일순 선생의 자리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 생애 - 연보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부친 장복흥(張福興)과 모친 김복희(金福姬)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호(號)는 호암(湖岩)이었으나, 60년대에는 청강(靑江)으로, 70년대에는 무위당(无爲堂)으로, 80년대에는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 밑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움.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서 서화를 익힘.

1940년 원주초등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서울로 유학.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

1945년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

1950년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옴. 이후부터 줄곧 원주에서 생활.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학원을 설립.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봉직.

1955년 봉산동에 손수 토담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함.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

1957년 이인숙(李仁淑)과 결혼. 슬하에 3남을 둠.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름.

1963년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함.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함.

1964년 이 해부터 몇 해 동안 포도농사에 전념.

1968년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함.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시위를 주도.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촉발하는데 큰 역할을 함. 이후부터는 민주화 운동을 막후에서 전개.

1973년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

1977년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

1983년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주통일 국민연합>을 발족하는데 일조함. 10월 29일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

1988년 한살림 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 개최. 다섯 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1989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시 호저면 송곡(松谷)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움.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데 고문으로 참여. 6월 14일 위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

1992년 생명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 다수.

1993년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냄. 9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 11월 13일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음.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의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

1997년 녹색평론사에서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은 『나락 한알 속의 우주』를 펴냄

1998년 상지대학교 전시관에서 장일순 유작전이 열흘간 열림

2001년 7주기를 맞이하여 원주 시립박물관 주최 무위당 선생 기획전시회를 두 달 동안 열음.

2004년 10주기를 맞이하여 토지문화관과 원주가톨릭센터, 원주시립박물관 일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림. 최성현이 쓴 <좁쌀 한 알>이 도솔출판사에서, 최종덕이 편집한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가 녹색평론사에서 출간됨.

2007년 9월 6일 무위당 선생의 사상적 유산인 원주밝음신협 건물 4층에 <무위당 기념관> 개관.

 

 

 

2. 사상

 

1) 정치 - 도덕정치

 

장일순 선생님은 현실정치를 통해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고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의 벽에 부딪혀 고배를 마시게 된다. 박정희정권 시기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감옥생활을 한 후에는 야합으로 얼룩진 정치판을 떠나 현장에서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사회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미 20대에 원 월드운동과 같은 세계적인 평화질서 구축에 대한 관심과 뜻을 품었던 그에게 기존의 정치판은 뜻을 펴 보이기엔 이미 가능성을 상실한 병든 상태였던 것이다. 장일순 선생님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의 출발점을 누군가에게 대항하기 위함을 뛰어넘어 모든 생명의 지속성을 살리기 위함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탄압했던 위정자들까지도 품어안기로 한다. 이를 통해 김지하는 우주적 기틀로서의 도덕과 사회적 현실개혁로서의 정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을 가진 선생님을 도덕정치가라고 이름짓는다.

 

도덕정치

민주화를 위한 당신의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정치사상가,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재야의 대부라는 이미지보다는 쌀 한 알,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사람, 산업문명의 절박한 위기와 한계를 남보다 먼저 느끼시고 아퍼하시면서 생명의 큰 기운으로 이겨내고자 애쓴 생명운동의 길잡이이자 사상가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의 사상을 도덕정치가로 이름한 김지하 시인의 말씀이 매우 중요한 듯 합니다. 우주적 기틀로서의 도덕과 사회적 현실개혁로서의 정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사상적 은유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도덕정치가라는 의미를 이해해야만 약관 20여 세의 나이에 진보적 이념을 갖고 현실정치를 통해 사회를 바르게 개혁하고자 했던 선생님이 왜 생명운동을 주창하시게 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당신은 대립의 갈등구조 중심으로 해석해 오던 사회적 관계를 상호 보완적 공생의 관계로 새롭게 보신 것입니다. 당신의 사회정치적 접근방식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도덕적 이해가 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생명과 협동 그리고 교육운동을 자본가에 대한 경제적 약자들의 대항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우주 모든 생명들의 존재법칙으로서 강조하셨습니다. 우주 천지만물이 모두 한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더불을 때만 뭇생명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위당의 사상이 도덕정치라는 재해석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이병철과 김지하의 말씀 중에서)

 

 

화합의 논리, 협동하는 삶

그런데 요새 문제가 뭐냐, 민중운동이니 뭐니 하는데 이 민중운동의 목표가 뭐냐 이 말이야. 저 새끼들이 저렇게 사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어, 저 놈들 도둑놈인데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그것이 소련이나 동구라파에서 해보려도 했던 거야. 그래서 뭐 해결이 돼요? 네가 뻑적지근하게 잘 사니까 우리도 좀 그렇게 돼야 되겠다는 거 아니야? 그거 가지고는 안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나라의 민중운동은 자칫하면 저 아프리카나 이런 데 있는 빈민지대의 기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이렇게들 잘사는데 왜 이렇게들 미쳤어, 지랄이야, 이럴 거 아닌가. 가치의 설정만은 물질의 가공과 생산자가 조작한 그것 속에서 설정하지 말자 이 말이야. 그리하여 이 물질과 이 자연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생활하는 방법을 도출할 적에 전체가 건전해지는 것 아니겠어?

 

왜 한 살림인가

만나라는 말이야. 문제는 공동의 과제를 밀고 나가야지. 어차피 운동에는 다 각각이지만 각각이라도 연대해가야 된다 이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생명세력, 반생명적으로 문제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항해서 우리가 일을 확산해나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다만 한 가지라도 사회를 위해서 밝게 일하고 있고 좋은 일 하고 있는 그러한 단체는, 연대를 하자고 할 때는 함께하자는 말이예요. 함께 하지 않았을 때 어떤 문제가 오느냐, 보글보글 혼자 우리끼리만 놀다가 끝나게 돼요. ... (우리의) 시각이 정치에서부터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연대할 능력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운동은 가속화되고 더 깊이 제대로 정착이 되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혁명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에요.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꺼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되지요.

혁명이라는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예요.

아직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 하고도 만나라 이거예요.

보듬어 안고 가자는 거지요.

그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겁니다.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때 변하는 거거든요.

 

변화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요.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해요.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상대는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아야 해요.

내 것이 옳다고 하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갖고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만 판을 짜려고 해서는

세상의 큰 변화를 이루기 어렵지요.

 

 

2) 종교 - 밥을 중심으로

 

장일순 선생님은 어릴 적에는 유학의 바탕을 둔 학문분위기를 접했고 형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카톨릭 사상을, 그리고 지인을 통해 천도교를 알게 되면서 동학사상까지 다양한 종교사상을 접하였다. 이후 칩거 생활동안에는 노자, 장자, 스페인 농민공동체 몬드라곤에 관한 책들을 접하면서 이후 선생님의 궁극적 목표였던 생명사상과 협동조합에 대한 전망을 확립하게 된다. 다양한 종교를 접하면서 선생님은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진리를 밥에서 찾아내었다. 또한 우리에겐 표면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의 소중한 생명사상을 찾아내어 평생의 사상적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현실 속에서는 장일순 선생님은 당시 종교가 가지고 있던 아집을 과감히 버릴 것을 이야기하셨고 이를 실행에 옮겨 성직자간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동학사상

무위당 선생님은 몽양(夢陽)의 제자로서 이 사회에 입문하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몽양의 평등 사상과 죽산(竹山)의 누리 사상의 출발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어릴적 부터 집안의 한학 전통으로 이어진 유가철학(儒家哲學)가톨릭 정신이 그 바탕에 있었습니다. 이후 동학(東學)사상에 대한 깊은 천착으로 간디즘과 해월(海月)의 ‘밥사상’, 또한 민족문제를 넘어선 인류문제, 지구문제, 생태계문제에 깊은 공부를 하셨습니다.

선생은 글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해월도 그리고 성명 삼자까지도 남기지 않고 간 많은 선철들이 글을 남기지 않았으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이치를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자의 무위 사상이 사상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의 삶에서 나락 한알 속의 우주처럼 구현되셨습니다. 당신의 노자 이해는 정말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장의 삶에서 자신을 기고 낮추고 모시는 구체적 행위로 이어질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위당 철학의 가장 높은 버렁으로 보이는 「모심과 섬김」은 아마도 평생을 두고 사숙(私淑)해온 최보따리 최해월(催海月)한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해월사상의 <십무천>(十毋天) 속에 나타난 삶이 바로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한울님을 속이지 마라.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고, 어지럽게 하지 말고, 일찍 죽게 하지 말고, 더럽히지 말고, 굶주리게 하지 말고, 허물어지게 하지 말고, 싫어하고 불안하게 하지 말고, 춥고 굶주리게 하지 말라." (김성동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예수께서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서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으라. 이 것은 내 몸이다.’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이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의 참 양식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빵과 포도주가 그 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양식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밥으로 오신 것을 말해주십니다. 하느님으로서의 밥, 생명으로서의 밥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나라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 한그릇을 알면 만사를 알게 되나니라” 했고,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20강에는 ‘아독이어인 귀사모(我獨異於人 貴食母)’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食자는 기른다는 뜻으로 ‘사’라고 읽으며 母자는 모든 것이 태어나고 죽어서 돌아가는 근원인 도(道)를 말합니다. 나홀로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허례허식과 부귀를 따르지 않고 도심(道心)을 기르는 것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몸으로서의 밥, 피로서의 포도주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불상을 보고 절하다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는 김진홍이 지학순, 장일순과 함께 치악산으로 바람을 쐬러 갔던 어느 날이었다. 가는 길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렸는데,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장일순과 지학순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했다! 지학순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고, 장일순은 평신도다. 김진홍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진홍은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가 믿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장일순과 지학순이 오히려 성인처럼 보였다.

장일순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신부와 목사가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서로 담을 낮춰야 한다는 말을 늘 했다. 그 결과, 한때 원주에서는 가톨릭 신부들이 개신교 교회에서, 개신교 목사가 성당에서 강론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선생님은 밥을 통해 예수와 석가와 해월을 만나게 하고, 모든 생명들의 관계가 생명인 밥이 되어 서로를 나누는 관계임을 일깨워 주셨다. 그 가운데서 특히 해월 선생의 밥이야기를 빌려 밥이 곧 생명이요, 한그릇의 밥 속에 온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으니 밥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먹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을 위한 근본과제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고자 하셨다.(萬事知 食一碗) 선생님을 통해 만나게 된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의미와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사상은 지금까지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개벽이었다.

 

  향아설위

장일순은 잡지사 기자인 김지용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체가 내 안에, 또 네 안에 있는데 벽에 대고 제사할 필요 없는거지.

해월께선 할아버지 내외, 아버지 내외, 아들 내외, 딸, 며느리, 손자 할 것 없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향아설위를 했으니 대단하지. 생각해 보게. 19세기에 할아버지가 며느리, 손자에게 절을 했으니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요새 민주주의 갖고는 어림없는 얘기 아닌가 말이야."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향아설위'라는 것 있잖소. 그것은 종래의 모든 종교에 대한 대혁명이죠. 늘 저쪽에다 목적을 설정해놓고 대개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오 하고 바라면서 벽에다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그게 아니라 일체의 근원이 내 안에 있다, 즉 조상도 내 안에 있고 모든 시작이 내 안에 있으니까 제사는 내 안에 있는 영원한 한울님을 향해 올려야 한다는 말씀이죠."

 

자애와 무위는 하나

山不利 水不利 利在挽弓之間(산불리 수불리 이재만궁지간)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이로운 것은 화살을 이렇게 당기고 있는 그 사이에 있나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심상태, 무욕상태, 그래서 단심으로 활을 나꾸고 있는 그런 상태래야, 그러니까 활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과녁에다가도 너무 혼을 뺏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 무심상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단순히 그렇다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 없는 그런 자세, 그렇게 되면 이롭다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여기의 바로 이 말씀은 어디가 좋다 하는 딴 장소가 없다 이 말이예요. 바로 자기가 앉은 그 자리, 지금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데 거기에는 한눈 팖이 없어야 된다, 쓸데없는 욕심부림이 없어야 된다. 인위적인 계산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말씀을 해월 선생께서 해주셨더란 말이에요.

 

 

3) 생명사상

 

장일순 선생님은 생명이라는 화두를 일관되게 말씀하셨다. 세상의 하찮은 미물까지도 생명을 가진 인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간만이 잘 사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과 세상만물이 다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이라는 주제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9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던 환경운동 등에 대한 전망을 이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들어있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우주적 존재임을 설파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확장하였다. 결국 세상만물에 생명이 깃들어있고 그 생명을 모심으로써 모든 존재를 보듬고 나아가는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생명사상

우리 시대 생명 사상의 큰 스승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남겨주신 생명의 뜻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아주 사소한 생활 속에서부터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모시는 일, 그것이 바로 생명사상의 요체인 듯 합니다. 세상 살기가 아무리 험악하고 먹고 살기가 아무리 척박해도 무차별 경쟁과 죽임이 아니라 자연과 나누고 사람과 함께 하면서 사람다운 삶의 터전을 조금씩 넓혀 가는 길이 바로 생명사상의 실천이며 구현일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을 우리는 잊고 살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이거늘, 그런 이치만 안다면 서로를 모시는 일이 어려울 것 없다는 것이 무위당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치는 굳이 말로 표현될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그런 이치의 원천입니다. 무위당 선생은 어머니를 기리는 작품을 여럿 남기셨습니다. 그 작품은 단순히 글과 그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시려거든 어머니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한 것일 겁니다. 그래서 모심은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모든 이가 어머니에서 태어났듯이 어머니의 자비심은 우리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기운 역시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이 바로 생명의 힘이며 그 힘이 바로 예수나 부처의 기운이기도 하다는 것을 무위당 선생은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천지를 모시는 일은 바로 일상적인 사랑을 확인 하는 일이며 신을 모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위당 선생은 그 모심이 마음으로만 그쳐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항상 스스로를 낮추어 서로에게 어울리는 사회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실천의 삶이 바로 한살림 운동으로 나타났고 대성학교 설립과 같은 교육운동의 일환이셨습니다. 선생의 연대기로만 볼라치면 사회운동 다음에 나중에서야 생명운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선생의 삶은 항상 사회의 실천운동과 마음의 도덕수양이라는 두 삶의 길이 항상 하나로 엮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갈래의 길이 둘이 아니라 원래 하나임을 아는 일, 바로 그것이 무위당 생명사상의 뿌리를 체득하는 지름길입니다.

 

삶의 도량에서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 구나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

 

풀은 부처의 어머니

장일순의 집 정원에는 잡초가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홍동선이 물었다.

"잡초도 가꾸십니까?"

장일순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놈들이 아침 저녁으로 나를 반기니 어떻하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여. 공생의 원리가 우주의 법칙이 아닌가?"

 

너나 나나 거지

장일순이 최병하에게 말했다.

"너나 나나 거지다."

최병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장일순도 물론 거지가 아니었고, 자신도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이었지 거지가 아니었다. 장일순이 뜨악해 하는 최병하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장일순이 받았다.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 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 먹고 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 먹고 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장일순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최병하는 얼른 답을 못했다.

"거지에게는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 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밥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4) 예술세계

무위당 장일순 - 인위가 아닌 무위의 서화

장일순 수묵전(그림마당 민 1991)/유홍준(영남대 교수)/팜플렛 발문

 

재야서가·문인화가

무위당 장일순(无爲堂 張壹淳)의 글씨와 그림은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在野書家)의 글씨이며, 우리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文人畵家)의 회화세계이다. 그리고 그 예술이 목표로 하는 바의 미적 이상은 일격(逸格)의 예술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이 분화 또는 파편화되어버리는 근대사회로 들어오기 이전, 아직 총체적인 것, 근원적인 것, 세상에 통용되는 교양적인 것의 가치가 존중받던 시절에는 미술 또한 직업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지식인)는 자신의 교양과 학문을 드높이고, 간직하고 싶은 정서를 발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거문고를 타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당시 지식인의 삶속에서 지필묵(紙筆墨)은 오늘날의 만년필이나 볼펜처럼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고, 글씨를 쓰는 필법(筆法)은 그림, 그중에서도 난초와 대나무 그림 같은 사군자의 묘법(描法)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가를 틈타 희묵(戱墨), 농묵(弄墨), 완묵(玩墨)하곤 하였다. 그러한 문인을 사람들은 여기화가(餘技畵家)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취미와 여기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기술을 앞세우는 직업화가인 화원(畵員)의 그림과는 다른 높은 정신적 차원의 예술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문인화의 본령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근대사회로 들어오게 되면 문인화가들의 그런 기백과 자부심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고, 지필묵은 만년필로 대체되면서 종래의 문인화풍이란 한낱 겉껍질만 남은 상투화된 형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도 각종 문화센터에서는 '문인화반(文人畵班)'이라는 이름으로 사군자를 가르치고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수강하는 사람이나 문인화의 정신은 제쳐놓고 그 형태만 따르고 있는 실정이니 그것을 전통계승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무위당의 서화에 문인화의 참뜻이 서려 있다고 한 것이다.

문인화의 참뜻이란 그것을 단순히 기법의 능숙 여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문인의 정신과 기품이 살아 있는가 아닌가를 묻는 데 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문인화풍이 매너리즘화되어가는 세태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진원소(陳元素)·승백정(僧白丁)·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전택석(錢澤石)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로지 난초를 잘 그렸고 그 인품(人品) 또한 고고하고 빼어났으니, 화품(畵品)도 그 인품에 따라 상하를 정할 것이지 (인품을 빼어버린) 화품만으로 논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인품과 화품

무위당은 그의 그림이나 글씨에 찍는 머릿도장으로 "원주인(原州人)"이라는 문자도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분명 원주사람이다. 그는 원주에서 태어나 원주에서 자랐고 줄곧 원주에서 살아왔다. 원주를 떠난 적이 있다면 오직 한번 서울대학교 미학과 제1회 입학생으로 대학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대학 3학년 때 6·25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이내 원주로 돌아온 이후 줄곧 여기를 떠나지 않았다.

원주에서 그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교육운동·사회운동을 착실히 전개해나갔다.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면서 청년교육에 앞장섰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드는 산파역이 되어 원주에서 신용협동조합이 뿌리내리고 고리대금업을 축축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지역사회의 일꾼이자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꾸데따가 일어나면서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무더기로 구속될 때 그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갖은 회유와 유혹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지켰고 그 아픔을 감내하고는 원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여전히 원주사람으로 살아갔다. 1970년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캄캄해서 앞이 막막했던 유신시절,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던 방식대로 그곳에 뿌리내린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지학순 주교의 천주교 원주교구, 그리고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이 주도하던 가톨릭농민회의 일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후견하였다. 시인 김지하가 원주로 내려와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첫 불꽃이 원주에서 일어났던 것을 사람들은 무위당과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1974년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어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 학생운동은 인혁당 배후조종을 받은 것으로 조작되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이때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이 그 배후인물로 부각됨으로써 민청학련은 불온집단이 아니라 양심세력의 결집이었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의 추이에서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을 하고 수사기관에 출두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은 무위당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무위당의 인품과 사회적 실천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이 한 일을 크게 드러내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그가 유창한 논리를 펴거나 세상을 경륜하는 지혜를 내세운 일은 없었다. 오직 자연의 순리, 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세에서 사물과 일을 대했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다. 서울의 이름 높은 지식인에서 원주의 구두닦이 소년까지 폭넓은 인적 유대를 갖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인품 덕분이다.

그의 사회운동에는 언제나 하나의 정신이 유지되었다. 그는 항상 참된 인간적 가치와 그것의 사회적 실천을 인생 지고의 가치로 삼아왔다. 그는 인간이 자연 속의 한 동물이고, 뭇 동물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했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속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연의 속성이 있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지켜야 할 덕성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이 개조해나갈 자연의 모습과, 인간이 파괴한 자연의 원상복구를 동시에 주장해왔다. 이런 정신을 그는 고전에서 찾았고 노장철학, 선가의 가르침을 익히고,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깊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

 

무위당의 창작자세

무위당이 글씨를 쓰고 난초를 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의 일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보안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요시찰인물이 되었을 때 그는 붓을 잡고 "먹장난[戱墨]"을 시작했다. 반은 감시자의 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반은 자신의 정서적 욕구에서였다.

무위당이 그때 처음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글씨를 배웠다. 밖에 나가 무작정 뛰노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던 5, 6세 어린 시절에 붓을 잡고 신문지 전체가 먹으로 가득차도록 획을 긋고 또 그어야 했던 호된 훈련과정이 훗날 그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는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붓을 잡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할아버지인 여운 장경호(旅雲 張慶浩)는 그 자신이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관동지방의 이름난 서화가인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과 절친한 사이였다. 차강은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잊혀진 채 그저 강릉의 묵객(墨客)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대의 문사이자 지사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의병에 참여했고 끝내 '서화협회(書畵協會)'에조차 참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뜻을 지켰던 분이다. 무위당의 서화는 이러한 차강의 훈도 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위당이 처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낙관을 할 때 사용한 호는 청강(淸江)이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맑은 강물이란 얼마나 뜻 깊고 아름다운가 하는 마음에서 붙인 자호(自號)라 한다. 힘겹게 살아가면서 맑은 강을 만나면 거기에 잠시 앉아 쉬어보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주로 원주에서, 한번은 춘천에서 열었으니 모두 강원도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원주 봉산동 키 큰 측백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였다. 거기에 반드시 그 인물이 지켜야 할 경구와 격언 또는 시구를 적어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림을 받는 사람의 이름 뒤에는 아형(雅兄), 학형(學兄)이라는 표현보다는 도반(道伴)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벗이라는 뜻이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 자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80년대 말 수많은 재야단체들이 '기금마련전'을 너나없이 열다시피 했을 때 무위당은 한 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없이, 오히려 부탁한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보내주곤 했다. 그리고는 사례비를 받은 일이 없다. 그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은 "만약 이 그림을 그리면 얼마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그날로 나는 붓을 꺾을 것"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은 '한살림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 자세를 나는 무한대로 존경한다. 지금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 옛날이라고 몇이나 있었겠는가 싶다. 나는 청나라 때 문인화가인 정판교의 글을 읽다가 꼭 무위당의 창작 자세에 들어맞는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쓰고자 함이지, 그것을 갖고 세상사람들과 즐기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무위당의 글씨와 그림

무위당의 글씨 또한 직업적인 서가의 그것과 길을 달리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정통서법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서예계의 사정에 구애됨이 없이 글의 내용과 서체 모두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정서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뜻에서 나는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무위당의 글씨는 예서체(隸書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예서체는 잘 짜여진 구조의 멋과 삐침과 파임이라는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또한 초서나 행서와 달리 형태가 간명하여 "무지렁이도 알아볼 수 있는 민중적 서체"라는 일면도 지니고 있다.

이런 예서체를 선생은 아주 소탈한 맛으로 전환시키면서 부드럽고 편안한 글씨, 그러나 힘과 균형이 들어있는 독자적인 서체로 발전시켰다. 서법의 생명력이라 할 골기(骨氣)를 유지하면서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움이 풍기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무위당이 어떻게 이처럼 독자적인 서체를 지닐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붓을 다룬 오랜 연륜, 그의 삶과 인품, 언뜻 떠오른 것은 거기에서 연유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나는 그 해답을 3년 전에 얻어낼 수 있었다.

무위당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요즈음 길거리에서 군고구마 장수 아저씨가 서툰 솜씨이지만 삶의 필요에 의해 나무판자 위에 정성스레 쓴 '군고구마'라는 글씨 속에서 이 시대 글씨의 한 이상(理想)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인생이 거짓없이 녹아들어 있는 글씨,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무심(無心)과 무위(無爲)의 철리(哲理)이다. "뛰어난 기교란 어수룩해 보이는 법"이라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서체이다. 그것이 무위당 글씨의 본질이고 특성인 것이다.

무위당의 난초는 참으로 독창적인 것이다. 그는 난초를 치면서 고귀한 멋이나 곱상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춘란(春蘭)이나 기품을 앞세운 건란(乾蘭)은 즐기지 않는다. 무위당의 난초는 한마디로 조선 난초이다. 잎이 짧고 넓적하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잡초 같은 난초를 좋아한다. 그것도 바람결에 잎을 날리면서도 꽃줄기만은 의연히 세우고 그 향기를 펼치는 풍란(風蘭)을 즐겨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화제(畵題)를 붙인다.

무위당의 난초 그림에서는 맑은 품성과 강인한 생명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 ── 선생이 주창하는 생명사상과 정신을 표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난초는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는 힘차고 건강하고 소탈한 심성의 인간상에 들어맞는 민초도(民草圖)로 전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위당은 만년에 들어 여기에 새로운 형식을 하나 더했다. 그것은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마치 선화(禪畵)처럼 스스럼없이 그은 몇 가닥의 붓자국으로 그린 간필법(簡筆法)의 난초들은 그대로가 사람의 얼굴이고 몸매가 된다. 웃는 얼굴, 생각하는 얼굴, 때로는 부처님의 모습까지 연상되는 무심(無心)의 경지이다.

무위당의 이 독자적인 얼굴 난초는 그가 문인화가로서 이 시대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문인화의 오랜 역사적 전통의 맥락에서 언급될 만한 징표로 여겨진다. 그것은 결코 기법의 수련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그의 맑은 인품과 꿋꿋한 삶속에서 터득된 하나의 결실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그가 창조적인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준 마지막 화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사람 ── 도반(道伴)으로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을 무한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군고구마

드라마 작가인 홍승연은 이런 글을 보내왔다.

"글씨를 써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군고구마, 실비집, 빈대떡과 같은 글씨들이 아름답게 보여 선생님 글씨는 내게서 냉대를 받는 편이다."

 

김익호는 이런 글을 보내왔다.

"봉산동에 있는 교육원에서 장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시내 길모퉁이에서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어요. 바람막이 포장을 쳐놓고, 포장 앞과 양옆에 ?군고구마'라고 써붙여 놓고 말이지. 서툰 글씨였어요. 꼭 초등학교 일이학년이 크레파스로, 혹은 나무 작대기를 꺾어 쓴 글씨같아 보였는데,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먼 곳에서도 뚜렷하게 잘 보였어요. 그 글씨를 보며 걸으며 생각했지. ?아, 얼마나 훌륭한가! 이 글씨는 이곳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반갑고 따뜻할 것인가! 부끄럽다. 내 글씨 또한 저 ?군고구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일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어요."

 

세 분의 아버지

칠그림을 하는 양유진이 "선생님, 저 별명 하나 지어주십시오."

아호를 하나 지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청을 받고 장일순은 아무말이 없었다. 다만 물끄러미 양유전을 바라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10분쯤 조용히 양유전을 바라보고 나서 장일순이 한 말은 이 한마디였다.

"일주일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렇게 해서 받은 호가 소하다. 흴 소素, 연꽃 荷. 흰 연꽃이라는 뜻이다.

"너는 옻칠하는 칠장이 아니냐? 진흙처럼 질척질척한 것을 주무르는 일을 하지. 그런데 연꽃은 그런 진흙에서 피지 않니? 그 가운데서도 흰 연꽃은 백 년에 한번 핀다고 한다."

?인생이 예술이 되게 하라.'

장일순이 양유전에게 준 글이다. 나날의 삶 그 자체가 곧 예술이 되도록 살라는 뜻인데,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누구의 삶에서나 흰 연꽃이 피어나리라.

 

 

 

Ⅱ. 맺음말

 

선생님 추모의 자리에서 김지하 선배가 선생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한 바가 있다.

첫째로 모셔라(侍). 천지만물이 모두 저마다 하늘을 모시고 계심을 알고(天地萬物 莫非侍天主). 둘째로 기어라. 무위당에서 조 한알로. 평화의 조건으로서 양보와 겸손을 실천하라. 그리고 셋째로 이루려 하지 마라(無爲, 無爲卽無不爲). 생각은 공에 두고 삶은 세상의 끊임없는 개혁에 두라.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 선 자리를 보라. 이루려 하면 헛되느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 자와 함께하지 않느니라."

 

1. 사회현상의 분석, 대안에서 실천까지

 

우리가 그동안 열광해왔던 외국의 사상가들은 세상의 현상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한 이들은 드물었던 것 같다. 책상머리에 앉아 세상의 이치를 고민한다 한들 그것이 대안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많은 지식인들이 책상머리 고민만으로 일관된 연구를 하기 때문에 학문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닐까?

봇물 터지듯이 수입된 근현대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생각을 접하며 과연 같은 시기 우리에게는 이 땅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여 연구한 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장일순 선생님을 만나면서 우리에겐 그 누구보다 현명한 사상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현실을 분석하고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이를 행동에 옮기는 실천가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녔음에 더욱 놀랐다. 물론 장일순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축적된 고금의 진리와 동학사상, 그리고 선배 지식인 등의 사상적 뒷받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이론과 배경들을 하나의 명쾌한 명제로 정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명제를 전달하면서 더 나아가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2, 장(場)의 확대 - 원주를 떠나지 않고 천리 밖을 보는 삶

 

장일순 선생님이야말로 본인이 살아온 장(場)과의 가장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장(場)의 바탕으로써, 나아가 세상의 모든 장(場)과의 소통을 이끌어내면서 본인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서울 중심, 대도시 중심의 거시적인 사회활동이 아닌 원주라는 소도시를 기반으로 하여 평생을 원주를 떠나지 않고도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캠프 역할을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지역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면서 전국단위, 세계단위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로컬리티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분이다. 앞에 나서지 않고도 원주라는 지역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줄 만큼의 지역적 발전을 이끌어내신 지역의 큰 어른인 것이다.

 

3. 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삶 -使人生爲藝

 

장일순 선생님에게 있어 문화예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서예를 일찍부터 배우면서 한학을 자연스레 접했을 것이고, 출옥 이후 다시 붓을 잡으면서 많은 사회적 탄압을 견디게 해주었으며, 더 나아가 붓글씨를 통해 자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하려고 했었다. 서예 덕분에 선생님은 연금의 시간들을 창조의 시간으로, 깨달음의 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본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들을 오해 많은 글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전해지는 난초 그림 하나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님은 예술의 궁극적 기원과 목적을 일상적 삶과 일치시키면서 삶의 진정성을 담은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해 노력하셨다. 단순히 잘 그렸다 멋있다의 예술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삶의 실천적 대안까지도 찾아낼 수 있는 지표와 같은 존재였다.

문화예술이라 하면 흔히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위안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일순 선생님은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 인간수련의 장(場)으로써 문화예술을 선택하였다. 문화예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값진 가치를 발휘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4.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신 선생님

 

장일순 선생님의 생애와 하신 말씀을 접하면서 선생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말씀과 에피소드들이 다 소중하게 다가왔다. 버릴 것이 없었다. 큰 업적을 하나만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 어떤 것을 내세워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거나 내세우신 적이 없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힘주어 이야기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화살을 당기고 있는 상태, 그 어디에도 힘은 실려 있지 않지만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수 없는 각성의 상태, 선생님의 이야기가 한시간 반의 발표문으로는 정리되기 힘든 것은 평생을 각성의 상태로 하여 하는 것 없으신 듯 많은 것을 이루어놓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지도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참된 지도자의 부재는 가야할 나침반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과연 장일순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비록 당신 스스로는 나락 한 알과 다름 없는 작은 존재라고 늘 이야기하셨지만 나락 한 알에 우주가 담겨있기에 선생님의 존재를 세상이 알고 있음만으로도 세상의 변혁은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르겠다.

 

 

Ⅲ. 참고문헌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1997.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녹색평론사, 2004.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004.

김익록,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09.

무위당 만인계 홈페이지 http://www.jangilso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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