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사다
고여생
기다렸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사야 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모종을 파는 장터에는 나처럼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제법이다. 아니면 최근 쌀쌀한 날씨에 모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에도 이곳에서 모종을 샀으니 좀 싸게 달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장 상인은 모종판을 쑥덕쑥덕 잘라 몇 개를 덤이라며 얹어준다. 가격 정찰제에 길들어 에누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젊은 층은 나 혼자이다. 몇 개 사지 않을 거라 어르신을 먼저 보낸다. 고추, 깻잎, 상추, 오이, 애호박, 치커리, 대파 모종 합쳐봐야 만원도 채 안 된다. 어르신의 고추 모종 한 판에 비하며 시쳇말로 개미 오줌만큼도 못하다. 차마 에누리는 못 하고 모종 담을 빈 상자를 얻어 차에 싣고 몇십 년 만에 시장 구경을 한다.
지역에 마트가 생긴 이유이기도 하지만,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다는 편리성 때문에 그동안 재래시장은 뒷전이었던 것 같다. 딱히 사야 할 것은 없다. 그저 한 바퀴 휘둘러 볼 생각이다. 구경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시장바구니에 담고 아니면 마다하면 된다. 이른 시간이라 북적이지도 않고 물건들이 수북수북 신선하니 때깔이 좋다.
순대와 돼지고기 수육 등 이것저것 팔고 있는 가게에는 한 번 먹을 만치 위생적으로 포장돼 있다. 진열하고 있는 물건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어르신 한 분이 돼지고기 수육을 산다. 한두 번 이용해 보신 게 아닌 듯하다. 덤이라며 내장을 선뜻 담아주는 주인이다. 집에서 직접 수육을 삶기에는 번거롭고 귀찮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간편하게 사서 드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견물생심이라고 순대 볶음이 생각나 순대 한 팩을 집어넣었다.
순대 볶음에 넣을 양배추랑 깻잎을 사고 실파 반 단을 산다. 실파는 더 이상이 소분은 안 된다고 한다. 양이 많기는 하지만 깨끗이 씻어 적당한 크기로 썰어 냉동 보관하면 그만이다. 요리할 때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어 오히려 더 편할 수 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작업용 방수 마스크를 산다. 제초 작업할 때 농약 중독에서 그나마 안심이 되겠다. 고가구 파는 가게도 기웃거려 보지만 특별히 필요한 물건은 없다. 지난 시간의 잔해와 어머님이 쓰시던 궤짝을 잠시 떠 올려 볼 뿐이다.
호떡 가게는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제법 길다. 어른들은 추억으로 아이들은 맛으로 줄을 서 있다. 그 무리에 잠시 끼어 있다가 과일 가게로 눈길을 옮긴다. 금방 밭에서 따온 듯 싱싱하다. 딸기의 새콤달콤함도 담고, 옆의 참외도 흥정한다. 작은 거 하나는 덤이란다. 뜻밖의 선물에 기쁨이 가득하다. 익숙하지 않은 행복이 어릴 적 추억을 불러들인다. 복숭아는 벌레 먹은 게 맛있다며 늘 벌레 먹은 복숭아를 사 오셨던 어머님이다. 거기에 반은 덤이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것저것 시장바구니에 담고 모종 가게 옆을 지나는데 어르신 두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 고향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게난 그 성님 요양원에 가서?” 한다. 어르신 얘기를 듣는 순간, 살갗에 벌레가 기어가듯 스멀스멀 떠오르는 게 있다.
우리의 어머님들은 오일장에 물건 사러 가는 게 아니고 구경 간다고 했다. 물론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했지만, 세상사는 얘기가 우선이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오일장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소식도 듣고 동네 돌아가는 소문도 들었다. 오일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만이 아니었다. 그간에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 정도 나누고 인사리하는 사랑방이다. 야트막한 돌담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보면 파장이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들은 열 일 제쳐두고 장날이 되면 오일장 구경을 하러 가신 것 같다. 오일장에 다녀오신 날에는 고향 동네 경사는 꼭 듣고 오셨으니 말이다.
그 지방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시장으로 가라 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에서 키운 돼지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장날만 되면 손수레에 새끼 돼지를 싣고, 돼지가 뛰쳐나가지 못하게 그물을 덮어 장터로 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닭과 오리 정도이지만, 어르신이 텃밭에서 직접 키운 야채와 곡물은 여전히 재래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재래시장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열심히 살아가는 세상을 볼 수 있고, 넉넉한 인심을 팔며, 따뜻한 정을 산다. 훈훈한 사람 냄새는 덤이다. 위생적인 환경과 편리성 때문에 재래시장이 대형마트에 밀려 사라지나 했는데, 지금은 지역 문화를 보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재래시장의 서민적인 정겨움이 젊은이들과 관광객에게 통했음이다.
새끼 돼지 팔러 가는 어머니의 뒤를 쫓던 그녀는 지금 그때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었다. 그동안 장터에서는 얼마나 많은 정과 인심을 사고팔았을까,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재래시장만의 가지는 힘이다. 그 시절 뻥튀기 아저씨의 “뻥이요”라고 외치던 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