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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삼악도인 지옥, 아귀, 축생의 마음을 버리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며 공덕장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선 모두 아십니다. 내가 베푼 만큼 내 마음이 열리기에 내 몸의 세포들도 건강해지고 또 그 건강해진 세포가 허공에 그 만큼 좋은 기운을 뿜어내니 화엄신장님들도 그 만큼 가호를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빈구석이 없습니다. 우연이란 절대 없습니다. 진정 우리는 마음 가운데 아귀, 지옥, 축생의 마음을 버려야만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6바라밀행을 닦고 기도를 하고 살면 모든 것이 서서히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어 가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이 베푸는 것만큼, 기도하는 것만큼 되는구나. 모든게 그렇게 되게 되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디 먼 곳에 계시는 분입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체험해 본 사람들은`부처님!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바로 이 마음속에 임하시는가요?'하는 감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삼독심이란 쓰레기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쓰레기가 있는 곳엔 독충과 해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쓰레기 속에서는 파리, 모기밖에 생기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몸의 세포가 더럽고 탁하면 병균밖에 안 생깁니다. 더러운 세포속에서는 암이 생기고 각종 질병만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이란 책을 쓴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쓴 글을 보면 인간개조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탁월한 인체생리학자 엘마 게이트(Elma Gaytt)가 조사연구한 글을 보면 감방에 들어 앉아있는 알콜중독자와 마약중독자들의 체질을 연구하다 보니 마약과 알콜중독자들은 세포반응이 보통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침, 땀, 혈액 등의 세포반응 상태가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마약중독자와 알콜중독자의 땀을 채취해서 독물을 검출하는 시약, 셀레인 애시드(Celane Acid)를 넣으니까 보통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땀과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들의 세포는 완전히 알콜과 독소에 절었을 테니까요.
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세포가 완전히 바뀌어져서 생각이 건강해지고, 부처님의 기운을 머금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포용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개조시키려면 항상 불`법`승을 들어야 합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정도가 아니라 매일 들어야 합니다. 들은 다음엔 행동으로 옮겨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팔만사천대장경을 백천만겁동안 머리속에 넣어 놓고 있는 것 보다, 한 마디를 듣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백번천번 남에게 `베풀어라, 어떻게 해라'하는 것보다 당장 하나를 주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 많이 들으라고 그렇게 이끌어도 한 번 몸을 움직여 법당에 나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던가요?
여래십대발원문은 그 의미가 굉장히 깊은 내용입니다. 우리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록 어렵고 힘겹고 험난하다 할지라도 마음을 닦고 정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쉬울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이 금방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우선 나의 입에 들어오는 호떡 하나가 더 중요하고, 나의 입에 들어오는 콩깍지 하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밀도 짙게, 보이는 세계에만 마음을 주고 살다 보니까 무슨 도(道)를 닦는다는 식의 도덕군자 같은 내용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만한 필요성이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갈고 닦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원아영리삼악도'의 설명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악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지옥의 마음이 있고, 아귀의 마음이 있고, 축생의 마음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닌 나쁜 마음들이 아주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마음이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문제성이 많은 마음입니다. 나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남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런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지옥이 있으면, 세상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은 동료로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면 참으로 참담한 현실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귀란 굶주린 귀신을 말합니다. 아귀같다는 말은 굶주린 귀신같다는 말입니다. 축생같다는 말은 사람같지 않고 동물같다는 뜻입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도 전혀 사람같지 않은 짐승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참으로 이상스러운 마음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이 들어 있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신매매범들이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경찰들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사람을 파리목숨만도 못하게 살상해 놓고도 얼굴엔 유유한 웃음을 띄우는 악마의 탈을 쓴 존재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왜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 자꾸만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에서 지옥, 아귀, 축생의 마음이 좀 녹아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 痴)'라, 하루 빨리 탐`진`치를 끊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에 교만한 마음[慢]과 남을 의심하는 마음[疑]까지를 더해 오독심(五毒心)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삼독심, 오독심이 있습니다. 탐욕의 마음이라는 것은 내마음 가운데 전혀 다른 사람이 고려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탐욕의 포로가 되고, 성질내고, 신경질 부리고,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이같이 중요한 가르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진정으로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내 앞에 호떡이 하나 떨어져 있으면 나 먼저 먹기 바쁘지, 반쪽 나눠서 앞에 있는 친구하고 나눠 먹기를 즐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습니다. 서당개는 매일 서당 앞에 매어 놓으니까 흉내라도 내겠지만, 사람은 그저 법당에 가뭄에 콩나듯, 오면 오고 말면 말고 하니 부처님법이 제대로 터득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세속에서의 대학교 몇년 공부는 인생 몇십년 먹고살기 좋은 길로 나가기 위한 것이겠지만, 불교공부는 영겁의 세월 잘 살고 못사는 것을 좌우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진짜인가 거짓인가, 이런 것만 주판 놓기에 바쁩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요. 이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꿈결 같이 흐르다 가는 것입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어느날 한 순간에 가버리는 것입니다. 경전에도 우리 중생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산다고 쓰여 있습니다.
실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을 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안 끌려 가려고 두발로 버티면서 털석 주저앉으며, 어떤 때는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 주인이 와서 "어이, 일어나 일어나"하면 마지못해 일어납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 "야, 저사람 용하다.
소 부리는 도사인가 보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큰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소는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제 주인 말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주인 덕분에 일생동안 자기 몸을 살찌워왔기 때문에 빚을 져서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막 달려들던 강아지도 제 주인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반깁니다. 자기 주인에게 밥을 얻어먹고 사니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물중생들도 빚진이에게는 순종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처음보는 사람인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전생에 인연이 있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 번 봐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다 전생의 인연들이란 것입니다. 처음보는 사람인데도 공연히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데도 공연히 내가 명령만 내리면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은사람, 내가 뭐 하나 얻어 먹은 것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 그와의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나 송아지도 주인에게 빚을 졌으니까 거역하지 못하고 자기 고깃덩어리를 팔아 주인에게 값을 치르려고, 할 수 없이 끌려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호떡 하나 얻어먹은 것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전생에 내가 그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리는 경우가 있는 것은 내가 그에게 빚을 져서 그렇고, 그저 나에게 잘 해주고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은 그가 나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뭔가 밀리는 것 같고 켕기는 것 같으면 되도록 빨리 점심이라도 사고 호떡 하나라도 사서 빚을 갚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좀 당당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생(生)을 송아지로 와서 그 주인에게 봉사를 하게 되면 얼마정도의 빚을 갚게 될까요? 200석 정도의 빚을 갚는답니다. 소의 평균수명이 20년인데, 20년 동안 200석, 그러니까 쌀 400가마니 정도의 빚을 갚고 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퇴직금 얘기입니다. 일반기업체나 공무원들이 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받습니다. 30년이나 40년 일한 다음 퇴직금을 한 몫 받으면 그것은 일생 내내 일해서 마지막 전리품으로 받는 돈이니까 정말 무서운 돈이지요. 자신의 반평생을 환산한 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 부처의 어느 국장님은 퇴직금을 받아 사업을 한다고 나왔다가 전부 사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퇴직금을 날린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난 인생 전체를 사기당한 기분일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일생 내내 벌어들인 그 귀중한 돈을 사기를 당해 참담한 상황이 되도록 그냥 놔 두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경전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고 말입니다. 남에게 빚을 지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갚아야 된다고 나옵니다. 여유가 있으면 돈으로 갚고 그럴 능력이 못되면 송아지로 와서라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빚진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이 뭔가 자꾸 밀리는 것 같고, 공연히 눈치가 보이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퇴직금을 날려버리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수십년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공짜도 바라게 되고 뇌물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결코 공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신 퇴직금이 날아가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송아지도 도살장에 안 들어 갈려고 떼를 쓰다가 자기가 빚을 진 주인이 야단을 치면 죽을 길도 마지못해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공짜 좋아하다 보면 마지막에 퇴직금을 날려 빚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갚을 능력이 안되면 다음 생에 소로 오고 돼지로 와서, 살을 먹히고 가죽을 바쳐 그 빚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큰 절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교구본사 같이 큰 절에는 절에 딸린 논밭이 많습니다. 그 논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깁니다. 지금은 먹고 살기가 좋아졌으니까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소작인들이 가난해서 스님들에게 와서 송아지 한마리 살 돈을 빌려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송아지를 먹여 키워서 새끼를 치면 그 송아지를 절 송아지라면서 빌린 돈대신 갚아줍니다.
그런데 가끔 소가 죽은 송아지를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산(死産)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죽어서 나오는 송아지도 그 송아지는 스님네 송아지니까, 그 소작인들이 스님들께 와서 상의를 합니다.
"스님, 그 죽은 송아지 우리들 주세요. 우리들이 잡아먹을께요" 그러면 스님네들이 그렇게 하라고 쉽게 승락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야! 그 송아지녀석 전생에 복 많이 지었구만" 이러십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까지 자기몸을 몸보시하니 그만큼 빚을 갚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희한한 것은 사산이 돼서 나오는 송아지라도 동네사람이 달라고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큰 스님들이 "저 송아지녀석은 전생에 복도 못 지었구나!" 하시면서 행자스님을 시켜서 "저 송아지를 땅 파서 묻은 다음 그 위에다 과실수를 심도록 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 몸이 거름이 되어 과일나무를 충실히 키움으로써 복을 짓게 하라는 것입니다.
`송아지가 썩어서 과일을 열게 하고, 그 과일을 사람이 먹게해서 송아지 복을 지어준다.'
옛날엔 그런 말을 들을 때 그 논리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부처님 말씀 공부하면서 많은 분들을 대하고 살다보니 그게 다 일리 있는 말씀들로 느껴지는 바가 많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빚진 기분이 들 때 점심 한 끼 사주면 당당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입니다. 우리가 대중공양이니 무주상보시니 하는 것도 다 같은 이치로, 그 보시의 기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허공에 뜨 는것입니다. 생일날 생일불공을 해서 떡 한 조각씩을 나눠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고, 또 옛날부터 신랑이 먼 길을 떠나면 꼭 밥 한 그릇씩을 이불속에 묻어두어 그 기운 때문에 집 떠난 사람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돌아가신 분들 3년동안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아이들 돌이나 생일에 떡을 해서 한 조각씩 돌리는 것도 다 공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건 과거에 어떤 형태로건 남에게 베풀었던 것이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둬야 공덕의 열매가 열리게 되는 법입니다.
떡 한조각 밥 한그릇을 공양하는 공덕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래풍속 같은 것을 보면 무슨 때가 되면 떡 하고 음식 차리고 해서 밥 한끼라도 나눠 먹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음식을 주고 받는 가운데 은연중에 서로가 잘 해주고 싶은 마음 생기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우호적인 연관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우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고사를 지내거나 생일같은 날 떡돌리고 밥 한그릇 나눠 먹으면 그만큼 좋은 기운이 허공에 뜹니다. 그런 공덕을 짓는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은 복업이 수승한 아들입니다. 고사 때나 개업식날 떡을 만들어 돌리는 공덕이 다른 데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가능한한 상대방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꾸만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부처님 경에 나옵니다. 천명의 도둑을 먹이는 것보다 한 사람의 착한 사람을 먹이는 공덕이 더 크고, 천명의 착한 사람보다 한 사람의 수행자를, 천명의 수행자 보다 한명의 아라한을, 천명의 아라한보다 한 분의 부처님을 공양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속엔 무서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도둑들 백명 천명 먹여봤자 그들은 또 다시 악도에 갈텐데, 내생 어느 세월에 그들에게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언제인가는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나 도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워주게 되면 그 빚을 받기도 쉽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등급이 높아 내생에는 재상이나 왕후장상으로 태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은 수행도인이 아니고서는 재상이나 왕후로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지요. 보살의 급수가 높아야 왕후로라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이치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총사령관과 인연을 짓는게 나을까요? 졸병과 인연을 짓는게 나을까요? 공덕론이란 철두철미하게 그 속에 계량을 깔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결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은 바에 따라 사람의 급수가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낱낱이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자손들을 위해서 생일날 꾸준히 생일불공을 해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아들 딸손자들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보세요. 축원을 하며 마음을 발하는 순간 허공계 신장님들이 다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기도를 붙이는 순간, 여러분들의 정성이 공중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강렬한 파장이 떠서 허공계에 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가지 미풍양속 안에도 그런 무서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공덕을 지어주는 것도 다 그 의미가 수승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허공으로 쏘아 올린 그 파장은 절대로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잘 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전생의 사연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명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명대사가 두 제자를 데리고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한곳을 가다보니 큰 구렁이의 뼈다귀가 다 삭아서 산 중턱에 걸쳐져 있는 걸 보고 사명대사께서 첫번째 제자한테 땅을 파서 그 구렁이의 뼈를 묻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는 "아휴 스님!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구렁이뼈를 뭣하러 묻어줘요?"라면서 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제자에게 다시 시켜 그 뼈를 묻어 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행은 다시 길을떠나 언덕을 넘다가 배첨지네 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가 그때 문득 절에 양식이 떨어진 것이 생각났습니다. 배첨지에게 가서 양식을 좀 얻어오도록 첫째 제자를 보냈습니다. 첫째 제자가 배첨지에게 가서 절에 양식 떨어져서 왔노라고 했더니 다른 때는 무엇이든 잘 주고 하던 배첨지가 그날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쳐서 쫓아 내더랍니다.
야단만 실컷 맞고 돌아 왔노라고 사명대사에게 고했더니 그럼 둘째가 가보라며 두번째 제자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째에게는 이유도 없이 야단을 치던 배첨지가 둘째 제자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접을 하면서 쌀 한자루를 주더랍니다.
하도 이상해서 첫째 제자가 투덜대며 대사님께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랍니다. "그래, 참 이상스럽지. 그렇지만 알고 보면 별로 이상할 게 없단다. 우리가 저 능선을 오를 때 묻어 주었던 그 구렁이 뼈는 전생에 배첨지란다. 그 구렁이가 사람으로 다시 와서 지금의 배첨지가 된 것이지. 전생에 쓰던 자기의 뼈를 정성스럽게 묻어 주니까 그 기운이 하늘에 떠서 배첨지의 마음에 닿은 거란다.
첫째, 너는 미물중생에게도 다 불성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구렁이 뼈라고 몰인정하게 무시하니까 배첨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너를 무시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뼈를 정성스럽게 묻어 준 공덕의 마음이 허공에 떠 있다가 모아져서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배첨지에게 전달되어 그렇게 잘 대해준 것이란다. 이 우주에는 정성스러운 마음의 흐름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다"라고 하셨답니다.
사명대사의 이야기와 같이 여러분들도 살아가시다가 상대방이 이유없이 소리치며 야단을 칠 때는 "아, 내가 과거에 그에게 뭔가 몰인정하게 대한 적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시고, 말 한마디라도 상냥하게 건네서 과거의 빚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유없이 남에게 구설을 듣고, 자주 다투게 되고, 질타를 당하는 것도 과거의 어느 생에서 좋지 못한 일을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허공에 우리 마음의 염파가 발사되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KBS나 MBC에서 나오는 전파는 물질파여서 언젠가는 힘이 약해 사라지겠지만, 이 마음의 염파는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떠도는 것입니다. 염파를 방송하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한대한 우주와 통하는 채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파장이 허공에 뜨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사를 지내고 고사를 지내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은 정말 엄청난 슬기의 소산이라 하겠습니다.
탐`진`치, 탐심(貪心)과 진심( 心)과 치심(痴心)을 가지고 나의 욕심만 차리는 마음은 부처님의 정도(正道)에 어그러지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한생만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위해서 일하고 항상 남들 앞에 밝고 맑은 인상을 보여 주면 언제 어느 생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는 남의 우두머리가 되어 남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대장이 되려면 대장의 기질을 기르고 그릇을 키우라고 화엄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언가 좋은 얼굴로 미소를 띄우며 좋은 일을 자꾸 하다 보면 내생에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호감을 갖게하는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들이 가정법회니 기도재일 같은 날 자꾸 모이고 만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생에 다시 어디서 무엇이 되더라도 만나게 될테니까요. 가능한 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고 만나면 그것이 모두 또 다시 어디서 만나게 되는 인연자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인선원에 와서 자꾸 부처님 공부하고 영혼의 등급을 높여 나가다 보면 내생에는 분명히, 적어도 최하위로 떨어진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처님 경에도 나옵니다. 영혼의 승화와 향상을 통해 내생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은 법문 중에 만난 사람들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에 있는 중생들은 모두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밑바탕에 깔고 만나니까 그런 중생들하고는 내생을 기약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도 법의 문중은 세속보다는 욕심이 덜한 사회 아닙니까? 자주 모이고 만나서 마음의 등급을 높이고 복력도 짓는 그런 불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제자중에 아사지란 제자가 있었습니다. 아사지[馬勝]비구가 어느 날 사위성을 걸으면서 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그가 걸식하는 구역은 사리불존자와 마하목건련의 집을 돌아서 오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이 자기집에 와서 걸식을 하는 승려를 보니까 그 행동거지가 매우 맑고 밝았습니다.
사리불이 그를 불러서 "수행자여! 자네가 우리집을 드나든지가 여러차례 되었는데 내가 눈여겨 보니 자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법에 맞고 정확하고 존중할만하다. 자네의 스승은 누구인가?"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사지가 대답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고오타마 시다르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고행문 속에 들어가 깨달음을 여신 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인연의 법칙을 통해서 우주를 깨달으신 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 말을 들은 사리불 존자가 감복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사지가 있는 동쪽으로 발을 두지 않았답니다. 자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를 부처님의 문중으로 이끌어 준 스승격인 아사지가 고마우신 분이라 해서 그가 있는 쪽으로 꼭 머리를 두고 일생동안 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절 바르고 수행자다운 아사지란 비구 한 사람의 자세가 지혜제일 신통제일의 수보리와 목련존자를 함락시킨 것입니다.
우리 능인선원도 앞으로 5년이고 10년이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우리 보살님 중에서도 마음이 닦이고, 마음의 문이 열려져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남에게 아사지와 같은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 여러분 나오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만인 속을 걸어다니는 법당이 되는 거지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다 교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한분이 나오셔서 이 우주를 다 뒤덮으셨는데,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경지까지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아사지의 마음을 키워가면, 모두가 머지 않아 아사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사지가 되려는 사람은 베푸는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남에게 호떡 하나라도 주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호떡을 줄 수 없는 처지라면 그를 위해 관세음보살 한마디하는 마음, 기도라도 한번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흔히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해 줄께'합니다.
그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말 그대로 실천된다면 기도해 주는 사람의 힘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변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새벽기도와 백일기도도 계속하면 그 원력이 결코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아속단탐진치', 이생에서 탐`진`치, 삼독심을 끊어 버리십시오. 나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그런 생각을 고쳐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내생을 기약받을 수 없습니다. 법문중에 들어오는 사람 외에는 이런 마음을 끊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 중에 들어와 만난 사람들만이 내생을 기약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항상 부처님 말씀을 잘 듣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복되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선조들로부터 쌓아온 공덕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팔자 반팔자'란 말이 있는데, 사실은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자기의 공덕입니다.
아이들 가운데도 복을 짓고 나오는 아이가 있고 복이 없는 아이도 있다고들 합니다. 똑같은 부모의 배속에서 세아이가 나왔는데 첫째 아들녀석은 장가갈 적에 아버지가 잘 살던 때라 한밑천 단단히 보태 줬는데, 둘째 녀석에게는 사업이 크게 기울어져서 냄비 하나도 제대로 못해 줬습니다. 그런데 또 사업이 슬슬 일어나 세번째 딸 시집갈 때는 해주고 싶은대로 다 해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자기복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란 다 그렇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공덕을 많이 지어 주세요. 또 남편과 아이들 뿐만 아니라 자기 공덕도 열심히 지으시고요. 흔히 보살님들은 남편과 아이들 생일은 잘 찾아주는데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자기 생일에도 부처님께 공양을 하세요. 그것도 다 공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일전(一錢)이 만전(萬錢)이 되어 다 자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씨를 뿌려놓으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백개 천개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가르침을 따르려면 제일 먼저 법문을 들어서 깨우쳐야 됩니다. 문`사`수(聞`思`修)라 했습니다. 불`법`승을 받들어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 공부하는 건 굉장히 영광스럽고 자부심이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무슨 종교를 믿으세요?"하고 물으면 대답을 잘 안 합니다. 다시 물으면 무슨 죄인처럼 마지못해서 모기만한 소리로 "절에 다녀요"그럽니다. 그것은 절에 다니는 자기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데 대한 어떤 근본적이고 튼튼한 관(觀)이 서 있질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투철한 신심이 서 있질 않으니까 그렇게 행동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절에 다녀도 남들이 하는 대로 향이나 켜놓고 옥수나 올리고 그렇게다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는 흉내나 내면서 속칭 나이롱(?)으로 복이나 빌러 다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초상날소가 고삐가 풀려 마당을 왔다 갔다 하자 아들이 소를 끌어다 대들보에다 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손주가 그 광경을 보고 `아, 사람이 돌아가시면 저렇게 하는가 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얼른 외양간으로 들어가서 소부터 끌고 나와 대들보에 묶더라는 것입니다.
절에 흘러다니는 이야기들이 대개 다 이런 식입니다. "이런 건 틀렸어, 저렇게 해야돼"하면서 한 스님들이 올바르게 해 놓으면, 다른 스님은 틀렸다고 합니다. 절집에 와서 보살님들이 하는 의식이 무지몽매하고 미신처럼 보이니까, 며느리들이 자기 시어머니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절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나이 젊은 보살들이 절에 갔다가 놀란만도 하지요. 절을 해도 앞뒤 사람 쳐다보지도 않고 마구하다 보니 부딪치기 예사고, 그러다 보니 걸핏하면 싸웁니다. 가만히 보고있으면 참 가관입니다. 그런 중생들을 모아 놓고 법회를 하다보면 어느 사이에 한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하니, 어느 세월에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달이라도 계속해서 불러낼 수만 있다면 무언가 한줄거리를 가르칠텐데, 일요일에도 가뭄에 콩 나듯 왔다 갔다 하니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능인불교학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뜻밖에 큰 효과를 거두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교육이 참으로 무서운 효과를 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定慧)', 부처님 말씀은 듣는 것만으로 끝을 내서는 곤란합니다. 불교는 듣고 끝내는 종교가 아니라, 닦는데 의의가 있는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를 빼고 빛[光]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우선 첫째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 계심(戒心)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선정삼매의 경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마음 가운데 혜심(慧心)이 열립니다.
예불문 강의 때 계(戒)의 중요성에 대해 낱낱이 말씀드렸습니다만, 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계란 부처님되는 길이며 부처님 세계로 올라가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을 통해 부처님으로의 길이 열려옵니다. 진정 불자들은 참된 마음으로 계의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신도5계라든가 보살계 등은 불자의 첫걸음인 동시에 무한 번창의 길이요, 무량복덕의 길이기도 합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은 자신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강한 힘이 배양됩니다.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림이 없는 경계가 열립니다. 이른바 정(定)의 경계라 하겠습니다.
선정삼매(禪定三昧)의 경계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에 해당하는 경계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한없는 지혜의 바다입니다. 지혜의 세계는 조화롭고 장엄된 세계이며, 무량한 복락의 세계입니다. 지혜는 광명이요, 무지(無智)는 무명입니다. 어두움 가득한 칠흑의 밤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롭고 위험하겠습니까? 찬연한 광명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모든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지혜의 중요성에대해 부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불교는 지혜의 종교가 아닌가요?
우리 모든 불자들이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되는 것은 바로 계`정`혜의 삼학(三學)입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戒)를 가리켜 몸과 입과 생각으로 범하는 나쁜 짓을 경계하는 내용이라 한다면, 정(定)은 산만한 마음을 다스려 부처님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요, 혜(慧)란 무명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실천 방면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세가지가 서로 도와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또 불경을 분류하여 율장(律藏)을 계학, 경장(經藏)을 정학, 논장(論藏)을 혜학으로 얘기하기도 합니다.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발원하는 내용입니다. 수(隨)란 수행원이라 쓸 때의 수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받들고 따라가는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마음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자신들이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믿는다 하면서 부처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저 한달에 한번, 일년에 한번 절에 나올 때만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단 한순간도 부처님을 잊어서는 참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잊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악과 결부시키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광명이시라, 부처님을 잊는다는 것은 곧 암흑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인 8만4천대장경을 마음 가운데서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가운데 광명의 세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불자들은 물론, 스님들도 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힘듭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며 정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교육이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점은 한 둘이 아닙니다.
종교의 당위적 존재이유, 불교의 존립 근거는 중생의 제도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나는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들의 교화를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화란 바로 교육의 개념입니다. 부처님께서 8만4천대장경의 장광설을 펼치신 것도 모두 중생들의 제도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고 또 배워야만 합니다. 스님을 가리켜 스승님의 준말이라 하지 않습니까? 또 스님을 가리켜 법사(法師)라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르침에 가장 큰 의미를 둔 내용들입니다.
진정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을 마음 가운데 놓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불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영원의 길,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영원의 길, 성불의 길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운데서 열려오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금강경 가운데 한귀절 만이라도 스스로 깨우치고 남을 위해 전달하는 공덕은 항하사 만큼의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도 낫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를 전달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다고 강조하신 것은 부처님께서 불법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공덕을 얼마나 중요시 하셨는지 거듭 생각케하는 대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따라 배우는 길, 그 길만이 우리들의 숙명인 것입니다.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위대한 인간들의 일생은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물러남이 없는 투지의 화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위에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수확의 기쁨은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고통 끝에 낙(樂)'이라고 하듯,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는 결코 즐거움의 시간이 도래할 수 없다는 철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과 쓰라림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위대한 인간들의 삶은 불퇴전(不退轉)의 마음으로 한길로 꿋꿋하게 나간 삶입니다.
그들은 초지일관(初志一貫)의 탱크였습니다. 영원한 성불의 문을 열어가려는 모든 불자들은 이같은 마음을 견지해야만 합니다. 물러남이 없는 마음, 그 마음은 모두 위대한 구도자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억겁을 두고 닦아오시면서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견지하셨기에 결국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 역시 "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라" 이셨습니다. "가시밭길이 있으리라, 아픔과 쓰라림의 능선도 있으리라, 그러나 결코 굴치 말고 나아가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서도 수행자들이 갖춰야 할 기본덕목으로 불퇴전(不退轉)의 경계, 물러남이 없는 경계를 참으로 중요시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 되는 법이 없습니다. 고통이 닥쳐올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십시요. `아! 이 고통은 부처님께서 나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시기 위한 배려이시구나'하고 말입니다.
작은 고통은 작은 즐거움을 가져오고, 큰 고통은 큰 즐거움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다만 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고통은 모두 즐거움과 낙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고통을 희롱할 줄 아는 사람, 역경을 유희로 아는 사람만이 위대한 성공자의 대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성불에의 길은 물러남이 없는 마음, 어떠한 고통도 극복해내는 의지에의 화신들이 걷는 길입니다. 고통 끝에 낙(樂)이 오듯이, 위대한 고통 끝에는 위대한 즐거움이 오는 법입니다.
성불의 의지를 돈독히 세우고, 보리도를 증득하려는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부처님의 세계는 열려옵니다. 보리심이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이요, 성불의 마음입니다.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 Sam Myak Sam Bodhi)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준말입니다. 결코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의지가 모든 불자들에게 절대절명으로 요구되는 요즈음입니다.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끊임없이 갈고 닦아나가는 불퇴전의 자세는 결국 영원한 안락의 세계를 약속합니다. 작은 고통을 이기면 작은 즐거움이 오고, 큰고통을 이기면 큰 즐거움이 옵니다.
무한한 즐거움의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 부릅니다. 모든 고통과 번뇌가 녹아진 자리는 진실로 무한한 즐거움의 자리이고 열반의 경계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결국 그와 같은 경계에 나아갑니다.
안양(安養)이란 말은 극락국토의 별호입니다. 극락세계는 문자 그대로 지고(至高)의 복락세계입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극한 수행을 하는 이유는 마음 가운데 무한 번뇌와 고통을 녹여 내려 마음에 한없는 복락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입니다.
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번뇌를 극복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 속에 한없는 평화와 안락의 경계가 열려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끊임없는 수행 가운데 우리들은 물질의 세계에 대한 각양각색의 속박을 이겨내게 되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극락에 갈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어가는 비결은 한없는 수행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끊임없는 수행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결정코 극락에 나게 될 것입니다.
극락에 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수행의 과보로 받아들입니다. 극락에 나게 될 경우 부처를 보장받게 된다는 가르침이 경전에 나옵니다. 극락에는 언제나 법문이 울려퍼지고 있어, 무량한 극락의 주인들이 그 법문을 듣고 성불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없다 합니다.
이 우주 광대무변한 세계는 화엄경의 가르침대로 무량중생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리듯, 중생의 업(業)이 다르기에 사는 별[星]도 다 다릅니다.
이 우주의 무량한 다양성은 중생들이 짓는 업의 다양성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경전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근면성실하게 삶을 엮어 나간다면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이고 좋은 환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무량한 별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별들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배정되는 업력의 세계입니다. 그들 중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보의 결과인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입니다. 마음의 극락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의 아미타란 말은 원래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의 뜻입니다. 진리는 광명이라, 진리답게 산 사람은 광명의 존재와 같다고 해서 그들이 사는 세계를 극락, 아미타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무명(無明)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진리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무명중생이라 부릅니다.
극락세계는 문자 그대로 진리따라 사는 사람, 진리를 생활화하는 사람들만이 가는 곳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무량한 복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부처님법 만나기가 대단히 어렵다하는데 직접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량복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도 훌륭한 선생을 만날 때 참으로 흥겨운 마음이 되어집니다. 선생을 잘 만나서 어렵고 힘겹던 과목을 쉽게 깨치게 되고 흥미를 갖게됨을 우리는 학창시절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도 크나큰 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신 부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요? 문자 그대로 무량한 영광과 무량한 복덕을 가져올 것입니다. 성불의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한 복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쪽집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선생님들을 만나자면 많은 액수의 수고료를 드려야만 하듯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려면 그만한 공덕을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대통령을 만나면 일을 쉽게 풀 수 있듯이, 부처님을 만나면 모든 일은 쉽게 풀리는 법입니다. 기도 역시 부처님을 만나는 성스러운 행위이기에 기도 가운데 모든 일이 순조로이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미타부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불의 대도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왕을 한 번 만나기 위해 많은 단계를 거치고 통과해야 되는 것처럼,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의 단계를 거치고 그를 통과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공덕과 많은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쌓아야만 하는 고행과 수행은 참으로 헌신적인 것이 아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이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노라면 갖가지 어려운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때 마다 내 마음 같이 함께 일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같은 사람, 즉 분신(分身)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곳곳마다에 나의 분신들이 있다면 참으로 모든 일은 순조로이 풀려나갈 것입니다.
분신변진찰의 의미는 나의 분신들이 우주 곳곳마다에 함께 하여지이다의 뜻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누구든 나의 분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진리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를 만들수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진리와 하나된 사람은 우주와 하나된 사람이고, 이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인 분신들이 될 것입니다.
우주 곳곳마다에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같은 사람은 부처의 분신이며, 부처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나의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불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며, 여래와 하나된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물질세계에 대한 모든 번뇌를 이긴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큰 뜻을 지닌 사람은 이와 같은 `분신변진찰'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합니다. 좋은 친구를 원하는 사람, 탁월한 분신들을 주변에 포진시키려는 사람은 마음을 비워야만 합니다. 특히 여래가 되겠노라는 큰 뜻을 세운 사람들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이기심과 탐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한계는 장벽이요, 스스로의 발전을 차단하는 마음입니다.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의 마음은 바로 모든 물질적 번뇌를 이긴 자의 마음입니다. 그같은 마음 가운데 무한자비의 마음이 열립니다.
천수경의 앞부분에 나오듯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입니다. 우주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모두를 나의 분신으로 만들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무위심(無爲心)의 사람입니다. 대자대비심의 사람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이 땅 위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나의 분신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분신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道諸衆生)' 여래의 발원 속에 사는 사람들의 유일무이한 소망은 중생제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有情衆生)들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이 되라 강조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존재들을 가리켜 대승보살이라 부릅니다.
참으로 세상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의 포로가 되어 헤어날 길을 모릅니다. 그것은 세속중생들 뿐만 아니라 출가수행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출가 수행자들도 머리만 깎았지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전혀 보살심이 아닙니다.
그저 절뺏기 싸움, 주지싸움에 날을 지새는 스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같은 마음은 `광도제중생'의 마음이 아닙니다.`광도제중생'의 마음은 나를 버려 남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여래십대발원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말로 `광도제중생', 널리 뭇 중생을 제도하리란 마음을 낸 사람입니다.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여러분들의 따뜻한 손길을 원합니다.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생활하기가 궁핍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이 멀고 마음의 귀가 멀어 무엇이 바르고 참된 삶인지를 전혀 모르는 채,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의 등불을 밝혀야만 합니다. 어둡고 괴로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의 말씀을 심어 주어야만 합니다.
금강경의 한 귀절처럼 제도한다는 생각도 없이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지닌 참 보살들이 이 땅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참으로 20세기 말 현대 이 땅 이 시대는 어렵고 힘겨운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고, 애욕과 관능의 포로가 되어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 시대 이 땅 위에 부처님의 말씀을 펼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고치고 치료해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광도제중생', 이는 부처님의 원대한 뜻이요, 우리들 모두의 삶의 지표이어야만 합니다. 진리에 미혹하고 깊은 어둠속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제도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일이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과제입니다.
여래십대발원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지막 가르침은 바로 `광도제중생'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불법을 공부하고 깨우친 불자로서 우리들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진지한 자세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광도제중생'입니다.
(지광스님 著 '無限! 그하나로의 길 "천수경"중에서, 이재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