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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4장26~34절
제목 : 은밀하게 위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 예수님은 “네 가지 밭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하고, 뿌려진 씨인 말씀과 말씀을 들은 자의 반응인 밭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열매를 맺는 땅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등불과 등경”의 비유를 통해 모든 것은 다 들어나며, 헤아림을 받으며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오늘 말씀은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은밀히 자라나는 씨의 비유를 통해 말씀이 지닌 힘과 영향력,
그리고 은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작지만 크게 자라는 겨자씨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 속에서 위대하게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고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1.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26~29절)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1)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26절)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되는데 본 비유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3-8절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는 다릅니다.
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의 성장에 좋은 토질과 풍성한 수확이 강조되었으나, 본 비유에서는 은밀히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편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즉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비유'등 입니다.
공통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씨앗을 소재로 택하여 인간의 시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그 역동적 활동력으로 인해 조용히, 점진적으로 성장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현재적이고 영적이라는 데 본 비유의 주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되고 성장합니다(Donald W. Burdick).
2)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랍니다(27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성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알맞은 장소에 씨를 뿌리는 일 뿐입니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등의 일은 부차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게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땅과 비와 공기와 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점입니다(고전 3:6).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둘째, 씨뿌린 농부가 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 원인적 이유나 과정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씨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자연의 생명력과 내밀한 성장 과정은,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계속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 성장 과정은 신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그 과정이 신비한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원인적 힘을 발견하지 못한 다고 하여도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確信)을 가져야 합니다(15:43).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3)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28절)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 여기서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가 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땅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기보다 그 땅과 생명 있는 씨앗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을 암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땅이 스스로'란 표현은 곧 농부의 힘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아우토마테)란 '자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열매 맺는 것은 농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땅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26절에서 씨 뿌리는 자를 '사람'(안드로포스)이라고 밝힌 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 힘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인간에 의해 김을 매거나 경작하는 일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씨앗을 결실케 하는 결정적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같은 점을 구원의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입니다(엡 2:8).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요 6:28, 29; 히11:6;요일 3:23).
*요6:28,29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법칙처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도 천국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미완성 단계의 과정, 즉 '싹'이나 '이삭'은 '충실한 열매'가 되기 위한 가능태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가능태를 관찰 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나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J. Jeremias)는 말하기를,
'열매는 씨의 결과이다. 즉 마지막이 처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이미 무한하게 작은 것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은(11절) 이미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본다'(The parables of Jesus,pp152-153)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본문의 이러한 비유는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던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합니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불신앙적 사람들에게 이 교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철두철미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창 18:14;신 10:17; 시 24:8;눅 1:49).
*창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시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눅1: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4)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29절)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이 구절은 욜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엘3: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여기서 '익으면'(파라도)은 제2단순 과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해석입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28절)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 열매'와 같이 긍정적인 완성에 대한 그림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씨 뿌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기대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곡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모호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Cranfield).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면서 현재적 과정입니다.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입니다(잠25:13;렘 5:24;51:33;욜 3:13;마 3:12;13:30;눅 3:17;계14:14-16).
특별히 여기서 '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농부가(27절) 추수의 시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요4:38)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합니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한 환유적(換喩的) 표현입니다.
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의 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추수의 주체자는 하나님입니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2. 겨자씨 비유(30~32절)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1)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30절)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됩니다.
주제는 앞에 나오는 비유에 이어 계속 하나님 나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입니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첨가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합니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사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달리 어떻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합니다.
2)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31절)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 '사람이 땅에 심는 가장 작은 씨앗'(the smallest seed you plant in the ground)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 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이 같은 표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미미함은 능력 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 미래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겨자씨는 작은 씨의 대명사지만, 새들이 깃들 만큼 놀랍게 자라납니다(32절)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풀보다 커지며',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각 사용합니다.
여기서 '모든 풀'을 공동번역에는 '어떤 푸성귀'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봅니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푸성귀)이지만, 그 키가 3-4m(심어어 7m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함)까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Donad W. Burdick)가히 '나무'라 봄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놓는 것입니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가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26-29절) 지금은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완성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입니다(29절).
따라서 천국을 대망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Nineham),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욥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마 13:31).
*마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가 사단의 대리인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해석이라 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이방인
들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카타스케눈)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깃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입니다.
3.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33~34절)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1) 예수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33절)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 방법 중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즉 비유(parable)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쉽게 또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4절)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1)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2)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합니다.
다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앞에서 가르친 여러 가지의 비유들은 일반 청중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비유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13,33절 주석 참조).
사실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들 조차로 예수님의 거듭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습니다.
사실 본문의 '해석하시 더라'(에페뤼엔)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33절) 진지하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습니다(3, 9, 23절 주석 참조).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십자가 처형에 침묵으로써 간접 동조했던 것입니다(114:50).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로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잘못입니다.
이것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3-20절).
말씀을 맺겠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자라 12명의 제자로, 120명으로 세계 각처로 모래알처럼 많아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 생명과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 나라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수 많은 아름다운 별들 중에 하나임을 믿으십니까?
아주 작은 씨가 자라 새들이 깃든 나무가 될 때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확장되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주인공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명에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 둘 중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지금은 왕성해 보이나 결국은 쇄약해질 이 세상에 발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은 비록 약하고 미약해 보이나 후에는 공중에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랄 하나님 나라에 헌신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우리는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안다면 고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자라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이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라는 과정에 우리가 쓰임 받기를 소망합시다.
하나님 나라를 꿈 꿉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끝까지 나의 신앙를 포기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복된 우리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쳐주십니다(33,34절)
무리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비유의 의미를 깨닫길 원하는 제자들에게는 반복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말씀을 추구하는 자들을 진리로 이끄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께 지혜를 구하고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씨를 뿌린 농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26~29절).
아무리 열심히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물줄기를 끌어서 물을 주어도 농부에게는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결실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알아차릴 수도 어렵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고, 한꺼번에 많은 열매가 없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탁월한 설교와 열정과 전략이 결실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믿음과 인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이 열매 맺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십시오.
2) 겨자씨는 작은 씨의 대명사지만, 새들이 깃들 만큼 놀랍게 자라납니다(30~32절).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큰 제국의 모습에 비유하시고 이방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될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 한국 교회의 모습이 세상 앞에서 너무 미약하고 보잘것 없어도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계속해서 자라고 있으며,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