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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선(姜進善)
출신지: 경북 청송
훈격: 애국장(1991)
운동계열: 의병
강진선(姜進善) 미상~1908. 4. 24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907년 8월에 안동 진위대(安東 鎭衛隊)에서 하사로 활약하다가 진위대가 해산되자 부하 200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안동・진보(眞寶)・청송・의성(義城) 일대에서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후 1908년 4월 24일 대구(大邱)에서 일경에게 피체되어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542.
註・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89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輯 577面
이름: 강진여(姜辰汝)
출신지
훈격: 애국장(1995)
운동계열: 의병
강 진 여(姜辰汝) 미상~1908. 4. 18
문태익(文泰翼) 의진의 부장으로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강제 체결하면서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거족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과 교육부문에 의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의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강진여는 이같은 시기에 문태익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문태익 의진의 부장(副將)을 맡았던 그는 1908년 4월 전북 장수(長水)를 습격하고, 무주(茂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18일 전북 황산(黃山)에서 군자금 3,100냥을 징수하던 중,신종삼의 밀고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경남 거창(居昌)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 본부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44.
註・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0輯 275面
이름: 강진원(姜震遠)
출신지: 전남 승주
훈격: 독립장(1977)
운동계열: 의병
강진원(姜震遠) 1881. 7. 30~1911. 7. 19 호:성산(聖山) 자:정원(亭遠) 이명:강진원(姜振遠)
강진원은 전라남도 승주(昇州)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불행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라면서도 일찍부터 서당에 나아가 구학문을 수학하였으며 26살 때에는 자신이 직접 서당을 열어 구국항쟁에 투신할 때까지 후학(後學)양성에 헌신하였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退位)되고 이어 군대도 강제 해산됨에 통분하여 각지에서 다투어 의병이 분기하자 이에 호응하여 창의의 기치를 들고자 결심한 뒤 제자를 키우던 생활을 청산하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들었다. 드디어 1908년 같은 고향의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 김화삼(金化三), 권덕윤(權德允), 김병학(金炳學) 및 곡성의 김양화(金良化) 등과 더불어 결의하고 의병의 소모(召募), 무기구입, 적의 움직임에 관하여 밀의(密議)를 거듭하면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이어 창의계획을 구성하였다. 그해 6월에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승주군의 조계산(曹溪山)으로 나아가 유진(留陣)하면서 훈련하였으며, 7월에는 죽음을 맹세한 동지 33명이 이 의병진에 합세 가담하였다. 그후 보성・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규하(趙圭夏)와도 동맹하니 그 휘하의 의병군 40여 명이 다시 합류한 뒤 조규하와 작전전술을 숙의하였다. 1908년 8월 곡성군 석곡면의 조지촌(鳥枝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였는데 불행히도 조규하가 이 전투에서 전하였다. 이 후 목사동(木寺洞)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交戰)하였으며 8월 25일에는 곡성의 통명산(通明山)에다 진을 쳤다. 또한 9월 23일에 적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戰果)를 거두었고 10월 초에는 남해 장도(樟島)에서 전개된 해전(海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0월 5일 전남 고흥군 과역면(過驛面) 과역리 시장에서도 일본군과 접전하여 적 수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그 달 9일에 여수 화양면 원포리(源浦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의병진을 수습한 뒤 승주군 쌍암지역으로 회군(回軍)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부하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지시하면서 자신도 승주곡성 및 화순 등지에서 산병전(散兵戰) 펼쳐 관내를 휩쓸면서 적을 교란시켜 격파하니 전라도 일대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듬해 1909년 1월부터 4월에 걸쳐 승주군 서정(西亭)병참소를 습격하는 등 많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나서 4월에 남원으로 의병진을 이끌고 진격하여 곡성부근 섬진강의 지류인 압록강(鴨綠江)에서 적군 병참소를 습격하였다. 4월 말에 곡성의 서순일(徐淳一)의병부대가 이에 합류하니 총 240명 정도의 병력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어 5월에 석곡(石谷)의 일본군 병참소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월 11일 강진원 의병진이 승주군 서면 당천리(堂天里)의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노숙하던 중 일본군의 앞잡이 김원학(金源學)이 인솔하던 구례군 헌병대의 기습을 받게되어 참패하고 퇴각하였다. 그런데 1909년 일제의 의병초토화작전으로 인해 많은 의병항쟁이 중과부적으로 쇠퇴됨에 따라 강진원의 의병진도 6월의 패전이후 활동하지 못하다가 그해 말경에 해산된 듯하다. 즉 강진원은 1909년 8월 중순 남해의 통영 연내도(蓮內島)로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두모리 오성산(五聖山) 외딴 동굴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자결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卷,國家報勳處, 1986年, pp.442~443.
註ㆍ取能錄(姜震遠記)
ㆍ陣中日記
ㆍ姜震遠義兵將略傳(民族文化協會)
이름: 강진해(姜鎭海)
출신지: 함남 단천
훈격: 독립장(1995)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강진해(姜鎭海) 1896~1933. 9 이명:포해(捕海)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6년에는 정의부(正義府)에서 남만주의 서란총관(敍蘭總管)으로 활동하였다. 강진해가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호(金虎)・윤덕보・승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강진해가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吉林)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盤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 또는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김창환(金昌煥), 그리고 오동진 등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이형(鄭伊衡)・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奉)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강진해가 활동한 정의부의 군대활동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선전공작, 주구 암살, 일본 관리의 사살, 적기관 방화공작 등이었다. 한편 정의부는 부내의 모든 장정에 대하여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상비군으로서는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를 두었고, 1927년에는 7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과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립하여 모든 장정과 재향군인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정의부에서 활동하던 강진해는 북만주지역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30년 7월에 중동선(中東線) 철도 동부선(東部線)의 연변인 위하현가(葦河縣街)에 위치한 김광택(金光澤)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이 때 참가한 인물로는 생육사(生育社)의 홍진(洪震)・이청천・황학수(黃學秀)・이장녕(李章寧)・신숙(申肅), 한족총연합회의 정신(鄭信)・민무(閔武)・남대관(南大觀), 동빈현주민회(同賓縣住民會)의 박관해(朴觀海) 등을 들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당에서는 당의 군대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이청천과 신숙 등이 1931년 11월에 아성현 대길하(大吉河)에서 남대관・권수정(權秀貞) 등과 함께 결성한 것이다. 그리고 주요 간부를 임명하였는데 총사령관 이청천, 부사령관 남대관, 참모관 신숙, 재무 겸 외무장관 안야산(安也山), 의용군 훈련대장 이광운(李光雲), 의용군 중대장 오광선(吳光鮮), 의용군 소대장 이춘정(李春正), 암살대 대장 이우정(李禹正), 별동대 대장 한광빈(韓光彬), 헌병대 대장 배성운(裵成雲), 통신부장 겸 검사장 신원균(申元均), 구국군후원회장 권수정, 서기장 홍진, 선전대(先戰隊) 겸 결사대 장관 심중근(沈重根), 고문 겸 구국회 회장 서일봉(徐日鳳) 등이 그들이다. 강진해는 이 한국독립군에서 별동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청천・조경한(調擎韓) 등과 진퇴를 같이하면서 동경성(東京城)・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강진해는 1932년 오상현(五常縣) 사하자(沙河子)에서 열린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의에 따라 심만호(沈萬浩)・공진원(公鎭遠) 등과 함께 영안현(寧安縣)에 파견되어 중국 구국군(救國軍) 총사령 왕덕림(王德林)과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동년 7월경 구국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총사령관 왕덕림과 부사령관 공헌영(孔憲榮)이 중국국민정부에 구원을 청하러 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대리로 총사령 서리 제1사단장 오의성(吳義成)과 제14사장(師長) 채세영(蔡世榮) 등이 현상유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1933년 1월 13일에 오의성이 안도현(安圖縣)의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아 한국독립군은 잠정적으로 이 부대과 연합 전선을 추구하였다. 강진해는 1933년 9월 동녕현(東寧縣)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44~47.
註ㆍ武裝獨立運動秘史 175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77・422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629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115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7卷 708面
이름: 강찬영(姜贊永)
출신지: 경남 진양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찬영(姜贊永) 1865.12.12~1940. 8.13
경상남도 진양(晋陽) 사람이다.
1919년 3월 25일 문산면 소문리(文山面蘇文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제갑석(諸甲錫)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 수천매를 작성하여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야음을 이용하여 동리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 지역의 호응을 종용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1년 2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수형인명부(1971. 3. 8 진양군문산면장발행)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96면
이름: 강찬중(姜贊中)
출신지
훈격: 애국장(1991)
운동계열: 의병
강찬중(姜贊中) (1854)~1909. 10. 3
호남에서 기의하여 활약한 의병장으로 1909년 10월 3일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전남 봉덕(鳳德)에서 일군과 교전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542.
註・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103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651面
이름: 강창거(姜昌擧(良一)(金義連))
출신지: 제주도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창거(姜昌擧) 1910. 9.16~2004.11.17 이명:良一,金義連
1920년대 후반 제주농업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6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 일본인교사 야나기다 히코지[柳田彦二]의 한국인 차별 및 부당한 교육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전개하다가 퇴학당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재학 중 1927년 동맹휴교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일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과 부당성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과학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9년에는 학생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에 가입하는 한편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을 전개해 갔다.
1929년 7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모임을 갖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東亞日報(1926. 7. 18, 1932. 9. 13)
·中央高普生 取調狀況 및 學校狀況에 관한 件(京鍾警高秘제11029호의 30, 1927. 11. 16) 思想問題에 關한 調査書類 제3권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2. 7. 7)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10권 135면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10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권 986면
이름: 강창규(姜昌奎)
출신지: 제주도 서귀포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창규(姜昌奎) 1872.12. 2~미상
1918년 10월 제주도 중문면(中文面) 도순리(道順里, 현재 도순동) 법정사(法井寺)에서 주지 김연일(金蓮日)을 중심으로 신도 및 농민들과 함께 일본인관리 축출과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하였다. 이들은 일격에 서귀포를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진로를 바꾸어 중문경찰관주재소(中文警察官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봉기한 세력은 400여 명의 대규모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강정리(江汀里)·도순리 사이 대천(大川)의 서안 부근에서 전선 및 전주 2본을 절단하고 서귀포 중문리의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태우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궐석재판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았고, 4년의 도피 끝에 1922년 12월 28일 체포되어 징역 8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每日申報(1923. 2. 18)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23. 6. 29)
·刑事事件簿(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檢事分局)
·受刑人名簿(中文面)
·佛敎新聞(1951. 12. 11)
이름: 강창보(姜昌輔)
출신지: 제주도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창보(姜昌輔) 1902.12.29~1945. 1. 7
1920년대 초 서울에서 청년학관을 다닐 무렵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1924년 고향 제주로 내려가 사상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교육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제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신사상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1925년 4월 전국적 사회주의단체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에 참가하여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모순, 계급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운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에는 신인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청년동맹을 결성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 조직에 힘썼으며, 동년 8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제주도 야체이카 조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경기도 검찰부에 넘겨져 2년여 동안 구금되어 고초를 치르다가 1930년 12월 2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1월초 제주도로 돌아 온 그는 제주읍(濟州邑, 현재 제주시)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제주지역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갖으며, 조직원을 확보하고 사회주의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청년동맹(靑年同盟) 출신 신재홍(申才弘)·이익우(李益雨)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제주야체이카는 사회 각 부면의 청년·여성·노동자그룹 등 제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야체이카는 1931년 9월 세금불납운동, 강제묘목배포 반대투쟁 등을 지도했으며, 일제강점기 어업 노동자의 투쟁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인 1932년 1월 해녀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해 3월 일경에 체포된 그는 유치소에서 탈출한 후, 일본 오사카[大阪]로 피신하였다. 이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한 그는 1939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고,『朝鮮新聞』의 발간을 지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1943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1월 7일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22)
·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32. 10. 26)
·判決文(高等法院, 1944. 3. 27)
·東亞日報(1925. 3. 19·10. 1, 1932. 12. 14·12. 16·12. 25, 1933. 2. 8)
·朝鮮日報(1933. 2. 8)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1권 106∼107면
·現代史資料(姜德相, 1972) 제29권 93·137·142면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28면
·濟州抗日獨立運動史(濟州道, 1996) 54·210·212·214·217·219∼220·223·229·231∼271·369·373∼374·490·500∼521·596∼599·605∼608·611∼618·622∼624·717·947·1137면
·한국독립운동사사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제6권 321·323·326∼327면
이름: 강창원(姜昌元)
출신지: 황남 옹진
훈격: 애족장(2006)
운동계열: 3・1운동
강창원(姜昌元) 1866~미상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인 해주에서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선언서의 봉독식과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3월 말부터 옹진군 각 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4월 3일에는 가좌면(茄佐面) 취야리(翠野里) 취야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이 취야리는 옹진군 마산면(馬山面)과 장연군 모곡면(牡谷面) 방면에서 해주로 들어가는 큰 길이 모이는 곳으로서 교통이 번잡하고 시장이 번화한 곳 인데, 이날 취야장을 기회로 천도교인·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진행하던 만세운동 계획이 드디어 실현을 본 것이다.
강창원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이후 조선의 독립을 염원해오던 중,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된 것을 전해 듣고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이 날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6백여 명의 시위대는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여 수천 명으로 불어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가 해산하고 다수의 부상자와 피검자가 나왔다.
시위 후 체포된 강창원은 1919년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25)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577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233~2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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