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 총면적은 714km.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다.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특히 남섬은 다테라산
(龍良山559m), 아리아케산(有明山558m), 시라타케산(白嶽山519m) 등 온 섬이 숲으로 덮인 듯한
느낌을 준다.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 계곡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유사이래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한반도에서 물물교환하는 형태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다음 내용이 있다.
대마국은 구야(狗耶 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토지는 척박하고 산세는 험준하며, 깊은 숲
이 우거져 있다. 길은 매우 좁아 짐승이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다. 사람은 1000여 호가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그러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거둬 자활(自活)하고 있다. 식량은 선박을 이용
해 한반도의 해안에서 구하고 있다.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 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
(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 在文籍昭然可考)
부산 → 대마도 히다카쓰항(比田勝港) 페리호 오션플라워 .
히다카츠항
첫날 :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에보시다케전망대, 만제키바시
둘째날 : 다테라산 원시림, 시라다케산 원시림.
셋째날 : 아리야케산 원시림(강풍으로 중간 회귀)
*** 식생관련 자료는 별도로 올릴 예정으로 작업중.
대마도에서 첫번째 식사. 간단해도 넘~~~ 간단하다. 바꿔 달랄수도 없고.
미우다(三宇田)해수욕장 : 일본 아름다운 해안 100선에 들어가는 해수욕장. 해변 길이 : 240m
입자가 매우 미세한 하얀 모래사장을 자랑한다.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 : 조선 숙종 20년에 한천석 이하 108명의 역관들이
대마도 제 3대 영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5대 영주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오다가 풍랑에 전원 조난.
대마도 최북단 어촌 와니우라(鰐浦). 히토츠바다고(이팝나무) : 1928년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가미쓰시마마치(上對馬町) 와니우라에서 3,000여그루 이팝나무 축제가 개화기인 5월에 열린다)
멀리 부산항(해무로 보이진 않는다), 오른쪽은 일본 해군자위대 기지.
(임정현샘 사진에서 펌)
에보시타케(烏帽子岳) 전망대 : 까마귀가 모자를 쓴 형상으로 360˚ 탁트인 전망. 아소만이 한눈에.
우리나라처럼 해안이 복잡해서 굴곡진 리아스식해안을 따라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온 크고 작은 산
들이 서로 겹쳐져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아소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메고시마(女護島) : 해군함대를 통과시키기 위해 만든 마제키해협에서 바위와 토사가 대량으로
버려져 바다가 메워져서 생긴 만세키바시 옆의 섬.
돌지붕 :대마도에서만 볼 수있는 널판지 모양의 돌로 지붕을 얹은 창고.
만제키바시(萬歲橋) : 메이지 33년 함선이 항해할 수 있도록 만든 해협에 건설. 대마도 상도(上島)와
하도(下島)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조류의 조망 포인트로로 유명하다.
러일전쟁 당시 이곳까지 쳐들어 온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이곳에 숨어있다가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즈하라 시내
옆 사람 음식을 탐하지 말라.
일본내 대마도에서만 서식하는 산고양이(야마네코:추정개체수 80~100마리) 상표 소주(燒酎)
다테라산(龍良山559m) 원시림
(임정현샘 사진 펌)
별 차이가 없는 반찬으로 슬슬 거부감이 오는데. 다른 방법은 없다.ㅠㅠㅠ(옥화샘 사진 펌)
시라타케산(白嶽山 519m) 의 원시림 : 석영반암으로 산정상에서는 아소만의 절경과 대륙계/일본계
식물이 혼생하는 식물지리학상 희소한 장소이다. 192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
(임정현샘 사진에서 펌)
아리아케산(有明山 558m) : 대마도의 지붕이라 불린다. 이즈하라시청이 바로 출발점이다.
출발점은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고려문과 그것을 기념하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대나무숲으로 시작하는 산행.
히노키(편백나무)숲이 이어지고.
허나 강풍과 비소식에 돌아올 배편이 변경되어 30분만에 하산.. 이리 큰 녹나무 보셨나요??
시내에도 녹나무가. (우리나라의 느티나무와 팽나무 역할을 하는 대마도의 녹나무)
강풍이 온다는데..... 빨랑 먹고 얼릉 배타고 가야쥐. 11월 게으른산행 대마도 식생탐사 여행 끄~~읕.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교량
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 선사시대 부터 한반도 동남쪽 해안에
서 실종된 물건은 해류를 따라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남해를 흐르는 해류가 한반도 동남쪽과 대마도
를 이어준 다리였다. 이러한 해류 때문에 한반도의 문화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논농사(稻作)는 야요이(彌生)시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것이 정설. 그러나 도작은 단순한
기술만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도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야만 전해질 수가 있다.
도작 문화가 전파됐다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대마도를 거쳐 규슈 지역으로 집단 이주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마도는 진상(進上), 조선은 회사(回賜)하는 것이 교류의 기본 형태였다. 조선과 대마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조선으로 보면 조선이 대마도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규휼하는 것)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대마도는 고대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이어주는 중계지였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조선과 대마도 관계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결정적으로 단절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침략군은 대마도의 대포(大浦)에 집결한 후 조선을 침공하였다.
조선민족은 대륙문화의 계승자로서 대체로 도서(島嶼)를 경시하였다. 조선인들은 대마도를 척박한
섬으로만 보았다. 이러한 땅은 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 될 염려가 있어 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는 범법자와 범죄자가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이들로 인해 대마도는 해적
소굴이 되었다. 이들이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범해 약탈하자 조선은 강부(降附 항복하여 굴복
하다)를 권고하기도 하고, 토벌(討伐)을 수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첫댓글 식생관련 자료는 가급적 빠른 시간내에 탐사장소별로 올리겠습니다.
근데 가물가물한 식생들이 있어서...도와 주세요. 꼬~~옥.
으으~~~...저 배.
이젠 배만봐도 멀미할듯..^^
아리아케산에 들어가보지 못하고 회귀한것이 못내 아쉽네요~~~^^
샘의 정리에 이젠 길 들여지나봐요. 언제 올리시려나 기다려지고, 확인해야 정리가 되는듯^^
캄쏴합니다~~~
단계샘.감탄하고 감니다.
일요일까지 울렁 울렁 했다는...^&^
단계샘, 제주도에도 아름드리 녹나무가 수두룩! 녹나무는 제주대학의 교목이기도 하고요 가로수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나무랍니다. 자생지도 여러 곳에 있구요^^
아~~~예. 이번에 여러가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록나무도 제주도에 400여년된 고목이 있더군요.
담번에 제주도에 가면 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암튼 지난번 강좌 아주 유익햇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려지는 단계샘의 정리~~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정리솜씨^^
기억하지 못했던것까지꼼꼼히 올려주서서
늘 감사합니다~~
단계샘의 팬클럽을 만들어야 할 듯..
이번 여행의 기적(?) 정말 멀미 안하고 온것이.
앉아서부터 도착할때까지 복식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한것이 효과만점이었던 듯 합니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우재명샘께서 손을 꼭 잡아주신 것도 멀미 안한 덕분이었답니다. ㅎ
역쉬 정리에 단계샘을 따를자 그 뉘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