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운 말글이 좀 들어가야겠지?
페이스북에서 유명한 청년 동양철학자 임건순은 투덜거린다. ‘글을 쉽게 써야한다고 하지만 정작 쉽게 써놓으면 사람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쉽게 쓴 책은 왠지 돈 주고 사서 보기 아깝다고 생각한다. 정작 어렵게 써놓은 책이 잘 팔리는 경우가 많다. 대중은 쉽게 글 쓰라고 하면서 정작 쉽게 쓰면 안 사고 안 본다. 대중의 이중성이다’
보통사람들이 글쓰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어려운 말글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쉬운 말글을 써놓으면 왠지 글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사실 우리말글 선각자인 이오덕, 권정생 선생이나 박경리 작가의 소설을 보면 쉬운 말글 보물창고다. ‘어디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우리말글이 새록새록 솟아나올까?’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아름다운 우리말글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른바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일본이나 서양 것이 좋다는 편견에 빠졌다. 아름답고 다양한 우리말글 표현을 우리가 배우지 못했다. 일제가 강요하기도 했고 우리 정부와 지식인들이 어려운 말글로 계급을 만들었다. 쉬운 말글 쓰는 사람은 하층민이고, 어려운 말글 쓰는 사람은 중산층이나 고급인간이란 계급이다. 일본식 한자 말글이나 영어 등 외국어를 많이 써야 뭘 좀 아는 지식인인양 행세해온 허위의식이 높아졌다. 너도나도 어려운 말글 배우느라 학교에 돈 가져다 바쳤다. 그렇게 학벌사회를 만들고 소수 기득권층이 다수 대중을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최소승리연합이라는 것이 있다. 상위 10%가 다수인 90%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상위 10%가 말글이나 재력, 혹은 권력관계로 묶여서 그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다수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순치시키는 원리다. 이 상위 기득권층 숫자가 너무 적으면 연합지배가 무너지고, 너무 많으면 나눠먹을 게 없어진다. 그래서 인류역사를 보면 늘 상위 10%가 똘똘 뭉쳐 지배연합을 만든다. 조선 500년을 기득권으로 살아온 양반들이 전체 백성 중 평균 10%안팎이었다. 차이나를 점령한 몽골족 원나라도 그렇고, 만주족 청나라도 10% 인구로 지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원리는 관통한다.
바로 이 최소승리연합을 위해 말글살이도 악용한다. 말글에도 계급이 만들어진다. 고급 말과 천한 말로 나뉜다. 양반들이 품위 있게 쓰는 말은 고급 말이고, 일반 백성들이 쓰는 말은 천한 말이 된다. 그래서 기득권이 되고자 하면 양반이 쓰는 말글을 먼저 배워야 한다. 서당이 생기고 서원이 생겼으며 마침내 최고엘리트를 위해 성균관도 생겼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세종큰임금과 최만리의 논쟁이다. 세종이 명나라 몰래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할 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반대상소를 올렸다. 한문이 진서(진짜글자)고 훈민정음은 언문(천한 글)이라 했다. 조선 초 유명한 청백리였던 최만리조차 애민정신보다 자신이 배워 기득권질서를 만든 한자를 숭상한 것이다. 백성들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이 극소수였고, 이들이 나랏일을 좌우하는 데, 세종이 갑자기 쉬운 글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쉽게 쓸 수 있게 만들었으니 기득권 한자세력이 극렬 저항한 것이다. 누구나 쓸 수 없는 글을, 누구나 쓰게 만들면, 기득권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최만리는 이 점을 걱정했고, 힘들게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 국체가, 누구나 글을 씀으로써 사대부와 양반이 만든 신분질서 조선이 무너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 반포를 밀어부친 세종이야말로 대단한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웬만한 임금이라면 신하들이 극렬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이기 어려운 신권의 나라 조선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어려운 말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자. 알다시피 우리가 어렵게 느끼는 말글은 한자 말글이다. 법원 판사들이 판결문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한자 말글은 우리 학문과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유치원 다닐 땐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쓰는데 초등학교를 들어가고부터는 어려운 한자 말글을 배운다. 마치 그것이 지식인들이 쓰는 말글인 것처럼! 그러나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 말글 대부분이 차이나 한자가 아니라 일본한자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 조상이 조선시대까지 써왔던 차이나 한자가 아니라 36년간 억압당한 일제강점기 때 억지로 배운 일본 한자다. 우리가 일본어를 전혀 배우지 않고도 일본한자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이유도 일본식 한자를 배웠기 때문이다. 차이나와 일본 한자가 출발은 같지만 사용법이 점차 달라지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는 일본에 치우친 한자인 것이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금일 명일 자유 상징 상상 관계 원리 원측 상식 교양 사상 관념 예술 종교 경제 행정 문화 문명 역사 윤리 전통 현대 국가 사회 공산 민주 민족 주의 이념 계급 투쟁 혁명 문민 직관 인권 인격 청산 목표 목적 정보 실감 연애 실연 학교 학위 학력 학문 철학 문학 과학 화학 심리학 물리학 미학 경영 경쟁 의식 동기 좌익/우익 정신/물질 주체/객체 주관/객관 권리/의무 구체/추상 낙관/비관 이성/감성 우연/필연 시간/공간 현실/이상 적극/소극 공업 상업 선진국/후진국/개발도상국 건축 시장 회사 은행 기업 연락 국제 연설 실존 소설 이방인 신경 신경질 제왕절개 수술 문법 품사 관사 만화 신문 잡지 노동조합 야구 축구 농구 배구 정구 탁구 현금 현역 필요 간단 전신 전화 영화 이사 대표 선수 운전수 판사 검사 변호사 이발사 기자 백화점 도서관 참고서 적분/미분 화장실 연초 지진 변소 저기압 저자세 여관 취재 잔반 잔업 수법 하수인 승부 신파 삼진 백묵 문고 단행본 절체절명 원서 불심검문 택배 전사(戰士) 도보’
어떤가?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우리 말글살이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말글이다. 지금 이 책에서 지은이가 쓰고 있는 낱말 상당수도 사실은 일본식 한자다. 가능하면 우리말글로 바꾸려고 노력한지 몇 년 되었는데도 오랫동안 익혀온 말글버릇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은 공무원들이나 지식인들이 우리말글을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보통 사람 생활에서 일상이 되었다. “내린 다음 타세요."라고 하면 될 것을 “하차한 다음 승차하세요."라고 굳이 한자 말글을 쓴다. 고속도로나 국도를 운전해서 가다보면 ‘염수분사구간’이라는 표지판도 자주 본다. 그냥 ‘소금물 뿌리는 곳’이라고 하면 될 걸 한자말글로 쓴다. 마트를 가도 ‘손님’이 아니라 ‘고객님’이다. 모두 우리말글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한자 말글을 높이는 그릇된 말글살이다. 이런 그릇된 문화는 아예 딱딱한 구조가 되었다.
한자로 하면 높임말이 되고 한글로 하면 낮춤말이 되는 사례는 셀 수없이 많다. ‘정치가(政治家)’는 품격 있는 사람이고, ‘정치꾼’은 사기꾼쯤 된다. ‘꾼’이란 우리말로 전문가란 뜻인데도. 우리말글인 ‘나이’는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연세(年歲)라는 한자는 나이 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란다. ’밥 먹어라‘ ’식사하세요’도 낮춤말과 높임말이다. 이렇게 우리말글을 비하하고 한자 말글을 높이는 말글은 지배계층인 지식인들이 만들어온 말글이다.
또 대한민국이 열리면서 영어를 무분별하게 쓰는 풍조가 생겼다. 미군정 3년 이후 독립한 나라가 되어서인지 미국문화가 우수한 문화일 것이란 막연한 풍조가 생겼다. 대한민국 초기만 해도 일본식 한자문화가 압도적이었다. 일제잔재를 걷어낼 시간과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글학자라는 사람들도 일제강점기 때 공부한 사람들이어서 식민지 사관과 말글 습성을 뼛속 깊이 간직한 이들이었다. 이 당시 책을 보면 본문은 한자로 되어 있고 토씨만 한글로 되어 있는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민중운동 한다는 함석헌 선생이 만든 ‘씨알의 소리’잡지 1979년도 7월호를 봐도 제목과 차례를 보면 온통 한자투성이다. 안에 내용은 우리말글로 많이 썼지만 표지는 그리 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뿌리 깊은 일제잔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0~90년대 들어서면서 팝송 등 대중음악계에서만 불던 미국바람이 말글살이에도 들이닥친다. 컴퓨터 보급 등 정보통신문명이 발달하면서 미국말글을 모르면 경제성장이 어려워진 환경이 작용한 듯하다. 그렇게 영어를 무분별하게 쓰기 시작한 것도 지식인들이 선도한다. 미국 유학파들이 각 대학 교수가 되고, 그들이 선후배를 끌어주고 밀어주어 대학 교수사회를 장악한다. 그들이 영어를 쓰면서 영어가 마치 선진학문을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말글로 되어버린 듯하다. 심지어 국문학과 교수를 뽑는데 영어로 말해보라는 면접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교양 있는(?) 이들이 영어를 많이 쓰다 보니 상품도 영어로 된 상품이 잘 팔린다. 말하자면 고급 진 사람들이 쓰는 말글이란 선입견이 작용하여 상품 이름도 대부분 영어로 짓는다. 현대건설에서 파는 아파트 ‘힐스테이트’ 같은 건 아주 좋은 본보기다. ‘언덕나라’라고 하면 더 좋을 말글을 굳이 영어로 쓴다. 뭔가 이국적인 인상이 있어야 잘 팔릴 것이란 생각인데 이런 물건팔이가 적중했다. 특히 90년대를 지나면서 해외여행자유화로 나라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봇물 터지듯이 해외로 나갔고, 그 덕(?)에 외환위기를 맞기도 한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다시 거센 외국 자본들이 들이닥치고, 이 과정에서 상품마다 영어 등 외국어 쓰는 것을 넘어서 간판도 죄다 외국어 간판으로 바뀐다. 지금은 풀뿌리 마을운동 한다는 이들조차 ‘커뮤니티, 아카이브, 시니어, 코디네이터, 매핑 같은 영어를 무분별하게 쓰고 있다. 특히 시민운동 출신들이 영어를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 영어를 써야 마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래저래 이들이 대한민국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어려운 말글을 써야 글쓰기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말글은 글의 원래 뜻을 퇴색시킨다. 글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뜻을 통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인데, 어려워서 사람의 말글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말글이 아니다. 100명에게 이야기 했는데, 그중 30여 명만 알아듣는다면 그것이 무슨 말이고 글이겠는가. 소통하기 위해 만든 글이 오히려 불통을 조장하는 방해꾼이니 그런 글을 쓰고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말글을 우리가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배웠다는 분들이 무식한 말을 한다. 우리 말글은 어휘가 너무 짧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자신이 우리말글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고 보면 우리말글은 매우 다양한 표현이 널려있다. 우리가 안 배워서 모를 뿐이다. 예를 들자. ‘붉다’는 표현은 영어에서 몇 가지 안 된다. red 와 pink 등등이다. 물론 색깔과학으로 들어가면 숱하게 많지만 그런 말글은 일상에서 쓰는 말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말글은 일상에서 쓰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붉다’ ‘빨갛다’ ‘발갛다’ ‘검붉다’ ‘시뻘겋다’ 등 40여 가지가 넘는다. 한번 말광(사전)을 작심하고 찾아보라. 어렵지 않게 우리말글이 얼마나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우리 것은 내버려두고 남의 것을 열심히 배운 이들이 우리 것은 쓸모가 적다고 하니 코미디다.
글 쓰는데 한자 말글이나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쥐약이다.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려면 쉬운 우리말글을 써야 한다. 이오덕, 권정생, 박경리 등이 썼던 주옥같은 우리말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보다 많은 사람들과 풍요롭게 소통할 수 있다. 어려운 말글이 아니라 쉬운 말글로 글을 써야 진정으로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