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절『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신도나)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καὶ νεανίσκος τις συνηκολούθει αὐτῷ περιβεβλημένος σινδόνα ἐπὶ γυμνοῦ, καὶ κρατοῦσιν αὐτόν
청년의 헬라어는 네아니스코스(νεανίσκος)로서 새로운, 신선한 이라는 네오(영어의 new)에서 어근을 찾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제자들이 다 도망간 후에 일어난 일을 마가가 기록하고 있다. 이 상황은 마치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상시킨다. 하와가 하나님께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라고 표현되는데, 에덴동산의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천사의 옷을 벗기고 흑암에 갇혀버린 이야기다.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청년은 표면적으로는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추측을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벌거벗음을 당하는 자, 예수님을 배반하여 도망가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청년은 베 홑이불(신도나 σινδόνα)을 걸쳤다고 한다. 신도나는 베옷의 일종이다.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서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굵은 베옷은 거친(염소털이나 낙타 털로 만든 것) 베옷이다. 세례요한과 엘리야가 연상된다. 요나 3장 6절에서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회개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예루살렘이 망하게 되었으므로, 세례요한이 회개를 선포했던 것이다. 두 증인은 교회를 회복하는 일과 관계가 깊다.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인 것이다.
베옷을 입어야 하는데, 베옷을 벗고 도망한다는 말은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청년은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르는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 있는 예수를 다 버리고 도망가는 자라는 것이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육이 반응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됨을 말해준다.
요한복음 13장 36-38절『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설교가 나온다. 14장 1절에서『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이렇게 시작되는 설교가 아주 길다. 계속하여 15장 1-2절에서는『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그리고 15장 26-27절에서는 성령에 대해서 설교를 하신다.『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이런 설교는 16장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드디어 16장 30절에서유대인들은『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들은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들이다. 14-16장의 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16장 31-32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여기서『믿는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는다고? 반문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꾸짖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 여기에 연합되기 전에는 누구나 아담과 하와가 가진 생명과 같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숲에 숨는 생명이다. 선악과를 먹을 수 밖에 없는 생명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생명이다.
삼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배워도 옛생명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도 십자가와 연합되지 않으면 이 상태가 된다. 그런데 십자가와 연합되지 않으면서 성령체험,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역사를 구하고 있다. 그게 바로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도망갔던 한 청년은 베드로처럼 후회스럽고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에게 찾아오시고, 그 외도 많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다. 한 청년도 여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도망간 청년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 새로운 청년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부어주셨다. 청년도 성령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을 떠난 자라 할지라도 (베옷을 입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옷(의의 옷)으로 입혀주실 것이다. 진짜 복음은 모든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함을 전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믿는 자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일이다. 세상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이다.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은 자는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현재적 부활의 영광을 입을 것이다. 도망간 청년은 하나님께 새로운 청년으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