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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걸 안동대 교수의 ‘『화엄경』’ 읽기
지난 9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 15강은 제목부터가 신선했다. 이효걸 안동대 교수(동양철학과)가 진행한
「화엄경: 그 우주 판타지 스토리가 우리의 혈맥에 잠들어 있다」 강연이었다. 이 교수는 고려대에서
「화엄경의 성립배경과 구조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7년부터 안동대에서 노장철학과 불교철학을 강의해 왔다.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부장,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소장, 안동대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이효걸의 장자강의』(2013), 『천등산 봉정사』(2000), 『중국철학의 이단자들』(공저, 2000), 『논쟁으로 보는 불교 철학』(공저, 1998), 『우리들의 동양철학』(공저, 1998), 『노장철학의 현대적 조명』(공저, 1990) 등이 있다.
이날 이 교수의 강연에서 눈에 띄는 키워드는 ‘우주’, ‘판타지 스토리’, 그리고 ‘혈맥’이었다. 『화엄경』을 이렇게 축소해보면,
우주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스토리’이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과 탐색을 주제로 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가 쉽게 떠오른다. 이 애니메이션을 두고 일본 불교계의 화엄경 홍보라는 설
(한 불교학자는 일본에서 이 영화와 화엄경의 연관성을 입증할 자료는 없다고 지적했다)도 있었을 정도니,
이 교수가 ‘우주 판타지 스토리’로 읽어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과연 그는 어떻게 『화엄경』의 우주를 가로질러갔을까.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정원본(보물 제752호, 호림박물관 소장)으로,
감지에 금가루로 화엄경 34권을 쓴 것이다. 고려 충숙왕 3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화엄경』이란 불교경전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을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통일체 국가로 만든 통일신라의 국가이념이었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민족을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정체화시키는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한 언어를 쓰는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서 동일한 문화를
가진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이러한 경우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철학적 바탕을 제공하고, 우리 민족이 통일체 국가를 지향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결속의 이념’으로서 역할을 한 것은 『화엄경』과 ‘화엄사상’이 그 중심에 있었다.
『화엄경』의 판타지 스토리 구성과 사상적 의의
① 정각의 빛(비로자나)의 방광과 우주무대의 설정, 그리고 보살의 등장
『화엄경』의 스토리는 판타지(fantasy) 스토리다. 그것도 우주를 무대로 하는 판타지다.
이 판타지 스토리의 출발점은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의 상태(正覺)’다. 석가모니불의 정각이 ‘우주의 일대 사건’으로 표명되면서 『화엄경』의 스토리는 시작한다. 석가모니불이 정각을 이룰 때, 깨달음의 정신 에너지는 빛이 돼 전 우주로 방광한다.
그 빛을 받은 주변의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빛으로 반응하며 서로 중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각기 자기존재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화려하고 현란한 빛의 축제를 전개한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깨어나 빛의 축제로 나타나는 장엄한 장면을
『화엄경』은 ‘연화장세계’ 혹은 ‘법계’라고 부른다. 이렇게 『화엄경』의 배경과 무대가 완성되면 스토리를 끌어갈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역은 보살들이다. 『화엄경』을 설파하는 스토리텔러(法主)도 보살이고, 『화엄경』의 중심 사건인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는 일, 즉 入法界’를 담당하는 주역도 보살이다. 그렇다면 보살들이 어떻게 비로자나불의 정각 내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보살은 아직 깨달음을 완성해 법계에 들어가지 못한 자다. 깨달음에 이른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틈,
즉 비로자나불과 보살의 간극을 메워주면서 그 양자를 일체화시켜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 점이 『화엄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면서 『화엄경』이 불교 사상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다.
② 천상의 우주설법과 화엄보살도
무대설정과 인물의 등장과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강령이 설정된 다음, 『화엄경』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석가모니불이 정각을 이뤄 비로자나불이 되는 순간, 석가모니불이 성취한 정각의 세계가 불과 보살들 사이에 정신감응의
방법으로 공유되는 이 독특한 설법은 주변뿐만 아니라 우주의 곳곳에서 몰려온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듣는다.
『화엄경』에서 전개되는 이와 같은 설법은 여러 번 반복된다. 특히 천상(도리천궁, 야마천궁, 도솔천궁, 타화자재천궁)에서
이뤄지는 네 번의 우주 설법(제9∼22품)은 보살의 수행을 단계별로 체계화한 내용인데, ‘十住→十行→十廻向→十地’의 40단계 로 전개되는 ‘華嚴菩薩道’가 여기에서 제시된다. 경전 성립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부분이 『화엄경』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③ 지상에서 실행된 천상의 보살도; 여래의 출현과 性起 천상에서 화엄보살도의 체계적 수행을 마친 다음,
『화엄경』의 스토리는 다시 지상에서 이뤄진다. 『화엄경』(60화엄) 제23 十明品에서 제32 寶王如來性起品까지 10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천상의 설법 다음에 지상에 내려와 보현보살이 주도하는 설법은 천상에서 설법한 보살수행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 10개의 품은 ‘화엄보살도 수행체계의
재구성’이라 볼 수 있다. 천상의 설법이 정신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는 설명이라면, 그 수행체계를 지상의 것으로 재구성한
설법은 일상적 삶에 적합한 형태여야 하므로 특정한 순서를 갖지 않는다. 천상의 설법이 이상적인 표준 모델을 가정해 이상적 인 것으로 설명한 것이라면, 그것을 재구성한 지상의 설법은 인간행위의 현실태로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천상의 설법 다음에
이뤄진 지상의 설법은 천상 설법이 담고 있는 보살도의 핵심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고 비체계적으로 설명된다.
그 핵심적 요소는 세계실상(존재세계)의 무한성, 인간정신(지혜)의 무한성, 보살수행의 무한성, 불타세계의 무한성의 네 가지다.
이 네 가지가 상응해 드러낸 세계가 연화장세계 즉 법계다.
화엄경의 의미를 우주론적 판타지 스토리 측면에서 접근한 이효걸 교수. 사진=네이버문화재단
④ 보현보살의 행원과 범부보살(선재)의 입법계 『화엄경』 마지막 품은 入法界品인데, 이 품은 분량도 제일 많을 뿐 아니라,
내용의 구성 면에서도 독립된 경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엄경』은 사실상 같은 계열의 여러 단행별경
(도사경, 제보살구불본업경, 보살본업경, 십지경, 여래흥현경, 도세경, 보현보살행원찬 등)이 기반이 돼 재편집되고 증보된
경전이므로 ‘華嚴大經’이라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화엄경』은 원시 화엄경에서 화엄대경으로 발전해나간 대승불교의
진화과정을 담은 독특한 경전이다. 입법계품은 오늘날의 TV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이야기 형식을 갖추고 있다.
우주 판타지 스토리를 인생 드라마로 각색한 입법계품은 『화엄경』의 성격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화엄경』에서 그토록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입법계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입법계품의 취지가 ‘한 평범한 인간이 일상적 삶의
조건에서 불타가 깨달은 세계에 들어가 불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그 앞에 전개한 모든 판타지 스토리는 결국 입법계품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한 개인의 실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인생은 이 세상에서 각자 홀로 가는 고독한 여행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삶은
고유하고 고귀하다)에서 인간의 의미를 묻고, 거대한 존재 세계에서 각자는 자신의 고유성을 가지고 외부세계와 어울리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법계품은 ‘한 개인의 완성(成佛)’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이라는 절정의 사건에서 다시 되묻고, 그 답을 보통사람의 일상에서 찾고 있는 이야기다.
우주적 비전과 일상적 삶의 절대적 가치화
그렇다면 입법계품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 앞에 전진 배치한 우주 판타지 스토리는 왜 나오는가. 우리의 현실적 삶이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경험에 고착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인류의 집단경험이 구축한 견고한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가. 『화엄경』 스토리의 작가들은 인간의 정신 안에 깊숙이 뿌리박힌 견고한 집단 경험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우리의 정신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입법계품으로 마무리되는
『화엄경』의 우주 판타지 스토리에 이러한 인생관이 들어있음을 발견한 동아시아 지성인들은 그러한 스토리로 부터 화엄철학을 탐구하고 화엄종을 일으킴으로써 동아시아 정신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화엄경』의 우주론적 비전은 경험적 사유에 기반한 경쟁적 논리를 포괄하거나 초월해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혔으며,
‘일상적 삶의 절대적 가치화’를 가르친 입법계품은 우리의 일상적 행위가 불타의 몸짓이자 우주적 사건임을 자각하게 해 사회적 인간관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이룬 7세기의 우리나라에 『화엄경』의
스토리를 널리 알리고 화엄철학과 사상을 역사의 길라잡이로 삼으려 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화엄경』 스토리와 그 핵심적
가르침을 당대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직접 스며들도록 종교적 · 문화적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화엄사상과 의상 법성게
한국에서는 『화엄경』의 스토리를 언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국 화엄종을 개창한 義湘(625∼702년)으로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 의상 자신은 물론 당대의 일반대중이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각자 자기의 현실적 삶을 통해 구현되기를 희망했고 또 그렇게 되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화엄사상은 한국 불교사상사 에서 지속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방대한
『화엄경』의 스토리와 화엄사상의 요체를 요약한 ‘華嚴一乘法界圖’의 내용인‘ 法性偈’때문이다.
「법성게」의 후반부인 제19구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자. “시불(十佛)은 능히 해인 삼매에 들어 부사의한 위신력을 여의하게
쏟아내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진리의 비를 허공 가득하게 내리고 있으니, 중생들은 제각각의 그릇만큼 이익을 얻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수행자가 본바탕으로 돌아가려면 헛된 생각을 끊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불이 이타심으로 전 우주에
뿌려 놓은 수많은 진리의 길 가운데 특별하게 인연으로 다가가려 하지 말고 無緣한 계기들이 가장 좋은 자신의 기회요 길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움켜잡아 집으로 돌아와 자기 분수에 맞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펼쳐라!
그러면 참된 세계(법계)와 통하는 값진 보배의 인연의 길을 따라 빛나는 법계의 궁전에서 내 몫의 꽃다움을 피워 내어 더욱
아름답게 그 궁전을 꾸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결국) 법계에 진입해 우주의 궁극적 실상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꽃을
피울 것이다. 그것이 본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돼 있는 우주의 진리이며, 그 자리에 섰을 때 너 또한 부처가 되리라! 네가 우주의 진리가 되리라!” 『화엄경』의 우주 판타지 스토리는 의상에 의해 이렇게 요약되면서 우리의 혈맥에 지금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