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전도인. 일명 노광옥
평북 철산에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수학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승만, 정교, 여운형, 주시경, 정태응, 오긍선, 최재학, 윤성열, 신흥우 등과 함께 1898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1901년 그가 배재학당 영어교사를 겸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배재학당 영어부에서 공부한 듯하다.
그는 재학 시절 1896년 11월 30일에 창립된 협성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했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 동포에게 전하고 권면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협성회는 우선 매주 토요일 오후에 배재학당에 모여 공개적인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주제는 주로 계몽적인 것이었으며, 노병선은 이 토론회의 연사로 참석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1897년 5월 5일 설립이 결정된 한국 기독교 최초 청년회인 엡윗청년회 창립위원으로 중앙본부 임원을 맡아 각 교회 엡윗청년회 조직과 활동에 힘썼고, 같은 해 10월 31일에 조직된 정동교회 남자 엡윗청년회 월은지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엡윗청년회 중앙본부의 통신국장을 맡아 전국지회를 지도하며 활동했다.
또한 그는 정동교회 본처전도인으로서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동대문교회에 설교자로 파송받아 전도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본 교회인 정동교회에 아펜젤러와 함께 파송받았으며, 이 해 6월 11일 아펜젤러의 순직 이후 1903년 4월까지 근 1년 동안 실질적인 정동교회 목회자로서 활동하였다.
1903년부터는 스크랜턴 선교사의 조사로서 활동, 남부지역을 순행하며 전도하는 한편 교육운동을 지도하였다. 당시 한국 감리교회는 매일학교운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터라,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학교가 세워졌던 것이다.
1907년 이후로는 감리교 연회록에 노병선에 대한 보고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상동청년학원이 발행한 〈가뎡잡지〉 1906년 1월호에 평론 "쇽히 고칠 일"을 발표하였고,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상동교회 공옥(功玉)학교 교사로 보도되었을 뿐이다. 당시 상동교회의 공옥학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전국 엡윗청년회 대표들이 도끼상소를 한 후 각지로 흩어져 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키로 한 가운데, 민족독립운동의 웅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부터 그가 협성회와 엡윗청년회 간부로 활동한 점과 공옥학교 교사 등 상동파로 활동한 점을 미루어볼 때, 이후 민족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다만 그의 사위 되는 조병옥 박사의 회고록에 보면, 그가 대한제국시대(1897~1910)에 고등관 벼슬을 지냈다고 하니, 아마도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잠시 관직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한편 그의 딸 노정옥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모르나 오(吳)씨 부인에게서 3남 3녀(장녀 노정면:조병옥 박사 부인, 장남 노정훈, 차남 노정원, 삼남 노정은, 차녀 노정숙, 삼녀 ?)를 두었고, 부인과 사별한 후 평양에 거주하면서 광성(光成)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주변의 재혼 권유를 받아들여 평양 산정현교회 조용선 양과 재혼하여 조씨 부인에게서 3녀(노정희, 노정옥, 노정내)를 두었다. 그는 딸들과 함께 대동강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갈 정도로 개화된 분으로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다.
1930년대에 서울 창천동으로 이사, 이필주 목사 시무 당시 창천교회에 출석하였고, 이후 연세대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끝까지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는데, 일제 말기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능곡으로 피난, 은거생활을 하면서 삼성당(현 능곡감리교회)이란 동네 교회에 출석하였고, 청렴하여서 재산도 하나 없이 집 한 채만 남겨놓은 채 1941년 1월 11일 7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별세할 때 "승만이 형, 승만이 형"을 불렀다 하며, 이승만 박사도 해방 직후 귀국하여 제일 먼저 그를 찾았다 한다. 6.25때까지 가족들은 능곡에 거주하였는데 6.25때 조병옥 박사의 처가라고 하여 인민군들이 집마저 불태웠고, 이때 그가 남긴 자료와 문서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의 묘지는 1980년대에 능곡에서 모란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부인 조씨는 1986년 1월에 별세하였다.
그는 1897년 〈파혹진션론〉을 저술하여 간행하였는데, 16면에 불과한 작은 책자지만 한국 개신교 역사상 한국인이 기록한 첫 기독교 변증론이라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파혹진션론"이란 "의혹을 파하고 착한 데 나아가게 함"이란 뜻으로, 그 내용은 선교사들이 왜 자기 돈 쓰며 타국에 와서 희생하며, 선교활동하는가? 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 "어느 나라이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악이 관영하여 죽을 지경이 된 나라가 있다 하면 기어이 부비를 구취하여 전도교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한 형제로 여기고 천로로 인도하여 자기와 동등한 사람이 되기를 일구월심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기독교가 서양 종교라는 일반관념을 부정하고, "대저 도의 근원은 하늘로부터 난 것이라. 어찌 서양 하늘과 동양 하늘이 다르다 하리오"라 하면서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의 도를 아우르는 하늘의 도로 해석했다.
또한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많은 논설을 남겼는데, 이를 요약하면 사회평등사상(상하와 남녀가 평등하며 제각각 개성과 장단이 있어 서로 의논하고 협력해야만이 문명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의 기본권사상(이는 자유하는 권리요 자주권이며,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초목과 금수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자유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사회교육사상(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 필요하며, 교육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 자립"근로사상(게으르거나 놀고 먹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요, 근면하게 일해서 자립하고 걸인에게까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언론사상(민중을 대변하는 언론의 책임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 중요성을 논함) 등이다.
결국 그의 기독교사상은 그의 민족운동, 애국계몽사상과 직결되어 있으며, 사회평등사상ㆍ자유민권사상ㆍ사회개혁사상 등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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