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세한 짐까지 모두 챙겼다고 생각이 들 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열어 놓은 창으로 고개를 돌리자 초록빛 들판이 보인다. 두루두루 손보고 돌보아 잘 다듬어진 논과 밭, 그리고 나무들이 새순을 틔워 산과 들은 푸른 물기를 담뿍 물고 있었다. 이렇게 기름지고 풍부한 산천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생명의 계절,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좀처럼 갖지 못할 영상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그녀의 이쁜 이마에 우수가 어린다. 하지만 원술의 극성과 심술을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는 시원하다.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다른 형제자매와 마음 씀씀이가 그렇게 다를까.
애기씨, 점심 드시러 나오셔유! 서울에서 원술 아가씨도 오셨구먼유!
방문 밖에서 언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언니가? 원술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수방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저고리 속으로 돋은 소름을 지우려는 듯 두 손으로 팔을 문지른다. 바로 그 때 방문이 화닥- 열렸다. 짐을 챙기던 채로 질펀하게 앉아 있던 수방은 깜짝 놀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정에 있는 거 걸터듬느라 정신이 없구나! 왜 내가 못마땅하지? 대갓집으로 시집간다고 벌써 유세를 떠는 거야 뭐야?
어서 와요. 왜 오자마자 시비유, 언니! 자 자- 점심 먹읍시다.
점심은 무슨 점심? 이렇게 많은 혼수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텐데 또 밥을 먹는단 말이냐?
언니 왜 그래요? 어서 나갑시다. 언년이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언년아,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어서 모시고 와!
댓돌에서 기다리고 있는 언녀이를 내다보며 수방이 손짓을 한다.
아니 6년 전에 내가 시집갈 때는 이거보다 값이 나가지 않는 장미목 장롱이었어. 딸들 혼수를 해주시려면 똑같이 해 줘야지. 어머닌 왜 너만 싸고 도시는지 모르겠어!
방에 있는 고리 궤짝과 여행 가방 그리고 수놓은 손수건 널브러진 짐들을 내려다보면서 장승같이 서 있던 원술이 밖으로 나와 마루에 쌓인 장들을 돌아보며 심시가 사나워 뱉는 소리다. 바로 그때 샛골 댁이 언년이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마침 오시네, 안 그래요 어머니! 혼수를 해주려면 똑같이 해줘야지, 왜 수방에게만 이렇게 값나가는 것으로 많이 해주시는 거에요?
마루로 올라 온 영조는 딸들 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고 밥상 앞에 앉는다.
언년아, 나 물 좀 우선 한 사발 다우! 어서 밥이나 먹자.
어머니, 왜 대답이 없으세요? 고리 궤가 열둘이라, 저 속을 무엇으로 다 채웠는지 얘 수방아, 좀 열어 봐!
열어보긴 뭘 열어 봐? 한복이지! 너 시집갈 때는 고리 궤가 열둘이 아니고 열셋 아니었냐? 얘 작은애야, 어서 밥이나 먹자. 네 언니도 해 줄만큼 해줬으니까 주눅 들 것 없어!
수방이 밥상 앞으로 다가가자 원술이 심술을 부리며 고리 궤짝 하나를 연다. 그리고는 차곡차곡 들어있는 한복을 마구잡이로 집어내 마루바닥에 던진다. 기가 질린 수방은 수저를 들 생각도 못하고 상 앞에 망연히 앉아 있다. 저 심술이 마지막일까?
고만두지 못하겠니? 어디서 수작이야! 뭔 잘못을 했다고 동생 혼수를 집어 팽개쳐, 부정타게! 지금껏 그렇게 골려 먹었으면 됐지, 아직도 못다 했냐? 수방이 시집가고 나면 누구한테 엠병 떨면서 살 건지 모르겠네!
역정을 내는 어머니 때문에 원술은 더욱 화가 충천을 하는지 고리 궤 하나에 들어있는 한복을 모조리 꺼내어 패대기치더니 다음 궤짝으로 다가간다.
언년아, 사랑에 할아버지 어서 모시고 와라! 작은 애야, 뭔 새삼스럽게 겁을 먹고 그래, 한 두 번 당했냐? 어서 밥이나 먹어!
수방은 입맛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명치 끝이 저릿하게 아파와 손으로 저고리 앞섶을 누를 뿐이었다. 물에 말아 몇 술을 뜨던 영조가 숟가락을 딱 하고 상에 내려놓는다. 바로 그때 장죽을 들고 백발노인, 수방의 조부가 쪽마루를 통해 대청으로 들어서신다. 모조리 서둘러 일어섰다.
네, 이년! 지금 이것이 무슨 광경이냐?
엎드려서 궤짝에서 옷을 끄집어내느라 노인이 나타난 것을 모르는 원술의 등짝으로 장죽이 내리 꽂혔다.
어이쿠-누구야? 아니 할아버지 왜 저를 때리세욧!
너 아니면 이 방에 맞을 사람이 있다더냐! 동생의 혼수를 네가 뭐라고, 무슨 이유로 팽개쳐!!
아버님, 고정하세요. 작은 애한테 혼수를 많이......
너 말고, 이 혼수를 집어 팽개친 년이 대답하렷다!
두 번째 궤 뚜껑을 열고 헤집으려던 원술이 허리를 펴고 큰 키를 바로 세운다.
어서 직고 하지 못할까?
이방 저방에서 점심상을 받았던 식구들과 식솔들이 쩌렁한 어른의 소리를 듣고 모조리 몰려나와 구경을 한다.
할아버지,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다름 아니고요. 제가 시집갈 때는 호두나무 장이 아니었어요. 혼수를 해주시려면 똑같이 해주셔야지. 어머니가 사람을 차별하시잖아요!
네 이년 걸터듬을 걸 걸터듬어야지. 내가 모를 것 같지만 이년! 한복 100벌도 부족해 모시며 비단을 얼마를 더 장만해 간 년이 아직도 할 말이 있어? 이번에도 수방이 혼수 장만할 때 평생 입을 것을 필로 떠 갔다며, 얼마나 더 해줘야 해? 그때는 장미목이 제일 좋은 장이었잖아! 수방은 전혀 욕심을 부리지 않아 내가 알아서 더 해주라고 했으니, 입 닥치거라! 두 번 다시 딴소리가 들릴 때는 이번에 필로 떠 간 거 모두 몰수할 테다. 알았느냐?
뻣뻣하니 장승처럼 서서 씨근거리던 원술은 나오지 않는 대답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알았느냐 몰랐느냐, 왜 대답이 없어?
할 수 없이 원술이 입을 떼고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리구, 이것 집어 팽개친 년, 어서 곱게 원래대로 개켜 넣거라!!
장죽을 들어 원술을 가리키며 할아버지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원술이 할 수 없이 널브러진 한복을 하나씩 둘씩 집어들 때 수방도 일어나 거들기 시작했다.
너 수방이 년은 손도 대지 말거라! 네 언니가 한 짓이니까 네 언니가 다 하도록 해!
노인은 큰기침을 하더니 장죽을 든 채 뒷짐을 지고 며느리에게로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돌아서 대청을 나선다. 대체 손녀딸이라고 하지만 누구를 닮았는지 심술 첨지에 키는 장정처럼 크니 년을 대거리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며느리가 비상사태만 벌어지면 제 남편보다 시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구경하던 식솔들도 모조리 제 방으로들 들어가고 할아버지가 사랑으로 들어가시자 원술은 동작을 그만두고 밥상으로 달겨들고 수방이 나서서 옷가지들을 줍는다.
작은 애야, 놔두고 어서 밥이나 먹으려무나! 언년이 너, 숟가락 놓거든 명돌어멈 대청으로 들라고 해라!
수방은 등 뒤로 어머니가 하는 말씀을 건성으로 들으며 옷가지를 주워서 구겨진 것들은 싹싹 쓰다듬으면서 궤에 차곡차곡 다시 넣는다. 시집에서는 누구를 향해 저 흑작질을 하며 살고 있을까?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런지 등가죽에서부터 명치 끝으로 전달되는 통증 때문에 수방은 한동안 얼굴을 찡그린 채 동작을 멈추었다. 밥을 먹는 원술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넌 좋겠다. 어머니에서부터 할아버지 온 식구가 네 편이니 얼마나 좋으냐? 왜 나랑 겸상도 싫단 말이냐? 등을 돌리고 그렇게 앉아 있게!!
마님, 부르셨어요?
어어- 명돌어멈, 이 널브러진 옷가지 저고리 치마 짝을 맞추어 잘 개켜서 궤에 넣게나!
아니 아씨, 어제 모두 잘 쓰다듬어서 넣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이렇게 널브러졌어요?
뻔히 아는 명돌 어멈이 원술을 노려보면서 한마디 거든다.
큰 아가씨가 심술 놓았대요!!
언년이가 총알 같이 일러바친다.
예끼, 언년이는 어르신들께 숭늉 내갔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별 참견을 다하고 나서!!
영조의 일갈에 언년이 허리를 굽신하면서 부엌으로 내닫는다.
작은 애기씨, 제가 할게요. 어서 점심 한 술이라도 뜨셔야죠.
명돌어멈은 나는 안 보이고 수방만 보이느냐?
큰 아가씨야 제가 인사할 짬도 없이 점심 잘 드시고 있는걸요 뭐!
그래 모조리 수방수방, 작은 애 작은 아가씨, 어디 두고 보자! 나도 가만 안 있겠어.
식사를 다 마친 원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댓돌 아래로 내려선다. 얼굴에는 아주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었다.
왜 벌써 서울 가려고?
아니에요 어머니, 가볼 데가 있어요. 기다리지 마세요. 오늘 저녁 안으로는 올거니까!
원술이 어디를 가는지 떠나가고 나자 잠시 집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쪼그려 앉아있던 수방은 그제야 철퍼덕 마루에 앉았다.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맞았던 등판이 다시 뻐근해져 온다. 언젠가는 깊은 병으로 자리하는 건 아닐까? 바쁘신 어머니도 벌써 자리를 뜨시고 손이 빠른 명동 어멈만 남아 옷가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수방은 명치 끝을 여전히 쓰다듬으며 일어나 세워져 있는 병풍을 바닥에 가만히 앉힌다. 이번 혼사가 들어오기 몇 년 전부터 준비했던 병풍이다. 동양자수로 십장생이 수 놓인 여덟 폭짜리다. 명돌 어멈이 벌써 눈치채고 병풍 집에 넣는 걸 도와준다.
애기씨, 너무 속상하시죠. 내색 한 번을 안하시고 그 심술을 다 받으시니 복 받고 아주 잘 사실 거에요. 다 잊어버리시고 용서하세요.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다 된걸요!
명돌어멈이 위로한답시고 한마디 한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려고 하면서도 수방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