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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성종실록 63권, 성종 7년 1월 24일 기사 3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좌부승지와 도승지가 관노 김처지의 아내 소사의 상언·경상도의 쌀 부족을 아뢰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유지(柳輊)와 좌부승지(左副承旨) 현석규(玄碩圭)가 들어와서 일을 아뢰었다. 현석규가 아뢰기를,
"홍천(洪川)에 영속(永屬)된 관노(官奴) 김처지(金處智)의 아내 소사(召史)가 상언(上言)하기를, ‘난신(亂臣) 조번(趙藩)의 동복제(同腹弟) 조이(趙籬)와 조청로(趙淸老)의 동복제(同腹弟) 조정로(趙廷老)·조충로(趙忠老)는 모두 연좌(緣坐)를 면하였고, 이해(李諧)의 아내 불덕(佛德)과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와 최면(崔沔)의 아내 점물아지(占勿阿只) 등은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구촌(九寸)이 된 이유로서 면방(免放)되었는데, 신(臣)의 딸은 또한 공혜 왕후(恭惠王后)에게 9촌(寸)이 되는데도 종의 아내로 일컫게 되니, 원통하고 민망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전례(前例)를 끌어댄 사람의 죄가 이 사람과는 어떠한가?"
하니,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김처의(金處義)의 죄는 조번(趙藩)·박기년(朴耆年) 등과는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유지(柳輊)는 아뢰기를,
"박기년(朴耆年)은 곧 박팽년(朴彭年)의 아우이고, 조번(趙藩)도 또한 계유년148) 의 난신(亂臣)이고, 김처지(金處智)는 난신(亂臣) 김처의(金處義)의 동복제(同腹弟)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처의(金處義)의 죄명(罪名)은 내가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하니,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김처의(金處義)의 아버지 김효성(金孝誠)이 세조(世祖)의 정난시(靖難時)에는 공(功)이 1등에 있었고, 김처의는 또한 2등에 있었는데, 후에 김처의와 최윤(崔潤)과 봉석주(奉石柱)가 서로 더불어 의논하기를, ‘생명을 아끼지 않는 군사 20명만 얻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는데, 일이 장차 순조롭지 못하게 되자, 김처의는 홍천(洪川)의 농서(農墅)149) 에 가고, 봉석주(奉石柱)는 계획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세조(世祖)에게 아뢰니, 세조께서 마침내 봉석주 등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가두었습니다. 신(臣)이 그 때 의금부(義禁府)의 낭청(郞廳)150) 이 되어 봉석주의 공초(供招)를 받았는데, 공초에 이르기를, ‘여러 차례 실직(失職)했기 때문에 원망을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김처의(金處義)·최윤(崔潤) 등과 더불어 동모(同謀)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은 봉석주가 수모자(首謀者)입니다. 봉석주가 전라도 처치사(全羅道處置使)가 되었을 때에 목장(牧場) 안에서 면화(綿花)를 심어 이익을 늘리니, 대사헌(大司憲) 이효장(李孝長) 등이 이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는데, 반드시 이 일로 인하여 원망한 일일 것입니다."
하고, 유지(柳輊)는 아뢰기를,
"김처의(金處義) 등이 말하기를, ‘먼저 병조(兵曹)의 당상관(堂上官)을 살해하고 다음에 승지(承旨)를 살해한다면 거사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으니, 그 계획이 참혹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처지(金處智)는 관계하지 않았는가?"
하니,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김처지(金處智)는 그 때 전라도 처치사(全羅道處置使)가 되었는데, 진실로 관계하지 않았던 것이니, 관계했다면 어찌 생명을 보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근래에 난신(亂臣)의 자제(子弟)들이 의친(議親)151) 인 이유로써 면방(免放)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마는, 그러나 민무질(閔無疾)은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동복제(同腹弟)이면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참여되었는데, 후에 민무질이 역모(逆謀)로써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으며, 세종(世宗)의 치세(治世)가 마칠 때까지 그 자손(子孫)이 사유(赦宥)를 입지 못했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적족(赤族)152) 의 주륙(誅戮)을 가(加)하여 백성의 울분을 씻어야 한다.’고 했으니, 지금 김처지(金處智) 등에게는 비록 죄를 가(加)할 수 없더라도 면방(免放)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그럴듯하다."
고 하였다. 유지는 아뢰기를,
"신(臣)이 듣건대, 경상도(慶尙道)는 대개 70여 고을인데도 쌀은 겨우 16만여 석(碩)뿐인데, 왜료(倭料)에 소비되는 것이 대단히 많다고 합니다. 지난 번 정구(正球)가 올 때에도 거의 1천 석(碩) 등을 소비하고는 비용이 거의 다 없어졌다고 논하고 있으며, 지금 포화(布貨)는 사섬시(司贍寺)와 제용감(濟用監)에서 많은 수량을 쌓아두고 있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경상도(慶尙道) 노비(奴婢)의 신공(身貢)은 햇수를 한정하여 쌀과 콩을 주창(州倉)에 수납(收納)하여 군자(軍資)에 대비(對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현석규(玄碩圭)는 아뢰기를,
"지금은 태평하지마는, 혹시 사변(事變)이 있게 된다면 과연 유지(柳輊)의 아뢴 바와 같이 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한다.’고 했으니, 그것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이내 현석규에게 묻기를,
"사수(死囚)의 추안(推案)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현석규가 대답하기를,
"승정원(承政院)에 있는 것이 1건이고, 의정부(議政府)에 있는 것이 3건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63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305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가족-친족(親族) / 외교-왜(倭) / 재정-창고(倉庫) / 군사-병참(兵站) / 신분-천인(賤人)
[註 148]계유년 : 1453 단종(端宗) 원년.
[註 149]농서(農墅) : 농막.
[註 150]낭청(郞廳) : 낭관(郞官).
[註 151]의친(議親) : 팔의(八議)의 하나. 곧 임금의 단문 이상친(袒免以上親), 왕대비(王大妃)·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왕비(王妃)의 소공 이상친(小功以上親), 세자빈(世子嬪)의 대공 이상친(大功以上親)의 범죄자(犯罪者)를 처벌할 때 형(刑)의 감면을 의정(議定)하던 일.
[註 152]적족(赤族) : 멸족(滅族).
108.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2일 갑진 1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경연에서 송거의 부거 문제로 군신간에 논란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숙문(李淑文)이 아뢰기를,
"이번에 송거(宋琚)를 과거(科擧)에 응시하게 한 것은 매우 불가(不可)한 것입니다."
하였고, 정언(正言) 이세광(李世匡)은 아뢰기를,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罪惡)이므로 백세(百世)토록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신의 친자식으로 하여금 조정(朝廷)의 반열(班列)에 다시 끼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내금위(內禁衛)는 임금의 좌우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이니, 역신(逆臣)의 아들을 거기에 소속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금위도 그러한데, 더구나 과거를 보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현수(宋玹壽)는 직접 난역(亂逆)을 범(犯)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연좌(緣坐)되었을 뿐인데, 그의 자손(子孫)이 비록 과거에 응시한다고 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이어 좌우(左右)에게 문의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은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박습(朴習)·심온(沈溫)은 직접 난역(亂逆)을 범(犯)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朝廷)에서 용납될 수 없었는데, 송현수(宋玹壽)는 이에 직접 난역을 범한 자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을 응시케 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였고,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성삼문(成三問)·유성원(柳誠源)·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을 명유(名儒)라 하여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성삼문 등은 성상(聖上)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난역(亂逆)을 꾀하였었는데, 그 당시 송현수(宋玹壽)가 그들에게 칼을 주었으니, 이것이 함께 난역을 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삼문(成三問)이 형(刑)을 받았을 때에, 송현수(宋玹壽)는 그 몸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노산(魯山)이 쫓겨나자 형(刑)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한명회(韓明澮)가 대답하기를,
"그 때에는 옥사(獄辭)가 끝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또 아뢰기를,
"과거(科擧)는 국가에서 엄중하게 선발(選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난신(亂臣)의 자손을 과거에 응시하게 하고 있는데, 이처럼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으니, 이는 대의(大義)에 있어 미안(未安)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거(宋琚)는 이미 내금위(內禁衛)가 되어 벌써 벼슬길을 터놓고 있으니, 과거에 응시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난신(亂臣)의 자손을 굳이 그렇게 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참작하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6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9책 33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군사-중앙군(中央軍)
109.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27일 기사 3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충훈부·의정부 당상들이 대간들의 의견대로 황효원의 죄를 청했지만 들어주지 않다
충훈부(忠勳府)의 경력(經歷) 김극수(金克羞)가 당상(堂上)들의 의논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황효원(黃孝源)이 첩으로 처를 삼은 데 대하여 당초(當初)에 하문(下問)을 할 때에 신(臣) 등은 모두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대신(大臣)으로서 난신(亂臣)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을 삼는다는 것이 있을 법이나 한 일입니까? 게다가 또 도리어 예(禮)를 갖추어서 성혼(成婚)을 했다고 한다니, 그가 말한 혼서(婚書)와 예장(禮狀)은 거짓입니다. 또 현재는 난신의 딸로 첩을 삼은 자가 한둘이 아닌데, 만약 황효원의 첩으로 처를 삼는 것을 들어준다면 그 나머지들도 그것으로 관례를 삼을 것이니, 청컨대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였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이세필(李世弼)도 당상관들의 의논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은 급부(給付)받은 난신(亂臣)의 딸로 첩을 삼았고, 이제 또 처를 삼고자 하여, ‘그의 어미가 생존(生存)했을 때에 예(禮)를 갖추어 성혼(成婚)한 것이다.’고 말합니다만, 이미 천인(賤人)이 된 형편인데 어느 겨를에 예를 갖추어 성혼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거짓입니다. 배필(配匹)을 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적체(適體)라야 하는데, 황효원은 대신(大臣)으로서 난신(亂臣)의 딸로 처를 삼았으니, 그 죄가 한 가지이고, 병자년의 반역(反逆)512) 은 반역중에서도 큰 반역인데, 황효원은 이미 훈신(勳臣)이 된 처지로서 반역한 사람의 딸로써 처를 삼았으니, 그 죄가 두 가지입니다. 세종(世宗) 때에 심씨(沈氏)가 죄를 얻은 뒤에 이숭지(李崇之)가 심씨의 집안에 장가를 들자, 조정(朝廷)의 의논(議論)이, 이하(李夏)가 가장(家長)이면서 불충(不忠)한 집안의 딸로 며느리를 보았다 하여 직첩(職牒)을 수탈(收奪)하고 오랫동안 서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효원이 장가든 것은 불충뿐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즈음 대간(臺諫)들이 계속해서 진언(進言)하는 것이니, 청컨대 청납(聽納)하소서."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어떻게 대신(大臣)으로서 예를 갖추어 성혼하지 않고서 거짓으로 성례(成禮)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급부(給付)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종[婢]으로 부리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의친(議親)이라고 해서 두둔함이겠는가? 그의 족계(族係)는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의 후손(後孫)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6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9책 346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신분-천인(賤人)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註 512]병자년의 반역(反逆) : 세조(世祖) 2년(1456),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圖謀)한 것을 말함.
110.성종실록 118권, 성종 11년 6월 12일 신유 2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상산군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과의 혼인 허락 요청에 관해 상소하다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이 상소하기를,
"이유기(李裕基)가 죄를 지었으므로 그 딸자식을 신에게 급부(給付)하시었는데, 그대로 외조모(外祖母)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신이 홀아비로 있어 배우자를 구하는데 모두 늙었다 하여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의 어미가 한스럽게 여겨 그 외조모와 더불어 매작(媒妁)을 통하여 드디어 혼례를 이루었고, 또 천은(天恩)을 입어 면방(免放)되어 전연 혐의가 없는 지 오래입니다. 병신년269) 봄에 미치어 홍윤성(洪允成)의 가속(家屬)이 적(嫡)을 다투므로 헌부(憲府)에서 청리(聽理)하였는데, 홍윤성이 이미 죽었으니 질문할 근거가 없으므로 공경히 상지(上旨)를 받들었는데, 무릇 전·후실(前後室)이 있는 자는 아울러 생시(生時)에 추문하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신(臣) 자신에게 추급(推及)하게 된 것이며, 추문하여 끝까지 핵실하여 하자를 구하였으나 혼례는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다만 급부(給付)한 것으로 사연을 만들어 박의(駁議)하여 계달하였는데, 성상께서 성심(聖心)으로 재탁(裁度)하시어 적처로 논하라고 명하시었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논박(論駁)하여 말하기를, ‘황효원은 공신(功臣)이니, 난신(亂臣)의 딸로 아내를 삼을 수 없다. 마땅히 첩으로 논하여야 한다.’ 합니다. 천한 여자가 공신에게 시집가서 천인(賤人)을 면한 자가 하나가 아닌데, 홀로 신의 아내가 신이 공신이라는 까닭으로 적처를 강등하여 첩이 되니, 신이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는 것은 오래 가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짧다.’ 하였습니다. 또 승음(承蔭)270) 하는 법이 다만 직손(直孫)에게 미치고 외손(外孫)에게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황보인(皇甫仁)·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이 혹은 좋은 벼슬을 지내었고, 혹은 양시(兩試)에 올라 현달하였는데, 신의 자녀는 출생하기 전의 외조(外祖)가 범죄한 것 때문에 의관(衣冠)의 집과 더불어 혼인을 맺지 못하게 되니, 일이 궁하고 형세가 절박합니다. 천은을 바라건대, 신의 자녀로 하여금 인류(人類)에 복귀하여 사족(士族)의 집과 혼인하도록 허락하소서.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였다.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보이니,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사흔(尹士昕)·한계희(韓繼禧)·강희맹(姜希孟)·권감(權瑊)·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이유기(李裕基)와 처가(妻家)가 모두 사족(士族)이고 또 왕실(王室)의 친척이었으나, 그러나 이미 난신(亂臣)의 딸이 되었고, 비록 은혜를 입어 면방(免放)되었으나 처음에 장가들 때에 성례(成禮)해서 성혼(成婚)하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적실로 논하는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청컨대 처음 장가들 때에 성례하였는지 안하였는지를 상고하여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김국광(金國光)·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예를 갖추어 장가들면 아내가 되고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하면 첩이 된다.’ 하였으니, 비록 죄인의 딸이라도 성례하여 장가들었으면 첩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면방되었으면 본래 사족의 딸이니, 아내 되기에 무슨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처음에 장가들 때의 성례하고 안한 것을 세밀히 핵실하여 논정(論定)하소서."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그 성례한 여부를 상고하게 하니, 승정원에서 황효원의 혼서(婚書)를 취하여 아뢰었다. 또 명하여 정승(政丞)에게 보이어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한명회·윤사흔·윤필상은 의논하기를,
"지금 혼서(婚書)를 보건대 급부(給付)하던 때에 있었으니,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심회·김국광은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이씨(李氏)에게 장가든 것과 혼서를 이룬 것이 모두 급부하던 때에 있었으니, 후처(後妻)로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씨의 파계(派系)가 왕실(王室)에 연하였고, 이제 이미 면천(免賤)되었으니, 성상의 뜻으로 재처(裁處)하소서."
하고, 홍응은 의논하기를,
"혼서가 비록 급부하던 때에 있었으나, 본래 사족의 딸이고 혼서가 있으니, 처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다. 또 승정원(承政院)·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김승경(金升卿)·김계창(金季昌)·채수(蔡壽)·변수(邊脩)·이세좌(李世佐)·성형(成俔)은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비록 면방한 뒤에 있었으나, 훈구(勳舊)의 대신으로서 난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적처(嫡妻)를 삼았으니 이미 불가한데, 더구나 급부할 때를 당하여 어찌 주인으로서 종과 혼인할 리가 있겠습니까? 도리에 거슬리고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첩으로 논정하소서."
하고, 정괄(鄭佸)·이덕숭(李德崇)·구치곤(丘致崐)·이인속(李仁錫)·최한후(崔漢侯)·정지(鄭摯)는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에게 장가들은 것은 급부받아 종을 삼았을 때에 있었으니, 종과 주인 사이에 성례해서 성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혼서는 추후에 기술한 것이 또한 의심이 없습니다. 또 공신으로서 난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적처를 삼고자 하여 성상의 총명을 번거롭게까지 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청컨대 전대로 첩으로 논정하소서."
하였고, 이세필(李世弼)·김성경(金成慶)·윤석보(尹碩輔)는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난신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급부한 때에 있었으니, 어찌 성례해서 성혼하였다 이르겠습니까? 청컨대 첩으로 논정하소서."
하였고, 최숙정(崔淑精)·권건(權健)·이세광(李世匡)·조숙기(曺淑沂)·정성근(鄭誠謹)은 의논하기를,
"이유기가 자신이 난적(亂賊)을 범하여 그 처자를 공신의 집에 주어서 노예를 삼았으니, 이유기의 딸은 곧 황효원의 집 종입니다. 그 종[婢]에게 장가들 때에 어찌 혼례가 있었겠습니까? 무릇 사대부(士大夫)로서 조금 뜻이 있는 자라면 모두 난적의 자손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는데, 더구나 면천(免賤)을 하지 못한 자이겠습니까? 황효원은 공신이고 또 재상입니다. 만일 재혼하기를 구한다면 얻지 못할 리가 없으니, 난적을 범하여 몸이 천인을 면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적체(嫡體)의 배우자를 삼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집에 급부한 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 장가들 때에 첩으로 하고 아내로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어찌 능히 후일에 은혜를 입어 면방(免放)될 것을 예측하여 성례해서 성혼하였겠습니까? 가령 성례하여 자기 집 종에게 장가든 자가 그 종이 후일에 양인(良人)이 되었다면 처(妻)로 논하여 벼슬길을 통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혼서는 사사집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서 다 믿을 수 없습니다. 두 아내가 적(嫡)을 다툴 때에는 이것으로 질정하는 것이 가하지마는, 첩으로 처를 삼으려고 하는 자야 어찌 혼서의 있고 없는 것을 묻겠습니까?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맹세에 이르기를,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 하였으니, 대저 첩으로 처를 삼는 것은 옛사람이 미워하는 것인데, 어찌 처음에 첩이 된 자를 나중에 처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첩으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고, 성숙(成俶)·안침(安琛)·김흔(金訢)·민사건(閔師騫)·김응기(金應箕)·안윤손(安潤孫)은 의논하기를,
"이유기의 딸이 사족이지마는, 이미 난신의 딸로 황효원의 집에 급부되어 종이 되었으니, 비주(婢主)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주인으로서 종[婢]에게 장가든 데에는 혼례의 있고 없는 것을 논할 것이 아닙니다. 뒤에 비록 면방이 되었더라도 장가든 것은 급부한 때에 있었으니, 첩으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고, 성세명(成世明)·정광세(鄭光世)·조위(曺偉)는 의논하기를,
"이유기가 비록 본래 사족이지마는 베어 죽였고, 그 딸을 황효원에게 급부하여 종[婢]을 삼았으니, 나중에 면방될 것을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효원의 어미가 자식을 위하여 혼인을 구하는데 어찌 의관(衣冠)의 벌열(閥閱)을 버리고 반드시 난신의 자식으로 천인이 된 종을 구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종이라도 오히려 혼인하려고 하지 않았겠는데 더구나 자기 집 종이겠습니까? 이것은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비록 혼서가 갖추어 있다 하더라도 족히 사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혼인의 예는 인륜의 큰 벼리인데, 만일 한 사람의 사정을 따라 조금만 그 분수를 문란시키면 사람들이 장차 이것을 빙자하여 본받을 것이니, 큰 벼리가 무너져서 다시 정돈하지 못할 것입니다.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 하였으니, 지금 이유기의 딸을 처로 논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였다. 의논한 것이 들어오자, 임금이 명하여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1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38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가족-가족(家族)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註 269]병신년 : 1476 성종 7년.
[註 270]승음(承蔭) : 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함.
111.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 6월 11일 무신 2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행 지중추부사 양성지의 졸기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양성지(梁誠之)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양성지의 자(字)는 순부(純夫)이고, 남원인(南原人)이며, 증 의정부 우찬성(贈議政府右贊成) 양구주(梁九疇)의 아들이다. 정통(正統)431) 신유년432) 진사(進士)·생원(生員) 시험에 합격하고, 또 문과(文科)에 제 2인으로 합격하여 처음에 경창부 승(慶昌府丞)에 제수되었다가, 성균 주부(成均主簿)로 옮겼다. 임술년433) 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임명(任命)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되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어느 날 세조(世祖)가 상참(常參)에서 술자리를 베푸니, 양성지가 아뢰기를, ‘성체(聖體)를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절주(節酒)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오직 그대가 나를 아낀다.’ 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加)하도록 명하였다. 이 해에 집현전이 파(罷)해지자, 임금이 세자 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옮기게 하였다. 박팽년(朴彭年) 등이 주살(誅殺)되자, 사람들이 ‘양성지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니, 반드시 그들과 더불어 공모했을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이 때를 당하여 사람으로서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양성지는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을 보증한다.’ 하였다. 경진년434)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에 승진되었다가, 신사년435)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계미년436) 에 양성지가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서적(書籍)을 간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양성지를 제학(提學)으로 삼고,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가(加)하였다. 갑신년437) 에 구현시(求賢試)에 합격하니, 세조가 일러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경(卿)을 오활(迂闊)438) 하다고 하나, 나는 경과 서로 아낀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제수했다가 얼마 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하였다. 병술년439) 에 발영시(拔英試)440) 에 합격하고, 무자년441) 에 《세조실록(世祖實錄)》 찬수(撰修)에 참여하였다. 성화(成化) 기축년442) 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전임(轉任)되고, 신묘년443) 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고, 남원군(南原君)으로 봉하였다. 정유년444) 에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대관(臺官)의 논박(論駁)을 받고서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바뀌고, 신축년445) 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2품 이하의 당상(堂上) 문신(文臣)을 전정(殿庭)에 모아서 시(詩)와 논(論) 각 1편 씩을 시험하였는데 양성지가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초배(超拜)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諡號)를 문양(文襄)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로 인하여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한다. 양성지는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박람 강기(博覽强記)446) 하고, 촉문(屬文)447) 을 잘하였으나, 혈후(奊詬)448) 하여 부끄러움이 없고, 겁나(怯懦)449) 하여 절조가 없었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에 동렬(同列)들이 그를 더럽게 여겨 배척하여 함께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며, 오랫동안 춘추관(春秋館)에 있었는데, 무릇 부탁이 있으면 요하(僚下)로 하여금 간략하게 글로 적게 하였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전교서(典校署)의 제조(提調)가 되었는데 대중(臺中)에서 말할 일이 있어도 그대로 전교서에 앉아서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혹 자기 뜻을 거역한다 하여 대관(臺官)을 국문할 때에도 반드시 이르기를, ‘내가 양성지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였을 줄 안다.’고 하여 특별히 국문을 면하게 하였다. 그가 이조(吏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로 있을 때에 동취(銅臭)450) 라는 말이 파다하였으며, 말(馬)을 뇌물로 주는 자는 말편자를 박아 준다고 칭탁하고서 바치고 채단(彩段)을 뇌물로 바치는 자는 돗자리로 싸서 주므로, 그때 사람들이 이를 기롱하여 말하기를, ‘말발굽에 돈이 들어 있고 돗자리 속에 비단이 들어 있다.’고 하고, 또 오마(五馬)451) 의 조롱도 있었다. 혹자(或者)는 ‘말발굽에 돈이 들었고 돗자리에 채단이 들었다는 말은 곧 다른 재상을 가리킨 것이고 양성지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미워하여 하류(下流)에 둔 것은 이러한 것 때문이었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자 양성지는 김수온(金守溫)·오백창(吳伯昌)과 상소(上疏)하여 논공 행봉(論功行封)을 청하여 드디어 좌리 공신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당(唐)나라·송(宋)나라의 율시(律詩) 수십 수(首)를 초(抄)하여 《정명시선(精明詩選)》이라 이름을 붙여서 올리고 후한 상(賞)을 받았다. 그리고 상서(上書)하여 건론(建論)452) 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모두 오활(迂闊)하여 쓸 만한 것이 못되었다. 어느 날 봉장(封章) 십여 통(通)을 가지고 춘추관(春秋館)의 요속(僚屬)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평소에 아뢴 것인데 《사기(史記)》와 아울러 기록할 만하다.’고 하였으나, 여러 요속들이 증빙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써 비난하자 양성지가 오히려 비밀히 청탁하였는데, 마침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크게 화를 내면서 자책(自責)하여 이르기를, ‘노부(老夫)는 쓸모가 없도다.’ 하고, 뒤에 곧 전후(前後) 소장(疏章)을 모아 집에서 간행하고, 이름을 《남원군주의(南原君奏議)》라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나를 왕좌지재(王佐之才)453) 가 될 만하고, 제갈량(諸葛亮)과 견주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듣는 자들이 광릉(光陵)454) 의 하교(下敎)가 농담[調戲]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태백산사고본】 21책 1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342면
【분류】
인물(人物)
[註 431]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註 432]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433]임술년 : 1442 세종 24년.
[註 434]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435]신사년 : 1461 세조 7년.
[註 436]계미년 : 1463 세조 9년.
[註 437]갑신년 : 1464 세조 10년.
[註 438]오활(迂闊) :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않음.
[註 439]병술년 : 1466 세조 12년.
[註 440]발영시(拔英試) : 조선조 7대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리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는데, 이때 선발에 합격한 사람이 40인이었음.
[註 441]무자년 : 1468 예종 즉위년.
[註 442]성화(成化)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註 443]신묘년 : 1471 성종 2년.
[註 444]정유년 : 1477 성종 8년.
[註 445]신축년 : 1481 성종 12년.
[註 446]박람 강기(博覽强記) :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읽고 잘 기억함.
[註 447]촉문(屬文) : 문장을 얽어서 지음.
[註 448]혈후(奊詬) : 식견이 없음.
[註 449]겁나(怯懦) : 겁이 많고 나약함.
[註 450]동취(銅臭) : 돈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란 뜻으로, 돈으로 벼슬을 산 사람을 조소하는 말로도 쓰이고, 돈을 욕심내어 꼭꼭 모아 두는 사람을 기롱하는 말로도 쓰임.
[註 451]오마(五馬) : 한(漢)나라 때에 태수(太守)의 수레는 다섯 필의 말이 끌었으므로, 오마(五馬)라고 부르게 된 고사임.
[註 452]건론(建論) : 의논을 세움.
[註 453]왕좌지재(王佐之才) : 제왕을 도울 만한 재주. 즉 재상이 될 만한 인물.
[註 454]광릉(光陵) : 세조.
112.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 1월 30일 계해 3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우승지 강자평이 한명회가 계유 정난과 병자 사화를 진술하려 한다고 아뢰다
우승지(右承旨) 강자평(姜子平)이 아뢰기를,
"한명회(韓明澮)가 신에게 이르기를, ‘후원에서 관사(觀射)070) 하던 날에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집을 지나다가 지난날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눈앞에 환합니다. 신이 이번에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나이도 이미 늙어 남은 생애가 얼마 되지 않으며 사신으로 잘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도 알 수 없으므로, 성상의 앞에 이르러 계유년의 일071) 과 병자년의 일072) 을 낱낱이 진술하기를 원하였으나 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죽으면 비록 국사(國史)가 있더라도 어찌 눈으로 본 것과 같겠습니까?’고 하였으니, 한명회의 뜻은 신으로 하여금 계달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이 아뢰고자 하면 후일에 아뢰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150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30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편사(編史) / 외교-명(明)
[註 070]관사(觀射) : 임금이 신하들의 활을 쏘는 것을 구경하고 상을 주던 일. 무예(武藝)를 권장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
[註 071]계유년의 일 : 단종(端宗) 원년(1453)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대파를 없앤 사건을 말함. 이때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은 피살되고, 안평 대군(安平大君)은 사사(賜死)되었음. 계유 정난(癸酉靖難). 계유년은 1453년 단종 원년.
[註 072]병자년의 일 : 세조(世祖) 2년(1456)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말함. 병자 사화(丙子士禍). 병자년은 1456년 세조 2년.
113.성종실록 151권, 성종 14년 2월 5일 무진 3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한명회가 박팽년의 사건 및 봉석주·이시애 등이 난을 도모한 일에 대하여 말하다
이보다 앞서 한명회가 노년(老年)으로 북경[京師]에 가게 되었으므로 소대(召對)하여 소회(所懷)를 진술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인견(引見)하였다. 한명회가 아뢴 바는 곧 병자년074) 에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 및 봉석주(奉石柱)·이시애(李施愛)·남이(南怡) 등이 난을 도모한 일이었고 다른 신통한 계책이 없으므로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니, 한명회가 이에 물러나왔다. 한명회가 우승지(右承旨) 강자평(姜子平)에게 이르기를,
"성상께서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송행시(送行詩)를 지어 두루마리[軸]를 만들게 하였으나, 그것을 책에다 쓰면 보기에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강자평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15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431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출판-서책(書冊)
[註 074]병자년 : 1456 세조 2년.
114.성종실록 199권, 성종 18년 1월 27일 무진 1번째기사 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봉원 부원군 정창손의 졸기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와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정창손의 자(字)는 효중(孝中)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인데, 중추원사(中樞院使)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영락(永樂)계묘년090) 에 사마시(司馬試)091) 에 합격하고, 선덕(宣德) 병오년092) 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곧 집현전 저작랑(集賢殿著作郞)으로 옮기고 여러 번 승진하여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정통(正統) 신유년093) 에 사섬서 령(司贍署令)에 제수되고, 임술년094) 에는 승진하여 시전장 부정(試典醬副正)에 임명되었다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옮겼다. 을축년095) 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임명되어 강개(慷慨)하게 곧은 말을 하였고, 병인년096) 에는 언사(言事)로 좌천되어 군기 부정(軍器副正)이 되었다. 정묘년097) 에는 직예문관(直藝文館)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제수되었고, 무진년098) 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여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수하는데 참여하였다. 경태(景泰) 경오년099) 에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옮기고 신미년100)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조정의 기강(紀綱)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임신년101) 에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기고, 계유년102) 세조 정난(世祖靖難)에 뽑혀서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고, 갑술년103) 에는 자급이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을해년104) 에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가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고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받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으며, 병자년105) 에는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때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난(亂)을 꾀하자, 정창손이 변(變)을 고(告)하여 경절 공신(勁節功臣)의 칭호가 더 내려지고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106) 을 맡은 것이었다. 곧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올랐다가 천순(天順) 정축년107) 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올랐다. 무인년108) 에는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예(例)에 부인은 정조(停朝)가 없었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조시(朝市)를 하루 정지하여 특별한 은혜를 보였다. 장사지냄에 미쳐 정창손이 묘려(墓廬)에 있고 한 번도 사가(私家)에 오지 아니하였는데, 세조가 듣고 직제학(直提學) 서강(徐岡)을 보내어 내온(內醞)과 소찬(素饌)을 내려 주었으며, 서울 집에 있고 묘려(墓廬)에 돌아가지 말도록 하였으나 예전대로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세조가 장차 평안도에 거둥하려고 하면서 정창손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하려고, 특별히 기복(起復)하여 영의정(領議政)을 삼았으나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자, 어서(御書)로 유시(諭示)하기를,
"나에게 경(卿)은 좌우의 손과 같으니 장차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기복(起復)하도록 하겠다."
하고, 갑자기 순행(巡幸)을 정지하였는데, 정창손이 또 전문을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경진년109) 에 복(服)을 마치자 세조가 내전(內殿)에 불러 들여서 위로 하고, 단의(段衣) 한 벌을 내려 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신사년110) 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임오년111) 에 어떤 사건으로 여산군(礪山郡)에 귀양갔으나 곧 불러서 부원군에 봉해지고 특별히 잔치를 내려 위로해 주었다. 성화(成化) 무자년112) 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남이(南怡) 등을 죽일 적에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칭호가 내려 지고, 기축년113) 에 임금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였다. 신묘년114) 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命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받고 나이가 70인 까닭으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진년115) 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을미년116) 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을사년117) 에 늙었다고 하여 사직하고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6세이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인데, 임금을 섬김에 절의를 다한 것이 충(忠)이고, 도(道)를 곧게 지키고 굽히지 아니한 것이 정(貞)이다. 아들은 정개(鄭价)·정칭(鄭偁)·정괄(鄭佸)이고 사위는 김질(金礩)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정창손은 천성이 조용하고 소탈하여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였으며 집에 사는 것이 쓸쓸하고 뇌물을 받지 아니하여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감히 사사로이 간청하지 못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켜 정승이 된 지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처음부터 끝가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나이가 많아지자 정신이 혼란하여 일을 의논할 때에 비록 더러 착오는 있었으나 조금도 임금의 뜻에 맞추어 아부하는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 매양 조정의 모임에서 기거 동작하는 데에 넘어지면서도 오히려 사직(辭職)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가만히 비난하였다."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전교하기를,
"청빈(淸貧)한 재상이니, 부물(賻物)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0책 19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183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090]계묘년 : 1423 세종 5년.
[註 091]사마시(司馬試) :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小科).
[註 092]선덕(宣德) 병오년 : 1426 세종 8년.
[註 093]정통(正統)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094]임술년 : 1442 세종 24년.
[註 095]을축년 : 1445 세종 27년.
[註 096]병인년 : 1446 세종 28년.
[註 097]정묘년 : 1447 세종 29년.
[註 098]무진년 : 1448 세종 30년.
[註 099]경태(景泰)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註 100]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註 101]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102]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103]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104]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註 105]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106]문형(文衡) : 대제학(大提學)의 별칭.
[註 107]천순(天順)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108]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109]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110]신사년 : 1461 세조 7년.
[註 111]임오년 : 1462 세조 8년.
[註 112]성화(成化)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註 113]기축년 : 1469 성종 즉위년.
[註 114] 신묘년 : 1471 성종 2년.
[註 115]임진년 : 1472 성종 3년.
[註 116]을미년 : 1475 성종 6년.
[註 117]을사년 : 1485 성종 16년.
115.성종실록 264권, 성종 23년 4월 16일 병진 2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조극치의 사람됨·홍문관 관원의 권려 및 사가 독서에 관해 논의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정석견(鄭錫堅)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의 양계 절도사(兩界節度使)는 반드시 물망(物望)이 있고 지위(地位)가 높은 이를 가려 보냈던 것인데, 하물며 지금은 변경[邊圉]에 일이 있으니 더욱 현재(賢才)를 가려서 제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극치(曺克治)가 비록 궁마(弓馬)에는 능하나, 경상도 병사(慶尙道兵使)가 되어서는 1도(道)의 수령(守令)과 군졸(軍卒)들이 모두 심복(心腹)하지 않았으니, 남방(南方)의 근심이 없는 데에도 오히려 또 이와 같거늘, 하물며 북방(北方)의 사변이 있는 시기[有事之日]이겠습니까? 청컨대 조신(朝臣) 가운데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 물었는데, 영사(領事) 심회(沈澮)는 대답하기를,
"신은 조극치의 사람됨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무재(武才)가 있음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성건(成健)은 말하기를,
"신이 전에 물망(物望)이 무겁지 않다는 것으로 아뢰었으나, 다만 함께 일해 보지 않았으므로 조행(操行)307) 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집의(執義)의 말이 옳다. 그러나 조극치가 실수한 바가 있을 것 같으면 헌부(憲府)에서 반드시 듣고서 거핵(擧劾)할 것이다. 만약 물망이 없다 하여 논박(論駁)한다면 취진(驟進)308) 한 사람이 어찌 물망이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적변(敵變)을 만난다면 사력(死力)을 내어 싸움에 나아가는 것으로써는 이와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 평안도(平安道)에 사변(事變)이 있고, 조극치가 이제 부원수(副元帥)가 되었으니, 더욱 가볍게 바꿀 수 없다."
하였다. 헌납(獻納) 유경(柳坰)이 아뢰기를,
"절도사(節度使)가 어찌 늘 적(敵)에만 임(臨)하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근일의 오순(吳純)의 일이 또한 거울삼을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어찌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겠는가? 장수(將帥)의 직임(職任)은 모름지기 나이가 젊을 때에 미치도록 해야 하는데, 전문(傳聞)309) 한 일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으며, 나는 조극치의 실수한 바가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지사(知事) 홍귀달(洪貴達)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朝廷)에 장수(將帥)로 임용할 만한 자가 없으니, 조극치를 버리고서 누구를 임용하겠습니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310) 에 조극치가 자못 공(功)이 있었고, 그 뒤에 온성 판관(穩城判官)이 되어서는 궁마(弓馬)에 능하여 오랑캐[虜]가 모두 심복(心腹)하였으며, 비인 현감(庇仁縣監)이 됨이 미쳐서도 또한 실수한 바가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디 학문(學問)이 없으니, 어찌 사리(事理)를 알겠습니까? 그러나 근후(謹厚)한 사람이니 우선 시험적으로 써 보는 것이 가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조극치가 일찍이 승지(承旨)가 되었었으니, 어찌 일을 다스림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정석견(鄭錫堅)이 아뢰기를,
"이제 바야흐로 일이 있는데 가한가를 시험해 보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청컨대 명망(名望)이 높은 자를 가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들어주지 않았다. 홍귀달이 또 아뢰기를,
"《대전(大典)》에, ‘홍문관 관원(弘文館官員)은 한 달에 세 차례를 제술(製述)하되, 1년에 다섯 차례로 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한 자는 가자(加資)311) 한다.’ 하였는데, 근년(近年)에 게을리하여 제술을 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일일이 제술하게 하여 권려(權勵)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성건(成健)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를 중(重)하게 여기는 것은 문헌(文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사(文士)를 권려하는 방법을 소활(疎闊)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홍귀달이 아뢴 바 월과(月課)312) 의 일은 참으로 옳습니다. 또 사가 독서(賜暇讀書)는 반드시 홍문관 인원(弘文館人員)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또다시 문학(文學)이 있는 자를 정선(精選)하여 하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홍문관(弘文館)이라고 어찌 반드시 재주 있는 사람을 다 얻겠습니까? 그 심술(心術)을 겸해 취(取)해서 쓰기도 하는데, 다만 자주 가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모름지기 여러 해 동안 구임(久任)하여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홍문관원(弘文館員) 또한 어찌 한 관사(官司)에 오래도록 있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다만 일을 다스리는 관사는 비록 학문(學問)에 힘쓰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학업(學業)에 전념할 수가 없으니, 바쁜 직책으로 옮겨 제수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홍귀달이 아뢰기를,
"홍문관은 밀근(密近)한 지위에 있어서 법사(法司)에서 검핵(檢覈)하지 못하므로, 관원(官員)들이 많이 맡은 일에 부지런히 힘쓰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특별히 규적(糾擿)313) 을 명하되, 혹은 정원(政院)314) 으로 하여금 검거(檢擧)하게 하소서."
하자, 정석견(鄭錫堅)이 아뢰기를,
"예전의 홍문관 인원(弘文館人員)은 여러 해 동안 갈지 않았는데, 지금은 혹은 승지(承旨)가 되고 혹은 외관(外官)에 임명되기도 하는 까닭에 모두 구원(久遠)315) 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지 못하며, 혹은 〈심중(心中)에〉 희망(希望)하는 마음이 있기도 합니다. 경학(經學)을 궁구(窮究)하는 것은 장차의 기용(起用) 때문에 하는 것이니, 비록 끝내 한 관사에서 늙을 수는 없겠으나,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빛낼 인재[華國之才]를 얻겠습니까? 선왕조(先王朝)에서는 주문자(主文者)316) 가 만일 유고(有故)317) 하면 사람들이 주문(主文)의 돌아가는 데가 있음을 알았으니, 대개 물론(物論)이 이 앞서 정해진 때문이었습니다. 근자에는 주문(主文)할 사람이 없어 수의(收議)하기에 이르러서 정해지니, 대체(大體)에 손상됨이 없겠습니까? 만일 홍문관 인원을 그 직임에 오래 있게 하여 고금(古今)의 사변(事變)과 예악(禮樂)·문장(文章)을 알아서 그 재주를 이루게 한다면 어찌 이와 같은 데 이르겠습니까?"
하고, 특진관(特進官) 박건(朴楗)은 아뢰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을 집현전원(集賢殿員)으로 삼아 여러 해 동안 갈지 않았는데, 상참(常參)에 이르기까지 또한 수대로 모두 입참(入參)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본사(本司)에 사진(仕進)318) 하여서는 날이 저물어서야 파(罷)하였으니, 이르고 늦은 것이 승지(承旨)와 거의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경연에 당차(當次)된 자가 아니더라도 역시 모두 상참(常參)하는 것이 가하다. 집의(執義)319) 의 말도 또한 옳다. 그러나 한 사람을 어찌 한 관사에 오래도록 있게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정석견이 아뢰기를,
"문학(文學)하는 사람을 많이 얻기는 쉽지 않으니, 이를 할 만한 자질(資質)이 있으면 배양(培養)하고 성취(成就)하도록 하여 그 재주를 키우는 것이 가합니다. 또 이재(吏才)는 문학과 더불어 같지 않은데, 만일 드나들면서 일을 다스린다면 어찌 그 업(業)을 오로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가 독서(賜暇讀書)는 다른 관사의 문학이 있는 자를 다시 가려 보임(補任)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평하기를, "조극치(曺克治)는 일찍이 경상도 절도사(慶尙道節度使)가 되었는데, 가죽신[皮鞋]을 많이 만들어 그 집에 바리로 실어 나르고는 흥판(興販)320) 하여 이(利)로 삼았다. 또 군사(軍士)를 놓아 보내고 면포(綿布)를 거둬들여서 전역(傳驛)321) 에서 서울로 실어 나르다가 유곡 역리(幽谷驛吏)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우후(虞候) 이옹(李壅)이 또한 조극치의 남오(濫汚)를 미워하여 그 예방 진무(禮房鎭撫)에게 매를 쳤는데, 무릇 영중(營中)의 물건은 예방 진무가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변처녕(邊處寧)이 경상 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가 되었었는데, 유방 정병(留防正兵)322) 을 놓아 보내 면포를 많이 거둬들여 그 집으로 실어 나르니, 영졸(營卒)이 거의 비게 되었다. 임금이 재주를 숭상한 까닭에 무신(武臣)이 서로 이어서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조(曹)323) ·변(邊)324) 두 사람도 역시 발탁되어 제수되었으므로, 마땅히 모두 근신(謹愼)하여 지우(知遇)325) 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도 하는 바가 이와 같았으니, 비루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1책 26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70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물(人物)
[註 307]조행(操行) : 온갖 행실.
[註 308]취진(驟進) : 직위가 급작스럽게 뛰어 오름.
[註 309]전문(傳聞) : 전해 들음.
[註 310]이시애(李施愛)의 난(亂) : 세조(世祖) 13년(1467)에 영안도(永安道:함경도(咸鏡道)) 길주(吉州)의 호족(豪族) 이시애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북도(北道)의 수령(守令)을 남도(南道) 사람으로써 삼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북도인(北道人)을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 이때 이시애·이시합 형제는 관군(官軍)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음.
[註 311]가자(加資) : 자급(資級)을 올려 줌.
[註 312]월과(月課) : 매월 정례(定例)로 하는 일.
[註 313]규적(糾擿) : 규찰하고 적발함.
[註 314]정원(政院) : 승정원.
[註 315]구원(久遠) : 아득하게 멀고 오램.
[註 316]주문자(主文者) : 대제학(大提學).
[註 317]유고(有故) :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있음.
[註 318]사진(仕進) : 벼슬아치가 규정된 시간에 출근함.
[註 319]집의(執義) : 정석견을 가리킴.
[註 320]흥판(興販) : 물건을 흥정하여 판매함.
[註 321]전역(傳驛) : 역참(驛站).
[註 322]유방 정병(留防正兵) : 국경에서 외적을 방어하는 정규병.
[註 323]조(曹) : 조극치.
[註 324]변(邊) : 변처녕.
[註 325]지우(知遇) :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알아서 후히 대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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