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세 나라 가운데 우리는 신문 발행이 가장 늦었다. 한일 수호조약이 체결되던 1876년 무렵 일본의 개항장 나가사키(長崎), 요코하마(橫濱), 고베(神戶)에는 영어 일간지가 여러 개 발행되고 있었다. 일본어로 발행된 해외신문(海外新聞)(1865), 만국신문지(萬國新聞紙)(1867), 각국신문지(各國新聞紙)(1868)도 널리 보급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아직 ‘신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였다. 일본인들은 해외 진출이 활발했던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도 여러 종류의 신문을 발행했다. 영국인은 세 명이 모이면 클럽을 만들고 일본인은 신문을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蛯原八郞, 海外邦字新聞雜誌史, 1936)
우리는 정부 기구였던 박문에서 개화와 국민 계몽을 위해 처음으로 한성순보(1883)를 발행하였고, 서재필의 독립신문(1896) 이후에야 뎨국신문, 황성신문(1898)에 이어 여러 신문이 창간되면서 언론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기간에 한국어 신문이 한반도 바깥에서 발행된 한말에서 일제 기간을 거치는 동안에 해외에서 한국어로 발행된 신문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해외의 우리말 신문은 미주와 하와이 방면에서 가장 먼저 발행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중국의 상해와 천진 등지에서도 몇 종이 발행되었다. 한말에서 일제 초기까지는 미국령 하와이와 태평양 연안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海蔘威) 등지에서 발행된 신문이 있었다. 그 외의 지역에서 발행된 신문도 있었지만, 위의 세 지역이 해외 한국어 신문의 중심무대였는데 블라디보스토크와 샌프란시스코는 많은 한국 교포들이 살았기 때문에 신문 발행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상하이 독립신문을 필두로 중국과 만주지방에서 발행된 신문도 있었다.
미주에서는 신한민보가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1905년 11월 14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된 공립신보(共立新報)의 후신으로 1909년 2월 10일부터 신한민보로 제호를 바꾸어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던 기간에도 발행이 계속되었다. 상하이 독립신문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21일 상하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창간되어 독립운동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만주에서는 미주와 러시아령에 비해서 신문 발간이 시기적으로 좀 늦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한국어 신문은 일제하 한국 언론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켜야 할 것이다. 지역적으로 우리와 인접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건너가 살고 있었으며 만주가 한국에 이어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는 정치적인 상황 등이 만주의 한국어 신문을 한국 언론의 한 부분으로 만든 것이다.
1919년 이후에는 만주의 한국어 신문이 규모면에서도 가장 컸다. 해외의 한국어 신문으로는 유일하게 몇 종의 일간지가 발행되었으며, 국내에서 활약하던 기성 언론인들이 건너가 언론활동을 벌였고, 보급 범위와 기사 취급의 영역이 만주만이 아니라 국내와 중국 등지에까지 널리 펼쳐져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한다면 이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해외 발행 한국어 신문은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국내 언론 상황에 절망하여 망명했던 장지연, 신채호와 같은 당대의 논객이 참여했기 때문에 일종의 「망명 언론」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는데,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이 담긴 중요 사료이다. 해외의 신문은 동포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으며 국내의 신문은 다룰 수 없는 기사도 있어서 언론사 연구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미주 지역
우리 교포들이 해외에서 발행한 최초의 신문은 1900년대에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에 정착한 교민들이 발행한 프린트판 격주간 신죠신문, 新朝新聞(1904.3.27~1905.4.)이다. 하와이에서는 그밖에 몇 가지 신문이 발행되었는데, 포와한인교보, 布哇韓人敎報(Hawaii Korean Advocate, 1904.4~1940), 친목회보, 親睦會報(1905.5.8~1906.?), 한인시사(韓人時事)(1905.6.10~1906.9), 시사신보(時事新報)(1905.12.29~?), 자유보(自由報)(1907.9.30~1908.1) 등이 있었다.
하와이에서 노동 계약 기간이 끝난 교포들은 귀국하거나 하와이 현지에 그대로 머무는 사람도 있고,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경우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교민들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공립신보, 共立新報, The Korean News(1905.11.20)를 창간했다. 손으로 쓴 석판(石版) 인쇄 격주간으로 출발하여 1907년 4월 26일부터는 활판인쇄로, 5월부터는 주간으로 발전하였다. 대동보국회도 대동공보, 大同公報(1907.10.3~1908.4.9)를 창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 때 두 개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국내의 신문은 통감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미국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논조의 신문을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었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공립신보는 대서특필로 두 사람을 ‘애국의사’로 찬양하면서 스티븐스를 ‘한국의 공적(公敵)’으로 규정하는 지면을 발행했다. 서울의 대한매일신보는 공립신보를 인용하여 스티븐스 암살 사건을 보도하면서 강경한 반일논조를 펼쳤다. “오호-라 한국 독립은 곳 금일이오 한국 자유는 곳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오 우리의 억울한 것을 재판하는 날이니 …이 재판을 이겨야 우리 이천만의 독립이 될지니”(대한매일신보, 1908.4.22)라고 썼던 신보의 지면은 통감부가 발행인 배설(裴說, E.T.Bethell)을 기소하는 증거물로 제시하게 된다.
이민 교포의 본거지 하와이에서는 산발적으로 발행되던 여러 신문을 통합하여 한인합성신보, 韓人合成新報(1907.10.17~1909.1.25)가 발행되었다. 합성신보는 하와이 각 단체들이 제각기 발행하던 신문과 팜플렛 등을 하나로 합친 주간신문으로, 규모와 논조 면에서 하와이 한인사회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처음에는 등사판으로 매주 발간이었으나, 1908년 3월 5일부터 국문 활자판으로 제작 인쇄되었다.
하지만 한인합성신보는 제호를 신한국보, 新韓國報, The United Korean News(1909.3.15~1913.7.31)로 바꾸면서 한인합성신보를 계승한 신문을 자처하여 1907년 10월 22일 창간으로 표시했다. 이 신문은 제60호로 종간되기까지 국내에도 일부 배포되어 한국인의 민족의식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민보(1909.2.15~1968.12.25.)는 한인합성신보, 韓人合成新報를 계승하여 제호를 바꾼 신문이다.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교민단체가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지역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통합되어 국민회로 되면서 발행한 기관지였다. 따라서 신문의 계보는 한인합성신보→신한국보一국민보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민보 역시 상단에 한인합성신보가 창간된 ‘1907년 10월 17일 창간’임을 명기하였다.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 4면, 7단제 발행이었다. 처음에는 신한국보의 주필이었던 홍종표(洪宗杓)가 주간이었으나, 그 뒤 당시 하와이의 지도자였던 박용만(朴容萬)이 주필을 맡아 제작에 참여하였고 이승만(李承晩)도 제작을 지도하였다. 이 신문은 하와이 우리말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독립운동과 문맹퇴치 및 지식보급 등 교민의 계몽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한민보는 하와이의 합성신보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를 계승하여 창간되었다. 1908년 11월 하와이의 합성협회(合成協會)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통합을 결의하여 이듬해 2월 1일 국민회를 결성했다. 당시 합성협회는 기관지 합성신보, 合成新報를 발행했고, 공립협회는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고 있었다. 제118호까지 발행된 공립신보의 지령을 이어받아 2월 10일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했다.
이처럼 신한민보는 한인 단체들이 통합한 국민회의 기관지였으므로 창간사에서도 “민족 전체의 신문”이라고 밝히면서 재미 한인들을 대표하는 신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국내의 소식과 재외동포들에 대한 소식을 폭넓게 실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발행된 신문은 교민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많은 독립지사들이 참여하였다. 공립신보에 참여했던 임치정(林蚩正, 회계)과 이교담(李交倓, 인쇄인)은 1907년에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사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했고, 이 강(李剛)과 정재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해조신문과 대동공보의 주필이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 본토의 공립신보-신한민보에 여러 차례 글을 실었고, 하와이 국민보의 제작을 지도하였다.
3.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항일 언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망명한 독립운동 지사들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해죠신문, 海朝新聞(1908.2.26)을 시초로 대동공보(1908.11.18), 대양보(1911.6.5), 권업신문, 勸業新聞(1912.5.5)으로 항일언론의 계보를 이어 나갔다.
해죠신문은 러시아지역 최초의 우리말 신문이었다. 국내에서의 언론활동에 좌절과 한계를 느끼고 있던 장지연(張志淵)은 마침 소련영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스토크)에 거주하던 교포들이 신문발행을 계획하면서 장지연을 초빙하자 해외에서 언론활동을 벌이기로 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죠신문 주필로 붓을 잡았다.
해죠신문은 장지연이 도착하기 전인 2월 26일에 창간되었는데 장지연이 주필로 취임한 것은 3월 3일자 제 6호부터였다. 그러나 장지연의 이름이 지면에 주필로 기재된 날은 약 한달 뒤인 3월 22일자 제 22호부터였다. 해죠신문창간호에는 최봉준의 「발간하는 말」이 실려 있고, 제 3면에는 「별보 오됴약 맺기를 륵협하던 사실」이 한 페이지 전면에 실려있는데 이는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실렸던 「오건조약청체전말」을 한글전용으로 바꾼 기사이다. 판권에 발행 급 편집인으로 기재된 최만학(崔晩學: 萬學)은 사주 최봉준의 생질이며 그의 재산 관리인이기도 하였다.그러나 5월 26일 해죠신문은 제 75호를 마지막으로 아쉽게도 폐간하고 말았다. 마지막호에 게재한 「특별사고」를 통해서 “부득이 엇지할슈 업는 사졍이 잇슴으로 본일붓터 신문발간을 영영 졍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본사에 활판기계와 물품 제구가 다 구비하였으므로 동포 가운데 신문 사업에 뜻을 지니고 자본금을 모아서 신문을 계속 발간 할 사람이 있으면 본사로 와서 상의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해죠신문이 폐간되자 그 곳 유지들은 시설을 인수하여 곧 대동공보, 大東共報(1908.11.18)를 창간했다.(연해주의 大東共報는 미국의 大同公報와는 별개의 신문이다.) 주필은 미국에서 건너온 이강(李剛)과 정재관(鄭在寬)이 뒤를 이으면서 맡았다.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 발간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정재관은 공립신보의 주필(1907.4~1909.1)이었다. 공립신보의 임치정(회계)과 이교담(인쇄인)은 국내로 돌아와서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공립신보-신한민보), 블라디보스토크(대동공보), 서울(대한매일신보)의 세 지역 신문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동해 바다를 격한 지리적인 장벽을 넘어 긴밀한 삼각 연대를 형성하였다. 신문 참여 인물들의 인적(人的)인 유대도 형성되어 있었고 서로 기사를 전재하는 방법으로 국권회복이라는 동일 목표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러시아의 대동공보와 미국의 신한민보는 신문 보급도 상호 대행했다.
통감부는 해외 발행 신문을 모조리 압수하여 국내 유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해삼위 지방을 한인의 국권회복 하는 단체의 근거지로 삼도록 고취한 자, 암살자를 의사라 하는 사상을 널리 퍼지도록 힘쓰는 자, 폭도를 지목하여 국가에 충성하는 자라 하여 이것을 위하고 도와주는” 취지의 기사는 압수하라는 것이 ‘경찰사무개요’에 명시되어 있었다.(신보, 1910.5.14, 소위 신문 압수의 처분)
1909년 한 해 동안 통감부는 국내와 해외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 2만 947부를 137회에 걸쳐서 압수했다. 대한매일신보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포함하여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이 압수의 대상이었다. <표 참조, ‘조선총독부 施政年表’ 1909년>
대동공보는 러시아에서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는 관점에 대해 사례를 들어 비판하면서 재러 동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한일 강제합방을 반대하여 피로써 투쟁할 것을 강조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거사도 대동공보와 관련이 있었다. 대동공보는 1910년 8월 대동신보로 제호를 바꾸었으나 한일 강제합병 직후 연해주 군사령관의 명령으로 9월 1일에 폐간되고 말았다. 일본의 강점에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는 기사를 실었던 것이 폐간의 원인이었다. 대동공보가 폐간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지도자들은 새로운 신문의 발간을 준비하였다. 국내에서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항일의 붓을 들었던 신채호(申采浩)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문 발
1909년 신문 압수 부수
제 호
창간
압수
압수부수
발행지
신보(국한문)
04.7.18
7
12,722
서울
신보(한글)
07.5.23
7
3,592
서울
共立新報
05.11.20
4
6
미국, 오클랜드
新韓民報
09.2.10
31
1,211
샌프란시스코
合成新報
07.10.22
4
46
하와이
新韓國報
09.1.13
27
1,135
하와이
大東共報
08.11.18
57
2,235
블라디보스토크
합 계
-
137
20,947
-
간에 참여했는데 1911년 6월 5일에 창간된 대양보, 大洋報의 주필을 맡았다.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신한민보)-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서울의 대한매일신보가 논조상으로 긴밀한 연계가 생기는 것은 이같은 인적 유대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대동공보는 1909년 1월 18일자부터 광고란에 미국 공립신보의 발매를 대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편 신한민보는 대동공보의 미국 내 보급을 대행하였다. 대동공보에는 특히 함경도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동공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필 등의 편집 업무를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평안도, 충청도 출신이었다. 신문의 운영을 담당한 주주 등 간부들의 직업은 대체로 상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대다수는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들로 생각된다.
공립신보-신한민보와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과 기사를 자주 전재했다. 1909년 4월 11일자(30호)에는 「읍하(泣賀) 씨 영자보 확장이라가 언급 재정가(財政家)」라는 「론셜」이 실려 있는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 설(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이 한동안 정간했던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속간한 사실을 알리면서 한국인을 대변하는 배 설의 배일언론 활동을 극찬하였다. 5월 23일자(39호)에는 배 설의 죽음을 애도하는 논설을 실었다. 배설의 사망은 5월 1일이었는데 소식을 접한 대동공보는 사설로서 배 설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6월 3일자(42호)와 6일자(43호)에 실린「셜공의 약전」은 배 설 사망 직후인 5월 7일과 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글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이밖에도 4월 25일자(33호)에는 대한매일신보의 「국가를 멸망케 학부」를 전재하였다. 또한 4월 21일자(32호)에는「장 졍치가의 연셜」이라는 ‘별보’를 신한민보에서 전재했고, 5월 2일(35호)에는 신한민보의 「권고 내국동포」를 전재하였다.
대동공보는 1910년 8월 14일까지 발행한 후 제호를 대동신보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일합병 직후 러시아 연해주 군사령관의 명령으로 1910년 9월 1일자까지 발행한 다음에 폐간되었다.대동신보는 재 러시아, 재 중국 동포들이 일본의 조선 강점에 대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 기사 때문에 연해주 총독 운떼르베르게르가 1910년 8월 24일에 폐간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국내에는 한일합방이 공포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바로 그 시점이었다.
4. 한일합방 후의 신문 발행
대동공보가 폐간되자 유진률을 비롯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지도자들은 새로운 신문의 발간을 준비하였다. 신채호(申采浩)는 대동공보가 폐간될 무렵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는데 그도 신문 발간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진률을 중심으로 신채호, 안종호(安鍾浩), 최재형(崔才亨), 이종호(李鍾浩), 김병학(金秉學), 이 강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연해주 군무지사(軍務知事)에게 신문 발간을 청원했다.
이리하여 1911년 6월 5일 대양보, 大洋報라는 제호의 새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대동공보가 폐간된 지 10개월만이었다. 대양보는 대동공보와 마찬가지로 주 2회(목, 일) 발행 신문이었다. 대양보의 임원은 사장 최재형, 주필 신채호, 총무 차석보, 발간인 김대규, 회계 김규섭, 노어반역 유진률, 서기 김만식, 집금계(集金係) 이춘식(李春植)이었다.
신채호가 주필을 맡은 대양보는 창간호부터 일본의 한국통치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등 배일사상의 논조로 발행되었다. 국내에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활동했던 신채호는 망명객이 되어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대양보의 항일논설에 대하여 일제의 헌병기관 첩보원들은 “일본의 시정(施政)에 대하여 독필을 농(弄)하고 배일사상 고취의 문자를 연(連)잇는 등…”이라 보고하고 있다.일제의 강점 후 국내에는 민족언론이 모두 폐간되고 없었던 때였다. 대양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에는 유진률이 취임하였는데 유진률과 이종호의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 9월 14일자로 유진률이 사임하고 말았다.
대양보는 국내로도 반입되었으나 창간 직후부터 총독부는 들어오는 신문을 압수하기 시작했다. 대양보는 현재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지면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보와 경무월보, 警務月報에 실린 기록에 의하면 총독부 경무국은 7월 2일에 발행된 제 3호를 7월 12일자로 치안방해라 하여 압수한 뒤로부터 다음과 같이 국내로 반입되는 대양보를 매호 압수하였다.권업신문은 1914년 9월 권업회가 강제해산 당하면서 더 이상 발간할 수 없게 되었다. 3년에 걸쳐 발행된 지령은 126호였다.
1917년 6월 22일(러시아 력)에는 니콜라스크에서 주간으로 청구신보가 창간되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지면이 6호에 불과하다. 이 신문은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들이 발행한 것이라 하며, 윤해가 주필을 맡았고, 아울러 조완구, 박은식, 남공선도 주필로 활동하였다.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같은 해 7월 8일(러시아 력) 주간 한인신보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1919년 8월 21일 상해에서 이광수 등이 창간한 독립신문의 블라디보스토크 지방 보급을 대행했다. 상하이 발행 독립신문은 매호 300부씩을 한인신보로 보냈는데 주필 김하구가 36호(1920.1.10)부터는 무슨 사정이었는지 이를 배달하지 않고 은익했다. 김하구는 기왕에 배달했던 신문지대 360여원도 독립신문사에 보내지 않아서 독립신문사는 김하구와의 계약을 파기했다.한인신보는 1920년 4월 무렵까지 발행되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현존하는 지면은 1918년 1월 13일자 제 26호까지 13호가 남아 있다. 한인신보의 주필은 장기영(張基永), 김하구(金河球) 등이었다. 장기영은 서울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간도 소영자(小營子) 중학교와 나자구(羅子溝) 무관학교 교사로 활동한 인물로 이동휘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김하구는 함북 명천 출신의 귀화 한인으로 역시 와세다대학 출신이며, 1917년 7월 주필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치따시에서는 월간 대한인정교보가 발행되었다. 대한인정교보는 1912년 1월 2일 월간 잡지 형태로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연해주에서 권업신문이 발행되기 전에 이 강, 정재관 등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것이다.이들은 미국에서 공립신보를 발행한 경력이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에서도 주필로 활동하였는데 치따로 가서는 이 강이 대한인정교보의 주필을 맡았다.
이광수도 1914년에는 이 잡지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이광수는1910년부터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11월에 사직하고 상해로 갔는데 그곳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그는 유럽을 거쳐 미국에 갈 계획으로 1914년 1월 시베리아까지 갔다가 치타에서 시베리아 지역 국민회가 발행하던 월간 대한인정교보의 제작을 도왔다. 그러나 8월에 세계 제 1차대전이 일어나서 이 신문을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되자 국내로 돌아왔다가 1915년 5월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광수는 그 후 1919년 8월 21부터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했고, 같은 무렵에 신채호도 상해에서 신대한을 발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장지연, 신채호 같은 당대의 논객들이 참여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던 사람과 미국의 신한민보 주필이었던 정재관도 신문 발행에 관계하였다. 불편한 교통 사정을 감안할 때에 당시 언론인들이 국내에서 연해주와 미주를 넘나드는 광범한 지역을 활동영역으로 삼아 언론활동을 벌였던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는 국내의 민족 언론과 미국, 연해주를 하나의 언론권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신문이 수행하였으며 국내와 해외의 동포들에게 신문이 독립의 의지와 정신을 심어주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죠신문, 대동공보, 권업신문은 국내에도 유입되었으며, 만주와 미국에까지 보급되었다. 반면에 국내의 신문으로는 독립신문에서부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와 미국의 신한민보도 연해주에 보급되었다.또한 이들 신문은 서로 논설과 기사를 전재하였는데 이는 국내, 미국, 연해주의 신문이 국민계몽과 국권의 수호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보급에 있어서도 이들 신문은 상호 대리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5. 미국과 러시아 발행신문의 여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스와 러시아의 연해주의 신문은 비슷한 조건에서 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는 공립신보-신한민보로 이어진 신문이 장기간 계속되었던 반면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하나의 신문이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짧은 수명으로 끝나면서 여러 이름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본국과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는데도 왜 신문이 미국에 비해 번창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경제적으로 미국이 더욱 풍성했던 반면에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여건이 어려웠고, 2) 정치적으로도 러시아에서는 혁명 이후에 신문발행의 규제가 강화되고 허가제를 시행하였으며,
3) 연해주는 일본과 가까웠기에 일본의 간섭이 미칠 수 있었던 지리적인 불리함도 작용했으며,
4) 연해주 방면 교포들의 갈등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말에 뿌리를 내린 이 지역의 언론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 내려왔다. 카자흐스탄의 한인 집단 정착지인 크질오르다에서 1938년에 창간된 레닌기치는 수도 알마티로 자리를 옮겼으며 1991년에는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뀌었다. 중앙아시아 각지로 강제이주 당한 후 스탈린의 문화 말살정책으로 언어와 학교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교포들이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신문의 힘이었으며 한말의 선각적인 우국 언론인들이 세운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그러나 한때 1만 9천부에 달했던 발행부수가 1997년에는 10분의 1도 못되는 1천7백여 부로 크게 떨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때 50여명이나 되었던 기자도 지금은 타슈켄트 등 특파원 4명을 포함해 8명뿐이라고 신문은 보도했다.
러시아 지역에서의 한국어 신문은 구한말부터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는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언론으로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하였으며, 혁명의 와중에는 공산주의 사상의 선전과 일본제국주의의 타도를 그 기치로 내걸었다. 그리고 1922년 혁명이 수행된 이후 특히 1928년 이후에는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목표 하에 생산량의 증대와 공산주의 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소련의 제 1차,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던 시기인 1930년대 간행된 한글 신문과 잡지는 소련 당국의 철저한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간행되었던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우리말 신문은 항일운동을 연결하는 구심점이었고, 국내와 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선전기관이었다. 두 지역의 독립운동사 연구의 일차 사료는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