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랑가몰라 우리들의 늙은날
-사적(私的)버젼(version)의 순천여행기-
김병기(13회)
의사(義士)로 동상이 설 뻔하다
5월은 바쁜 달이다. 어린이날(5.5) 어버이날(5.8) 스승의날(5.15) 박정희의 날(5.16) 전두환의 날(5.17) 부처님 오신날(5.17) 광주민주 항쟁의 날(5.18) 심지어 종합소득세까지 납부해야하는 5월달에 순천사범 재경동창들은 해마다 봄소풍을 다녀왔다.
올해는 순천에서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해서 순천을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일흔이 넘은 늙다리들이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더구나 동창회에서 1박2일의 버스여행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순사동창회에서는 어려운줄 알면서도 이 행사를 해마다 하고 있다. 이것은 순천사범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만큼 짙기 때문이리라.
5월13일은 날씨도 쾌청했다. 차창으로 스치는 산하는 온통 푸른 색이었다.
"젊은 베르테르"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사랑하는 롯데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유럽의 18세기는 온통 푸른색으로 범벅되었다. 우리들도 18살 무렵에 "젊은 사범생의 슬픔"과 희망을 순천에서 만끽했었다. 그래서 순천을 찾아가는 우리들은 가슴속까지 푸른색으로 출렁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도저히 이번여행에 참여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지난3월20일 오후 4시경 일이다. 노량진역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큰길이 마비되어 버리고, 지나는 차량들이 클랙션을 울리며 야단법석이었다. 건장한 30대 장년이 길가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쇠로 만든 큰 쓰레기통을 번쩍번쩍 들어서 도로가운데로 던지고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튀어나온 유리병들이 자동차바퀴에 폭죽처럼 뻥뻥 터졌다. 학원가에서 나온 젊은이들이나 행인들은 멍하니 술취한 장년을 쳐다보기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몇분은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구경만 할수는 없었다. 나는, 19살에 쓰러져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칼을 뽑아 혁명을 일으킨 서재필이 태어난 보성사람 아닌가.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나철의 고향인 보성출신 아닌가. 차별받은 서자로 태어나 일생을 머슴살이만 했던 땡무식 일꾼이 지게를 벗어재끼고 의병대장이 된 안규홍의 고향인 보성사람 아닌가. 더구나 배움으로 가르칠 신성한 사명
을 가진 순사출신으로서, 6,25때 순천학생중 제1호로 학도의용군이 된 보성출신 선병기의 이성동명(異姓同名) 의 후배로서 남들처럼 구경만 할 수 없었다.
난동을 부리는 주정뱅이에게 달려들면서 호통쳤다." 너,이 자식/ 무슨 짓이냐"
"
" 이 새끼는 뭐야/ 허허 좃만한 것이 끼어드네" 주정뱅이는 54키로의 나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서 시멘트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그녀석은 힘이 항우장사였다.
그리고는 나를 짓밟고 무댓보로 두들겨 팼다. 육중한 쇠쓰레기통을 들어서 내 대갈통을 향해 던졌다.
나는 기민하게 도주하여 머리가 박살나는 것을 면했으나 또 그녀석에게 붙잡혀 계속 구타당했다. 마침 지나가는 경찰차가 발견하여 나를 구출해 주었다.
나는 행운아다. 때맞추어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맞아죽었을 것이다. 군대에 가지않았던 나로서는 제대로 한번 뚜드
러맞아 보았다. 온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아랫니 두개가 뽑혀 철사로 얽어야 했으며 (결국 뽑아야한다고 하지만 버티고 있다) 2주정도는 누워서 잠자기도 어려웠다.
이런사정을 듣고 13회총무 김용래는 빤스밑에 생리대처럼 복대를 차고다니면 반듯이 누울수도 있고 아픈 허리가 낫는다고 하여, 나는 복대를 차고 다니고 있다.
만일 내가 3월20일 죽었다면 정의를 실천하다 죽었으니 의사(義士)로 추앙될 것이며 광화문에 서있는 세종대왕 동상처럼 내 동상이 노량진역에 큼직하게 서게 되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도
용감한 할아버지로 실리게 되었을 것이고 장례식도 사회장으로 호사스럽게 치루어졌을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나는 죽어서 의사가 되는 명예는 얻지 못했으나 반가운 동문들과 다시 순천을 찾아오는 기쁨을 나눌수 있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경제학자 로 꼽히는 맨큐(하버대교수)는 그의 경제원론책 첫 페이지에 인간행위의 제1원리로 모든선택에는 대가(代價)가 있다고 했다. 나는 객기로 용감한 노인이 되려다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고통을 대가로 치루어야 했다. 오늘까지도 잘한 일인지 못한일인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순천여자의 똥
아침 여덟시에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들은 새로생긴 고속도로 때문에 한시도 못되어 순천에 도착했다.
점심먹은 식당이 있는 곳이 연향동이라고 하나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생목동 조례동 이래야 정 이 뚝뚝 떨어진다. 허나 음식도 맜있었고 분위기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해마다 여수 순천을 찾아온것은 바다를 구경한다거나 배부르게 먹기위해서 온것이 아니다.
대서양에 잠겨 버렸다는 아틀란티스( Atlantes)처럼 역사의 바다로 사라져버린 모교를 회상하면서. 남해안에 묻고 온 우리의 청춘시대 (靑春時代)를 건져올리기 위해서다.
순천은 우리에게 백범(白凡)의 상해이며 정다산(丁茶山)의 강진이다.
순천은 첫사랑의 유적지이며 푸르고 깊은 젊음의 동굴이다.
순천에 오면 일상의 대화도 청춘의 밀어로 승화된다.
순천에 와선, 너무 가난해서 학교다닐 때가 부끄럽다고 위악적(僞惡的)인 말조차 할수가 없구나.
50년전의 순천은 장대다리를 경계로 서쪽의 중심가와 동쪽의 후미진곳으로 나뉘었다. 사범학교는 동쪽의 동쪽으로 말이 순천시내이지 깡촌이나 다름없다. 나는 30개월의 순천생활(방학 2개월을 빼면 1년10개월씩3년)중 몇달을,순천역에서 시내로 올라가면서 장대다리가 시작되는, 강가의 함석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니 여천군 삼일면 흥국사 주지의 아들인 정헌화의 하숙집에 얹혀서 살았다. 장대다리에 매
미처럼 붙어있는 집에는 마당도 없었고 변소도 없었다.
밥만 먹으면 장대다리에 나와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다리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뜸한 밤이면 연애대장 정헌화( 15회 정송자와 결혼했다.)는 빳빳한 그것을 흔들면서 강물에 오줌을 갈겼다. 물론 모범생인 나는 소변을 강물에 얌전하게 누었다.
문제는 똥이었다. 하숙집에서 20여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강기슭에 드럼통을 묻고 거적대기를 친 옥외변소에서 대변을 보았다. 스토리가 되려고 하숙집주인에게는 예쁜 순천여고생 딸이 있었다. 방정맞은 정헌화는 세라복입은 순천여고생이 똥을 누려고 변소에 가면 뒤따라가서 자기도 똥이 마렵다고 헛기침을 하고 땅바닥을 발로 차곤했다.
물론 나도 여러번은 아니고 한두번 순천여고생이 눈 예쁜 똥을 본일이 없지않다.
순천을 상징하는 동천의 강변에 꽈배기과자처럼 동그랗게 눈 순천처녀의 똥, 아름다운 순천여자의 똥, 순천어머니의 똥, _____
똥이란 건강한 생명체의 창조적 배설물이다. 똥은 배출한 생명체의 건강성을 조형시킨 생태적 척도이다.
이번 순천정원국제박람회의 중심공간인 호수정원에 동그란 산처럼 만든 조형물은 이런 순천의 여성상과 생명력을 구상화시킨 것이 아닐까?
장대다리아래 동천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장대다리 남쪽 300여미터에는 광주 보성으로 가는 철로가 동천을 가로 지른다.
하루는 동천의 제방을 따라 내려가 많은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동천 위의 철로를 건너보기로 했다. 사람들을 따라 나는, 40여센치 간격으로 걸쳐있는 철로의 침목을 딛으면서 조심조심 건너다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발밑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물도 보통강물이 아니었다. 울돌목처럼 물결이 거세고 심청이 뛰어든 인당수처럼 시퍼렇게 깊어서 만약 떨어진다면 꼼짝없이 죽고야말 무서운 강물이었다. 그때부터 다리가 풀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 어지러워 사방이 빙빙 돌아 한발도 뗄수가 없었다. 정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쪽팔리지만 쭈그리고 앉아서 두손과 두발로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린애나 여자들도 잘 건너다니는 동천위의 철로를 못건너듯
나는, 모든 사람이 잘 하는, 풍금도 못치고 자전거도 못타고 운전도 못하는 절름발이 인생이 순천, 바로 순천, 내가 들떠서 찾아오는 순천에서 비롯되었다.
그래도 순천은 나의 제2의 고향이다. 정신의 고향이며 청춘의 본적지이다. 동천은 세느강이며, 장대다리는 미라보다리였다.
미라보다리(장대)아래 세느강(동천)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서 있네.
흐르는 세느강물처럼
우리의 사랑도 흘러만 간다.
........................................
우리의 삶은 이다지도 고달프더냐
우리의 사랑은 가서는 돌아오지않고
미라보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서 있네.
아폴리네르
그렇다. 우리는, 아니 여학생들도,눈비 후려치는 순천(順天)하지 않는 날에도. ,
장대다리를 우산도 없이 건너면서 젊음의 강을 건넜다.
변했지만 변하지않은 사람들
우리는 오랜만에 동문들을 만나면 속으로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다. 장동건이나 배용준보다 잘생겼던 녀석들이 후루시쵸프나 아브라함 링컨처럼 찌그러져서 나타나고 김지미나 최진실보다 예뻐서 남자들의 혼을 빼버렸던 여자들이 백금녀나 임꺽정의 여동생처럼 변해서 나타날때는 입이 벌어지지않을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내 옛날로 돌아가고
기쁘게 오늘로 함께 돌아 온다.
변했지만 변하지않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농업사회때 도농소도시에서 만난 동창이다. 우리는 10대후반의 사춘기때 같은 학교를 다닌 동문이다.
이성을 향한 감정소모가 격렬했던 때 같은 캠퍼스를 거닐었던 친구들이다.
시간당 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에 같은 목표를 향해 모였던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다. 반 세기가 흘렀다. 아,''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어찌 우리가 시들어간다고 세월을 탓하랴.
아,아, 우리는 동창 이상의 동창이고, 사범(師範)이상의 사범으로서 동문이상의 동문이다.
성별이 초월된 친구이상의 친구이며, 같은 길을 걸었던 동료이상의 인생속의 동반자가 되었구나.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여론조사때 70이상의 기타항목으로 분류되는 부록의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전립선비대증의 질질 새는 오줌으로 몸뚱이는 더러워졌고
허망한 욕심으로 허파에 가득 찼던 바람이 빠지면서
난세(亂世) 에 난타(亂打) 당하여 몸을 똑바로 세우지도 못한다.
몰래 두른 복대가 빤스밑으로 흘러내리면서
내 인생자체가
유실되고 있는 것을
남들은,알랑가 몰라.
알랑가 몰라.
송춘강:
김병기친구!
바쁜사람이 긴 글 쓰느라 수고 많이 하셨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알랑가 몰라'? 내려 갈때 옆자리에서 너무 깊은 잠을 자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3.20.사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영특한 순사 출신은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텐데...?
그래도 착하게 살아 하늘이 도운 거네요.
어제 마침 13기 등산모임에 유금자와 황우다가 참석했는데 정헌화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춘회장의 여수친구들 옛날이야기가 나와 많이 웃었습니다.
발령이 안나 백수 생활 할때 여수친구들이 홀어머니만 계신 김진영씨 집에가 친구들이 모여
몇날을 뒹굴었으니그 어머니는 말도 못하시고 얼마나 힘들었을까.지금 생각하니 속없는
놈들이였다고....몸은 늙어도 추억은 젊어가는게 인생인가 봅니다.
건강 하십시요.
송춘강씨, 그 시절 그 추억 때문에 이제도 우정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이희옥:
허허,
병기씨의 글을 내가 잘 읽은 것을 병기씨는 알랑가 몰라.
정일성:
재미나는 단편을 읽는 느낌입니다. 훌륭한 자전입니다. 불의를 보고 그냥 넘기지 않는 용기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대학 연구팀은 노년을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습니다.
황혼을 노래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요? 그 동안 썼던 글들을 잘 정리하여 작품집을
남겼으면 합니다.
이홍기:
재미있고, 신나고, 시원하고, 구수하고 매력적인
보성 출신 대문호의 명문을 잘 읽었습니다.
자주 자주 솜씨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김병기 선배님, 감사합니다.
김진영:
하마터면 김병기 님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고 노량진역에 큼직하게 서 있는 동상이나 볼뻔했네요.
송춘강씨 말대로 ‘영특한 순사 출신은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텐데...?’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나이에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그 용기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마찬가지이지만 오래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솔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자주 올려서 재경 클럽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기 바랍니다.
김선태:
와! 우리 병기선배님이 드디어 멋진 추억담을 보내주셨네요. 그런데 아직도 그런 용기가 있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