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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운명과 함께 동맹을 맺은 연합군들이 뒤늦게 뛰어와 전장에 투입되었다. 아벨이 소리쳤다. 여기..! 누가! 누가 좀 도와줘! 죽는다고! 단장이 죽어간다고!! 타리온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젠마가 자신에게 기다리겠다고 한 마지막 목소리가 맴돌았다. 타리온은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사과꽃향기가 맴돌고, 타리온은 눈을 감자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가. 눈이 펑펑 내리는 설원에 젠마가 맨발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뛰어녔다. 타리온은 젠마를 무작정 쫓았다. 지금이라도., 죽기 전이라도 그녀에게 묻어둔 말을 하고싶었다. 목이터져라 사랑한다고 외치고싶었지만 말이 나오지않았다. 말이 나오지않는다면 품에 껴안아 입맞춰 제 사랑을 말해주고싶었다. 젠마, 제발 더이상 멀어지지마..
아벨의 처절한 외침이 들렸지만 타리온은 더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면서 눈앞에 젠마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새하얀 옷을 입고 맨발로 설원을 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타리온은 무작정 젠마를 쫓아 달렸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죽기 전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목이 터져라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로 전할 수 없다면, 품에 안아 입맞추며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젠마, 제발... 멀어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타리온은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환영 속 젠마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붉은 피를 흘리며 그는 겨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그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사...랑...해...젠마...영원히...널...
힘겹게 중얼거리던 타리온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아벨의 비통한 절규를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점점 사라졌다. 타리온의 눈에서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하얀 눈 위로 스며들며, 그의 심장은 천천히 멎어갔다.
타리온은 검은 터널을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서있었다. 어머니는 슬프게 웃고있었다. 내 아들.., 멋진 남자가 되었구나. ...사랑하는 사람도 생기고.
타리온은 절뚝이며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 어린 눈빛으로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의 모습에 타리온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전 아직도 많이 부족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어요...
타리온은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죄책감과 그리움, 슬픔이 뒤섞여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니다, 내 아들. 넌 최선을 다했어. 젠마를 향한 너의 사랑과 헌신을 엄마는 다 알고 있단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타리온을 위로했다. 그 손길은 세상 그 무엇보다 포근하고 평화로웠다. 타리온은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쌓였던 한이 마침내 터져나왔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힘들었어요...전 아직 젠마 곁에 있고 싶은데...
어머니는 흐느끼는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타리온의 넓은 등을 토닥이며, 그녀는 따뜻한 위안의 말을 건넸다.
이제 괜찮아, 내 아들. 언젠간 너희는 다시 만날 거야. 하늘나라에서 엄마가 지켜보고 있을게. 넌 아직 올 때가 아니란다.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타리온을 쑥 밀었다. 그리고 타리온의 감긴 눈꺼풀의 검은 배경에서 코끝에 일렁이는 사과꽃향기가 느껴지고, 흐느껴우는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타리온, 눈 떠... 제발 날 보고 웃어줘..
타리온의 감겼던 눈꺼풀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어렴풋이 빛이 보였다. 사과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누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젠마?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타리온이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흐릿했다. 하지만 서서히 눈앞의 광경이 또렷해졌다. 젠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아 있구나... 정말 다행이야...
젠마는 흐느끼며 말했다. 타리온은 멍하니 젠마를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만났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젠마가 더 생생했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타리온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목이 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젠마. 널 두고 갈 뻔 했어...
그는 젠마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젠마도 울음 섞인 미소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동안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며, 말없이 교감을 나누었다. 기적 같은 재회의 순간이었다.
젠마는 다급하게 말했다. 안돼, 상처가 낫지않았어요. 말하지 마세요. 기다려요. 젠마는 뛰쳐나가 의사와 간호사를 불렀다. 젠마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았다.
타리온은 젠마의 만류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었다. 조금이라도 젠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알겠어. 내가 무리하지 않을게. 넌 이제 울지 마. 응?
그는 아직 젠마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뺨에 묻은 눈물을 엄지로 살며시 닦아주었다. 그 따스한 손길에 젠마는 작게 웃음 지었다.
곧 의사와 간호사가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타리온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젠마는 한걸음 물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이번엔 안도의 눈물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났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타리온은 그런 젠마를 힐긋 바라보며 연약하게 미소 지었다.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의사는 타리온을보며 기적이라며 말했다. 타리온은 자초지종을 들었다. 젠마는 그동안 의술 마법을 익혔었고, 엘리시아의 모든 직위와 이름을 버리고 바르가스의 군의사가 되었다고했다. 타리온의 의식이 희미해져갈때, 젠마가 찾아와 상처를 정성껏 치료했다고했다. 다행히 장기를 빗껴가 회복 후엔 지장이 없다고했다.
타리온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젠마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런데 넌... 어떻게 군의관이 된 거야? 위험하잖아...
그는 아직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러 온 젠마. 그 사실을 되새길수록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타리온은 힘겹게 젠마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널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뻐. 하지만 이제 제발 위험한 짓은 그만둬. 알겠지? 난 네가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연인을 걱정하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젠마를 응시했다. 젠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건 절대 원치 않았다. 앞으로는 자신이 그녀를 지켜줘야 했다. 타리온은 그렇게 다짐했다.
젠마는 울컥한듯 타리온에게 다가왔다. ...전장에서 죽을뻔한 기사단장이랑, 군 의관 중에서 누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사랑한다는 말도 못했는데.. 어떻게 당신을 잊어버리고 아무것도하지않고 기다려요. ...이기적인사람... 젠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타리온은 눈물 흘리는 젠마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젠마를 끌어안았다.
그래... 내가 못났지. 널 너무 걱정시켰어. 하지만 넌 절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누구보다 희생적이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타리온은 젠마의 등을 토닥이며 따뜻하게 위로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사과꽃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미안해, 젠마. 널 많이 힘들게 했구나. 앞으로는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을게. 내가 너를, 우리의 사랑을 지킬게. 약속할게.
그는 젠마와 이마를 맞대고 깊이 눈을 마주 보았다. 애틋함과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깨달은 사랑. 이제 그 누구도 그들을 갈라놓을 순 없을 것이다.
사랑해... 정말 널 사랑해. 이 말을 몇 번이고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타리온은 젠마의 입술에 깊고 부드러운 키스를 남겼다. 눈물의 짠맛과 사과꽃의 달콤함이 어우러졌다. 그들은 한참을 끌어안은 채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그때 아벨이 들어왔다. 이크, 지금 타이밍이 아닌가? 젠마는 놀라 떨어졌다. 아벨! 아직 발목 손목 뼈가 다 안 붙었다고 말했잖아요! 목발도 쓰면 안돼요! 아벨이 말했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소드마스터가 휠체어라니 완전 모양빠지잖아
타리온은 아벨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전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전우이자 친구였다. 그는 아벨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아벨! 정말 살아있구나. 네 덕분에 살 수 있었어. 고마워.
하지만 아벨의 상태를 보고 타리온은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자신과 달리 아벨은 거동조차 힘들어 보였다. 타리온이 아벨을 향해 물었다.
넌 어떻게 된 거야? 부상이 심각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젠마 말대로 휠체어는 위험할 것 같은데?
타리온은 아벨이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동료애와 우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걱정 어린 시선이었다. 한편으로 젠마가 아벨의 상태를 꿰뚫어 보는 모습에 살짝 질투가 들기도 했지만, 아벨이 무사한 것에 안심이 되었다.
타리온은 아벨과 젠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쟁은 정말 많은 것을 앗아간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타리온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아벨이 말했다. 아, 그게 연합군들이랑 같이 단장을 업고 이동하다가 도저히 넘기 힘든 산이 나오는데 연합군들이 거길 가야한다잖아. 산길을 가면 적어도 다섯시간일것 같은데, 한시가 급하니까 단장을 업고 절벽을 올랐지, 그 과정 중에 손가락이랑 발이 좀 맛이갔어, 단장 정말 무겁더라. 아벨은 장난스럽게 웃었고 젠마는 다가와 치료 마법을 걸었다. 아벨! 웃을 일이 아니에요! 손가락이 얼마나 중요한 기관이라구요!
타리온은 아벨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아벨의 장난기 어린 성격은 여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타리온은 진심을 담아 아벨에게 말했다.
아벨, 정말 고마워. 그때 네가 날 버리고 갔으면 난 정말 죽었을 거야. 절벽을 오르다니, 미친 짓이었어. 하지만... 내 목숨의 은인이 된 셈이네.
타리온은 아벨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렸다. 그리고 젠마를 힐긋 바라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보니 손가락이 맛이 갔다고? 무슨 뜻인지 궁금한데? 손가락으로 뭐 해본 거야?
젠마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타리온은 웃음을 터뜨리며 변명했다.
농담이야, 농담. 아벨 말대로 손가락은 정말 중요하지. 어서 나아야 할 텐데... 젠마, 고마워. 넌 정말 능력 있는 군의관이야.
타리온은 아벨과 젠마를 보며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우애와 연인의 사랑. 두 사람 덕분에 힘든 전장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앞으로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리라 다짐했다.
아벨이 나가고, 젠마는 타리온을 바라봤다. ...당신이 나한테 칼을 들이밀고, 술 먹고 아무리 실수를하고, ....멋대로 껴안을려고해도 전부 용서해줬지만... ...이건 정말 용서해줄 수 없어요. ....타리온이랑 이야기 안할거예요. 다 나을때까지.
타리온은 젠마의 차가운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에선 실망감이 느껴졌다. 타리온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젠마... 정말 미안해.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경솔한 말을 해선 안 됐어. 장난이 지나쳤어.
타리온은 침대에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벨에 대한 질투심에 괜한 오해를 산 것 같아 후회됐다. 젠마의 노력과 마음을 알면서도 제대로 존중하지 못한 자신이 밉게 느껴졌다.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젠마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용서해줘, 제발. 내 잘못이야. 네가 얼마나 날 위해 희생했는지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내가 너무 유치하고 이기적으로 굴었지.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을게.
그는 젠마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타리온은 애가 타는 마음으로 젠마에게 말을 이었다.
날 믿어줘, 부디... 널 사랑하고 존중해. 내겐 너밖에 없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의 진심을 믿어주면 안될까.
타리온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저 침대에 누워 젠마가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 어느때보다 간절했다.
...그럼 우리, 진실게임해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저번에 술을 진탕먹고 엉망이 됐던 그 게임이 다시금 떠올랐다. 끝엔 젠마에게 노골적이고 음험한 욕망을 드러내고 다음날 젠마에게 손이 발이되도록 사과했던 그 게임이었다.
타리온은 젠마의 제안에 몸이 굳어버렸다. 그 게임을 다시 하자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당시의 자신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젠마에게 끔찍한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다음 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후회로 남아있었다. 타리온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젠마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아. 하지만 그 게임은 좀... 우리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어.
하지만 젠마의 표정은 단호했다. 타리온의 진심을 시험해 보겠다는 듯 그를 눈을 마주쳤다. 타리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가 원한다면... 그 망할 게임이라도 할게. 대신 약속해줘. 내 말이 지나치다 싶으면 언제든 멈추자고 해. 절대 참지 마. 알겠지?
타리온은 젠마의 손을 꼭 잡았다. 다시는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절대 술에 취해 이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젠마를 대하리라 다짐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타리온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할게. 음... 내가 술에 취해서 한 말 중에,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뭐였어?
...내가 처녀라서 마음에 든다는 말이요. 타리온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젠마는 술기운에 한 말이니 괜찮다며 용서했지만 역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보다. ...제가. ..정말 겨우 처녀라서 좋았어요? 그럼.. 처녀인 아무 여자면.. 다 좋은거예요?
타리온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젠마의 날카로운 질문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당시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상스럽고 모욕적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타리온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젠마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 절대 아니야. 난... 네가 순결하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너와 내가 서로의 유일한 사랑이라는 게 좋았던 거야.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게 말이야. 다른 여자는 상관없어. 오직 너만 사랑하고, 너만 갖고 싶은 거라고.
타리온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내가 술에 취해서 한 말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그런 말, 절대 안 할게. 넌 순결해서가 아니라, 너 자체로 사랑스러운 거야. 그걸 제대로 표현 못 해서 미안해. 용서해 줄 수 있겠어?
타리온은 젠마의 손을 꼭 잡고 깊게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진심어린 사과와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젠마는 말했다. ...용서할게요. 젠마는 말했다. ....사실, 타리온을 쫓아다니던 그 달리아라는 하녀 때문에 질투심에 잠을 못 잔 적이 여러번 있어요. 타리온은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스러운 속마음 고백에 가슴이 떨려 저려왔다. ...그 여자.. 아직 마음에 품은거 아니죠?
타리온은 젠마의 고백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질투에 잠 못 이루고 괴로워했다니, 안타까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타리온은 젠마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깊이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인다고. 달리아는 그냥 하녀일 뿐이야. 우연히 몇 번 마주친 것 뿐인데 네가 오해한 모양이구나.
타리온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젠마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솔직한 마음에 애정이 느껴졌다.
응, 네가 날 그렇게 좋아해주는 줄은 몰랐어. 고마워, 젠마. 앞으로는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타리온은 젠마를 꼭 껴안았다. 상처 입은 몸이 아파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타리온은 젠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너만 사랑해, 영원히. 절대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지 않을 거야. 내 마음속엔 너 하나뿐이라고, 젠마.
그는 입술을 맞추려는 듯 젠마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뺨을 간지럽혔다.
..겁쟁이.. 그렇게 기회를 여러번 줬는데... 젠마는 먼저 다가와 타리온에게 입맞췄다.
타리온은 젠마의 다가옴에 놀랐지만, 곧 그 달콤한 입맞춤에 몸을 맡겼다. 젠마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며 깊이 키스했다. 그녀의 혀를 느끼며 한없이 빠져들었다. 한참을 탐하듯 입맞추다 조심스레 입술을 떼며 젠마의 얼굴을 쥐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겁쟁이긴 하지... 네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계속 눈치만 보다니... 미안해 젠마.
타리온은 젠마를 꼭 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뜨겁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젠 주저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대로... 내 모든 걸 너에게 주고 싶어.
그의 손이 천천히 젠마의 등을 쓰다듬더니, 옷깃 사이로 살며시 파고들었다. 타리온은 젠마의 맨살을 탐하듯 어루만지며 점점 더 깊숙한 곳을 향해 손을 내려갔다. 숨이 거칠어지고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가도 될까? 젠마... 내가 미칠 것 같아...
타리온은 격정에 휩싸인 나머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젠마는 버럭 화를 냈다. 안돼요! 금방 의식을 찾은 사람이 무슨소릴 하는거예요! 얼른 안정을 취해요. ....다시 잠들기 위해 눈 감았다가 다시 눈 뜨지 않을까봐 불안하고.. 무섭다구요. 젠마는 아가씨 시절 감정표현을 곧잘 하지않고 큰소리를 내거나 화를 낸적이없었는데.., 자신을 걱정해서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타리온은 이런 자신이 스스로 달갑지않았지만 젠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굴이 점점 화끈 달아올랐다. 젠마가, 젠마 아가씨가 나를 걱정해주고있다. 그것도 나를 잃을까봐 무서워하면서... 어떡하지..., 오랜만에 깨어나서 봐서 그런가, 젠마가 너무 예쁘다. 치료를 위해 깔끔하게 틀어올린 머리카락과 새하얗고 작은 귀, 그 귀를 따라 내려가는 흰 목선..,
타리온은 젠마의 화내는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준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젠마에게 걱정을 끼쳐 죄송했다. 타리온은 젠마의 눈물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안해 젠마. 내가 무모했어. 그래, 넌 내가 빨리 회복되길 바라는구나. 앞으로는 네 말에 잘 따를게. 절대 무리하지 않고 제대로 쉬면서 치료에 전념할 거야. 약속해.
타리온은 젠마의 손을 꼭 잡았다.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 마. 다시는 널 혼자 두고 잠들진 않아.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언제나. 넌 이제 나 없인 못 살 거라고.
장난스레 윙크했지만, 그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타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젠마에게 빠져드는 걸 느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온 마음이 녹아내렸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말 고마워 젠마. 날 살려줘서, 내 곁을 지켜줘서. 넌 날 포기하지 않았어. 그 마음, 잊지 않을게.
타리온은 젠마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젠마라는 존재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를 떠올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 되살아났다. 타리온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살아있음에, 그리고 젠마와 함께 있음에 감사했다.
젠마는 타리온의 머리카락을 옅게 웃으며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예쁜 미소.., 그렇게 타리온이 보고싶어했던 젠마의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오자 달콤한 사과꽃 냄새가 느껴졌다. 회복하고나면 같이 맛있는는걸 먹으러가요. 젠마가 먼저 타리온의 볼에 입맞췄다. 젠마가 타리온의 팔을 가져와 주사를 놓기 위해 타리온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꼼꼼하게 팔을 메만지며. 따끔해요.
타리온은 젠마의 상냥한 손길이 머리를 쓸어내리자 울컥 복받쳤다. 그리웠던 젠마의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마주하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타리온은 감격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다. 젠마의 달콤한 사과꽃 향기를 맡으며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응, 꼭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가 좋아하는 거 많이 사줄게. 내가 젠마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젠마가 볼에 입 맞추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달았다. 타리온은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젠마가 자신의 팔뚝을 잡고 메만지는 게 느껴졌다. 주사바늘이 살을 찌르자 따가운 통증이 밀려왔다.
아얏, 정말 따끔하네. 근데 젠마가 해주는 거니까 참을 만해.
타리온은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곤 젠마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며 볼멘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너무 아프잖아. 이런 위험한 짓은 그만둬. 내가 아파서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이내 씩 웃으며 젠마를 달래듯 말했다.
농담이야. 고마워 젠마. 정말 날 위해 애써주는구나. 널 위해서라면 난 이런 고통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