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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산본당 설립 이전
군산지역의 천주교 본당 설립기도는 1897년, 1900년, 1925년 이렇게 3회의 시도가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시도는 1897년 당시 조선교구장 뮈델 주교의 의지가 있었으나 나바위 성당의 설립으로 뒤로 밀렸다가, 개항 후 군산에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동영고개(현 전북은행 군산지점부근)의 주택 및 토지를 1000냥에 구입하기로 하였다가 재정 및 효율성 문제(당시 군산에 천주교 신자가 1가구)로 다시 밀렸으며, 3번째로 전라도 신부들 특히 나바위 본당과 전주본당의 신부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나 이마져도 재정문제로 물거품이 되었다.
1800년대 군산지역 임피, 서수, 성산, 내흥동, 옥산 등지에 교우촌이 있었다.(문헌에 나타난 군산지역 최초의 공소는 1882년 사옥개와 덜듬이에 개설된 공소가 가장 오래 된 공소이다. 그러나 1885년 조불수교이전 박해시대 선교사 신부들이 박해를 두려워해 선교일지 등을 정기적으로 파기하여 이전자료를 알 수 없을 뿐이지 군산지역에서도 그 이전에도 공소가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1890년대 현재의 성산면 산곡리에 산곡공소(1880년대의 성산면 산곡리 소재 산골공소와는 다른 장소 이거나 아니면 신자소유의 기존 산골공소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러한 사실과 부안지역의 천주교 시작점인 무내미 공소 설립(천주교전주교구사에 의하면, 정복조가 1857년 임피 산곡공소에서 부안 주산면 덕림리(무내미)로 이사해 옹기가마를 옮기고 복음전파를 시작. 물론 전에 석포리에 대소공소가 있었다하나 부안지역의 복음화는 정복조에 의해 이뤄지기 시작함.)과정을 미뤄봐서 산곡리는 군산지역 교우촌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를 설치하고 전라도 이남지역의 선교사 신부들이 타지역으로 이동할 때 쉬어가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800년대 후반 군산지역 교우촌의 신자는 약110여명이었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외지에서 사람들이 군산(당시 옥구현 북면)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신자들도 1가구 2가구 이사하기 시작하여 1914~1915년경 외지에서 군산지역으로 이사온 신자들이 모여 군산항공소가 개설 되 성사가 이뤄졌다. 천주교 전주교구사에 의하면 '1918년 군산지역 천주교 신자는 약 60여명 이였으며, 대부분이 외지에서 신흥도시인 군산에서 상업을 하기 위해 개성, 서울 평양, 황해도, 경기도 등지에서 모여든 교우들이었다.'다고 기술하고 있다.
1923년~1925년까지 극심한 가뭄으로 대흉작이 발생하였고, 군산은 군산항 건설로 노동력이 필요해지고, 미면지역의 간척사업으로 소작농도 필요해지면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 당시 교우촌의 많은 신자들도 군산으로 모여들면서 군산지역의 신자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 1928년경 신자는 약 200여명 이었다. 이러한 신자들은 선교 또는 전교에 의하여 신자들이 증가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 교우촌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2. 군산 본당 설립
신자들이 늘어나자 1920년경(전주교구사에는 1928년으로 기술) 신자들이 성금 500원을 모아 신영정(현 신영동, 현재의 중앙동사무소)에 14칸의 와가를 매입하여 경당으로 사용하면서 이때부터 현대적 의미의 군산항 공소가 탄생하였다. - 드망즈주교일기에 따르면 1921년 군산방문하여 공소방에서 쉬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때 둔산의 옥구공소도 언급되어진다.)
1928년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의 군산항 공소 사목방문 시 군산항 공소 신자들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군산항 공소의 규모 및 신자들의 열의를 느끼고 군산 본당설립에 긍정적인 검토를 하게 되었다.
1929년 3월 대구교구 참사회에서 군산성당 설립을 의결하였고으며, 1929년 5월 6일 군산항 공소 신자들은 군산항 공소의 본당승격을 감지하고 당시 군산항 공소회장인 김용진을 중심으로 ‘혈루회’를 조직하고 당일 성전건축헌금으로 2,000원을 모금하였다.
1929년 5월 26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군산항 공소를 군산본당으로 승격하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새신부인 김영구 신부를 발령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산성당에 사제관이 없는 것을 알고 있던 드망즈 주교는 김영구 신부를 군산본당 주임신부 겸 나바위 본당 보좌신부로 발령을 냈다.
군산본당의 시작은 1929년 5월 26일 김영구 신부의 군산본당 주임신부 최초 발령을 받음으로 시작하였다.
1929년 6월 초 나바위 본당 주임신부인 이약슬 신부와 군산성당 주임신부 겸 나바위 본당 보좌신부인 김영구 신부를 신자들이 나바위 본당으로 모시러 가서 기차로 강경부터 익산(당시 이리)을 거쳐 군산까지 모시고와 현 신영동에 있던 군산항 공소에서 성전건축염원 기도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둔율동 대성원의 성전 개보수 완공 전까지 김영구 신부의 성사 집전은 군산항공소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초 대구교구로부터 1,000원을 원조 받고, 신자들이 모금하여 군산보통학교 옆에 있던 대성원(옥구 군청 구 관사)을 3,500원에 매수하여 성당으로 개수하고, 부속건물은 사제관으로 개수하는 공사를 하였다.
1931년 1. 19. 본당의 면모를 갖춘 군산성당은, 나바위 성당에서 김영구 신부를 기차와 자가용으로 모시고와 신부님 환영식 및 군산성당 축복식을 하였고 당일 김영구 신부는 나바위 본당 보좌신부의 꼬리표를 때고 군산본당 주임신부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신자는 본당에 한인 200여명, 일본인 60여명, 합 260여명과 공소에 600여명 합계 860여명의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성당이었고, 1932년 초 본당들의 관할지역 변경이 전라도 감목대리구 김양홍 교구장에 의해 이뤄지면서 군산, 옥구, 임피, 함열, 고군산도 섬지역(어청도, 연도, 개야도부터 비안도까지 포함), 익산 남부와 동부지역(현 익산시내 및 황등, 금마, 새실공소 포함)을 아우르는 지역을 군산 본당의 관할지역으로 하였다.
1935년 6월 16일 군산본당을 모 본당으로 하여 이리천주교포교소가 이리본당(현 창인동 본당)이 승격하였으며, 초대주임신부로 하한주(요셉)신부가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군산본당과 마찬가지로 사제관이 없다는 이유로 하한주 신부는 이리본당 주임신부 겸 군산본당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아 일단 군산본당에 기거하면서 군산 본당 보좌업무와 이리본당 신설업무를 주관하였다.
1935년 9월 25일 초대본당회장인 김용진이 군산을 뜨면서 성당에 종을 기증하여 종탑을 세우고 전라도감목대리 김양홍 교구장의 주례로 종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 10월 이리본당의 사제관이 준공으로 1935년 11월 5일 하한주 신부가 이리본당으로 부임하면서 군산본당 보좌신부의 꼬리표를 때고 이리본당 주임신부로 다시 발령이 났다.
하한주 요셉 신부가 군산본당 1대 보좌신부였다.
1937년 5월 10일 군산 본당 초대주임신부로 부임하여 군산성당의 초석을 다지고, 이리성당을 분가시켰으며 군산성당 성전건축을 위해 헌신하던 김영구 신부가 전주본당 주임신부 겸 교구 경리로 전임하고, 군산본당 2대 주임신부로 임인교신부가 부임하였다.
3. 제1차 성전 신축
임인교 신부는 초대주임신부인 김영구신부가 신자들을 독려하여 모금한 자금이 어느 정도 모아진 것을 확인하고는, 같은 해 10월 임시성당으로 사용하던 고가를 헐고 성전 건축에 착수하였다.
1938년 1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건평 54평의 화양식 목조건물 성전을 공사비 3,000여원에 완공하고 낙성식 및 견직식을 김양홍교구장 주례로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성당 주차장 중앙부근이었으며 사제관은 유치원 놀이터 부지였다, 성당 출입문은 현재 수도가였다.
4. 군산지역 천주교의 성장
1944년 5월 30일 군산본당 4대 주임신부로 김후상 신부가 부임하여 당시 성전 뒷산을 뒷날의 성전부지로 200,000원에 매입하였다.
1947년 5월 10일 군산본당 5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박성운 신부는 부임하여 신자배가운동 및 교무금배가운동을 전개하여 광복 이후에 군산지역 천주교인의 증가와 재정의 확충을 이뤄 나갔다.
1947년 교무금 배가운동은 300여명의 교우가 교무금 150,000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올렸다. 당시 도시 근로자의 1달 평균 월급이 2,000원임을 감안한다면 실로 큰 액수였다.
1948년 5월 23일 총 공사비 1,000,000원을 들여 수녀원 및 유치원을 신축하고 김영호(마티아)가 종, 김길성(세피리노)의 종각 위 성모상을 각각 기증해 줘서 전주교구장 김현배 주교의 주례로 낙성식 및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 성당 종은 일제에 의하여 군수물자로 공출되었으며 이때 다시 종을 제작해 설치한것으로 판단됨.
또한 오대건(천호공소 출신)이 임야 3,000평을 기증하여 교회묘지로 사용하면서 군산지역 천주교회 묘지의 시작이 이뤄졌다.(교회묘지터는 현 나운동성당 일대)
1949년 9월 가톨릭연맹이 결성되고 신자배가운동이 가톨릭연맹을 주축으로 전신자가 선교에 나서 1949년 성탄 영세자 122명(남43명, 여79명) 1950년 부활 영세자 95명(남40명, 여45명) 합계 217명의 영세자를 탄생시켰다.
박성운 신부가 군산 본당에서 사목한 1947년 5월 10부터 1952년 6월 6일까지 약 5년여 기간 동안 신자배가운동 및 교무금배가운동 등으로 군산 본당에 활력을 불어 넣었으며, 교회묘지용 부지 확보, 군산 본당 회보인 ‘샛별’ 창간,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분원 설치, 현 대야 본당 성전 신축으로 본당 승격 기반 확충, 그리고 수녀원 신축 및 유치원 신축, 종각 재설치 등 많은 사목을 하고 부안본당으로 전임하셨다.
박성운 신부 후임으로 부임 한 강윤식 신부는 1954년 5월 30일까지 약 2년여간 군산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1952년 성심유치원을 개원(현 유치원부지), 당시 미공군 군종신부가 희사한 금액으로 100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고아원 건물을 신축하여 1953년 10월 18일 고아원 낙성식을 하였고, 1954년 4월 8일 성심유치원 인가를 받았다.
5. 제2차 성전 신축
1954년 5월 30일 강윤식 신부 후임으로 서정수 신부가 전임해 오면서 김이환 보좌신부도 함께 부임하였다. (군산성당 성전건립을 위한 서정수 신부의 성전건립 매진을 바라는 마음에서 김현배 교구장의 군산성당을 위한 보좌신부발령으로 보인다.)
강윤식 신부는 1954년 7월 17일 성당신축을 계획하고 225평에 현 군산 본당 성전 신축에 따른 부지공사에 착수 하였고, 1955년 3월 24일 성당신축허가를 받고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성전 건축을 위한 벽돌은 장항제련소에서 개발한 슬러시벽돌과 내화벽돌이 이용되었으며, 슬러시 벽돌의 강도는 너무 강했고 겉면이 날카로와 벽돌을 나르던 신자들이 손을 많이 다쳤다. 장항제련소에서 구매한 벽돌은 현 해망동 서부공판장 부근에 하역하였고 젊은 신자들이 화물차를 빌려 슬러시 벽돌을 가지고 오면 현 군산노인복지회관 앞에 내려놓았고, 나이든 신자들과 여성신자들 그리고 어린신자들까지 연결해 서서 손에서 손으로 벽돌을 날랐고 슬러시 벽돌이 날카로워 많이 다쳤으나 웃으면서 모든 신자들이 참여 하여하였다. - 김영두 증언
1955년 8월 17일 김현배 교구장 집전으로 성전 축복식 및 낙성식이 있었다. 성전은 연건평 145평, 종각높이 92척(약 28미터), 외장은 내화벽돌조였으며 성전 안은 좌측, 우측, 후미에 2층을 건설하여 많은 신자들이 한꺼번에 미사참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현 성전입구 좌⦁우측에 입구 및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게 하였고 성전 바닦은 나무마루로 준공하였었다.
성전안의 좌우측과 후미의 2층지지를 위한 기둥이 있었으며 제대를 신자석 보다 가로길이를 작게 하고 그 크기를 2층지지를 위한 기둥과 일직선상에 있게 건축하는 등 바실리카양식을 일부 응용하였으며, 성전 외관은 고딕양식에 따른 창문, 장미창, 성전입구, 종탑을 설치하여 서양 성전 건축양식 중 고딕양식을 추구하였고, 성전의 좌⦁우측 외관과 사재관의 건축양식은 조지아양식에 충실하였다.
이렇게 건축된 군산 본당 성전은 한국전쟁 이후 군산에 설립된 최초의 대형 건물로 1955년 12월에 완공된 군산 구암교회 보다 빠르다.(구암교회당 규모도 군산 본당의 1/2수준 약 70여평)
서정수 신부 또한 박성운 신부와 거의 동격의 호랑이 사제로 신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현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건축된 군산본당 성전은 60년대 초 외벽에 대리석 질감의 마감제로 리모델링하고, 성전안의 2층을 철거하면서 기둥까지 철거해 신자들이 성전 안 어디에서나 제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71년 범석규 신부 사목기간에 성전 내⦁외부 수리공사, 계단공사 수녀원 신축, 1979년 안복진 신부 사목기간에 성전 마루를 걷어내고 인조석으로 전면 보수하였다. 이후 박종탁 신부는 사목기간에 성전지붕 등을 개⦁보수하였고, 박성팔 신부 사목기간 중에 전면적인 내⦁외부 리모델링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결언
군산 본당의 성전은 한국의 천주교 성전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군산본당의 성전은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교회 건축양식 중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바실리카양식과 조지아양식을 접목하였으며, 제대위치를 남쪽으로 향하게 건축하여(서울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 등과 같이 제대위치가 남쪽을 향해 있고 출입문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 2차 바티칸공의회 전에 행하던 미사의 방식이 사제가 신자를 뒤에 두고 벽을 향해 미사를 집전하던 전통의 방식에 따라 사제가 남쪽을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는 방식을 따랐다.(중세 유럽에서 미사전례 시 사제가 예수살렘방향인 남쪽을 향해 미사를 집전하던 전통이 있었으며, 명동성당과 전동성당 그리고 군산성당 등이 전통에 따랐다. 다만 명동성당과 전동성당 등은 남쪽을 향하면서 제대의 채광을 위해 스테인-글라스로 창을 내었으나 군산성당은 외벽에는 창을 두었으나 제대와 외벽사이에 제의실이 위치하고 있어 성당 내부에서는 성당 뒤편의 스테인-글라스를 통하여 채광을 받을 수 없다. 이유는 전기의 공급으로 자연채광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현실적인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지붕창이 없어졌고 하늘에서 볼 때 십자가 구조가 생략되었다. 기존 성전의 경우 지붕을 2중으로 건축하여 신자들이 채광을 받으려고 하였고 성전 제대부근 좌우를 건축하여 제대의 사제에게 채광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전기보급 이후인 1955년에는 굳이 공사비가 많이 드는 2중 지붕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건축방식에서 벋어나 일체형 사각방식으로 건축하였던 것이다. 대신 창을 길게 하여 고딕양식을 살리면서 스테인-글라스로 창에 설치하여 경건하고 성스러움을 살린 것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전주중앙 성당 성전건축양식에 응용되었고 이후 한국의 여러 성전건축양식에 응용되기 시작하였다.
차량을 타고 번영로를 통해 군산에 들어 올 때나 기차를 타고 군산에 들어올 때 사정동에서 부터 보이던 군산 둔율동 성당의 종탑은 50년대부터 군산의 랜드-마크로 인식되었으며, 지금은 세솔아파트의 준공으로 사정동에서 종탑이 보이지 않으나 당시 군산어디에서나 보이던 종탑은 군산을 고향으로 둔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비신자들에게도 고향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 제가 조사가 부족하고 참고자료가 부족하여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