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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 얽힌 일화-정 일 남
거울
李 箱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었던들어찌내가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지금나는거울을안가졌소마는
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정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지금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 글은 논설문이 아니다. 따라서 틀에 갇힌 글이 아니다. 자유분방하게 쓰려고 한다. 이상에 대한 일화를 쓰려는 것이다. 일화는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점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 일화는 여러 설이 있다. 이상에 대해서는 일화가 많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이상론(李箱論)을 쓰려는 게 아니고 이상에 대한 일화와 일생을 써보려는 것이다. 이상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는 없다. 그러나 이상 문학이 남아있는 것은 좋은 시라서가 아니라 파격적인 문제시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의 시는 애송되는 시가 아니고 연구실의 연구대상의 시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 올린 ‘거울’은 1933년 10월 「가톨릭 청년」통권 5호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문예지가 아니고 종교 잡지에 올린 시다. 이상의 시들은 대체로 이렇게 종교 잡지나 기관지에 실린 것이 많다.
이상이 7개 국어를 한다고 한 말도 허풍이었다. 조선중앙일보에 이태준의 소개로 연재된 ‘오감도’ 15편을 천 편의 작품에서 고른 것이란 말도 거짓에 가깝다. 이상의 시는 시대에 맞지 않은 구두와 같았다. 시대를 앞서 갔다고나 할까. 난해한 시다. 거울 앞에 우린 서본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다듬고 얼굴을 매만져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은 거울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생각을 한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다고 했다. 벽에 걸려있는 거울 속의 세계와 거울 밖의 세계는 서로 상반된다. 같기도 하지만 다르다. 이상에겐 절망을 보는 세계다. 아무리 자신의 처지를 말해도 듣지 못하는 딱한 귀를 보면서 섭섭해 한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손이 왼손잡이란 걸 자각한다.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다. 시대와는 적응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리라. 거울 때문에 거울 속의 자신을 만져보지 못하는 절망이다. 거울이 있기에 자신을 볼 수 있지만 거울이 오히려 원망스럽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너무 창백했기 때문이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거울에게 호소한다. 결핵으로 허파가 망가져 뼈만 남은 자신의 몰골을 보고 놀라게 된다. 이럴 수 있나. 자신이 의사가 되어 자신을 진찰할 수가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버린다. 1952년 노벨의학상을 탄 왁스먼이 발견한 유일한 결핵 치료약 스트렙토 마이싱의 혜택을 이상은 받지 못했다. 아무리 천재지만 자신의 병을 이겨내는 천재는 못되었던 것이다. ‘거울’의 시가 얼마나 슬픈 시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상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얼굴이 얽었다 한다. 아버지 김연창(金演昌)은 활판소(活版所)에 다닐 때 손가락 셋이 잘려나갔다. 어머니는 생일도 이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친정이 어딘지도 모르는 여자다. 이상은 외갓집이 있는 사람을 몹시 부러워했다. 아버지가 불구가 되자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이상은 큰댁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가 되어 백부 밑에서 산다. 이상은 몸이 허약해 흰 얼굴 때문에 아낙들이 흰둥이라 불렀다 한다. 이상은 누상동(樓上洞) 신명학교(新明學校)로 진학한다. 화가가 되겠다고 그림을 그렸는데 5전을 주고 모델로 삼은 여자가 누이동생 옥희(玉姬)였다. 유화 ‘풍경’을 그려 교내 미술전에서 우등상을 받았다. 이상이 경성공업고등학교(지금의 서울공대)에 입학했는데 백부가 당부했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로 가야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느냐. 세태가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곯지 않는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그래서 이상은 건축과로 진학하면서 화가의 꿈을 접는다.
이상은 경성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한다. 총독부 건축기사로 취직한다. 그때 월급을 55원을 받았다. 이상은 그 무렵 깔끔한 차림의 멋쟁이 신사였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신사였다. 조선건축회 기관지 표지 도안을 공모할 때 1등과 3등을 했다. 선전(鮮展)에서 작품 ‘자상(自像)’이 입선하기도 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인데 공사현장을 다닐 때 인부들이 ‘리상!’이라 불러서 이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상을 부하로 둔 일본인 과장이 이상을 밉게 보았다. 왜냐하면 술이나 마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과장은 어떻게 하면 해직시킬까 하고 구실을 찾고 있었다. 하루는 과제물을 이상께 맡겼는데, 보통사람이면 일주일이나 걸려야 다 할 수 있는 과제물을 단 이틀에 다 마치고 제출했다는 것이다. 이상은 늘 먼 산을 바라보며 ‘심심해죽겠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상은 자기만이 사용하는 암호가 있었던 것이다. 그 암호로 문제를 간단하게 풀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과장은 늘 이상을 대동하고 다녔다 한다.
이상이 생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할 때 결핵이 찾아왔다. 이상은 객혈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은 총독부 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거기서 만난 여인이 금홍이다. 금홍이는 술집 작부였다. 이 여인이 후에 이상문학에 영감을 주는 주요 역할을 한다.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백부의 소상이 있어 서울로 먼저 돌아온다. 지금의 청진동 골목 조선광무소 아래층에 세를 들어 금홍이를 불러드린다. 다방 ‘제비’를 개업한다. 그러나 다방이 될 리 없었다. 집세도 내지 못해 집주인은 경성지법(京城地法)에 소송을 걸었다. 이상은 공판정에 가지도 않았고 패소했다. 이상이 다방을 접고 새로 차린 것이 술집이다. 이상은 낮잠만 자고 금홍이는 술손님과 옆방에서 젓가락 장단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은 이상은 아파서 울며 나간 채 사흘을 돌아오지 않았다. 금홍이와 3년을 동거했다. 거기서 얻은 것이 작품 ‘날개’ 그리고 ‘지주회시(蜘蛛會豕)’였으나 이 작품을 낳게 한 금홍이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금홍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고 사진도 없으니 미제로 남아있다.
1996년에 상영된 ‘금홍아 금홍아’란 영화(映畵)가 있었다.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이 나오는 영화로 태흥영화사가 만들었다. 김유진 감독 김수철이 연출했다. 기생 금홍이가 등장해 이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다. 이 영화는 청룡영화제에서 금홍이가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이 금홍이가 이상의 연인이었던 금홍이로 등장한다. 이상은 어느 날 자기와 같은 결핵을 않는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을 찾아 간다. 김유정을 만나 ‘우리 더 살면 뭐 뾰족한 수가 있겠소. 같이 죽읍시다.’라고 말했는데 김유정이 난 죽기 싫다고 말하자 이상은 무안해서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김유정은 이상이 정말 죽을 것 같아 사람을 보내 이상의 동태를 살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이 죽자고 했던 이상이 김유정 보다 18일을 더 살았던 것이다. 영양보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글쓰기에 매달렸던 천재문인들은 그렇게 요절하고 말았다.
어느 날 전부터 안면이 있던 일본 여자가 이상을 찾아왔다. 일본 여자가 같이 외출을 하자고 했다. 이상은 그 여자와 팔짱을 끼고 보도를 걸어가는데 오가는 행인마다 흘낏흘낏 이상을 곁눈질했다. 여학생들도 킥킥거리며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상은 내 얼굴에 검정이라도 묻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이상은 한쪽 팔을 꿰지 않은 채 입은 웃
저고리가 코트 자락사이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급히 옷을 입는 바람에 생긴 일장의 희극이었다. 천재 시인이 그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상식에서 탈출한 이상은 겨울에도 흰 구두를 신고 다녔다 한다. 이상이 차린 다방의 이름이 ‘69’다방이었다. 보통 사람이면 ‘가고파’나 ‘도라지’ 아니면 음악과 관련이 있는 ‘보레로’나 ‘쇼팡’이 무난할 것이나 이상은 유독 ‘69’다방이라 지었다. 도대체 ‘69’가 무슨 뜻인가. 다방을 찾은 손님들이 육구리(천천히) 쉬었다 가라는 뜻이군. 이렇게 말하자 이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아니 한심하다는 듯이 창백한 얼굴에 조소 같은 웃음을 띠우곤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상의 의도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점잖게 말하면 퉁소 불고 전복 딴다는 게 이상의 의도다. 이래도 이해하지 못하면 남녀가 안고 동물적 향락을 즐기는 자세의 표현이 이상의 해석이란 것이다. 이런 해석이면 이상은 풍기문란 죄로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천재 이상의 기지는 다방 이름 하나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여기 이상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한다.
‘안형! 형의 글 반가이 읽었습니다. 저의 못난 여편네를 위하여, 귀중한 하룻밤을 부인(夫人)으로 하여금 허비하시게 하였다니 어떻게 감사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인께도 이 말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의 <명상(瞑想)>을 잘 읽었습니다. 타기(唾棄)할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의 저로서 계발(啓發) 받는바 많았습니다. 이것은 찬사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저에게 주신 바 형의 충고의 가지가지가 저의 골수에 맺혀 고마웠습니다. 돌아와서 인간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의 옳은 진리를 가지고 선처하라 하신 말씀은 찬 등에서 땀이 날 만큼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계집을 가두에다 방매(放賣)하고 부모로 하여금 기갈(飢渴)게 하고 있으니 어찌 족히 사람이라 일컬으리까. 그러나 저는 지식의 걸인은 아닙니다. 7개 국어 운운도 원래가 허풍이었습니다. 다시 살아야겠기에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모든 제 죄와 악을 의식적으로 묵살하는 도리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친구, 가장, 소주 그리고 치사스러운 의리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전연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분간 어떤 고난과도 싸우면서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말라 비틀어져 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지금의 자새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朝光> 2월호의 <童骸>는 작년 6,7월경에 쓴 냉한삼곡(冷汗三斛)의 열작(劣作)입니다. 그 작품을 가지고 지금의 이상을 촌탁(忖度)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회환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속여 왔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아왔거니 하던 제 생활이 지금 와보니 비겁한 회피의 생활이었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제야입니다. 빈대떡, 수정과 약주, 너비아니 이 모든 기갈의 향수가 저를 못살게 굽니다. 생리적입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가끔 글을 주시기 바랍니다. 고독합니다. 이곳에는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발견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서울의 흙을 밟아 볼는지 아직은 막연합니다. 저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건강한 형이 부럽습니다. 그러면 과세 안녕히 하십시오. 부인께도 인사 여쭈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제(愚弟) 李 箱
이상은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 변동림과 돈암동 흥천사(興天寺)에서 양가 식구들 십여 명만 모인 채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백부가 사망하고 가세가 기울어졌다. 백부의 빚 때문에 작은 집까지 팔게 된다. 전세를 얻어 신혼의 보금자리를 차렸으나 그마저 집세를 못내 쫓겨났다. 이런 환경에서 견디지 못한 이상은 ‘정직하게 살았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활이 지금 와 보니 비겁한 회피의 생활이었나 봅니다.’ 이상이 일본으로 간 것은 생활의 굴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색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문학의 새로운 자세를 확립해 보자는 야망도 있었을 것이다. 이슬비가 내리는 경성역(京城驛)에는 이상을 전송 나온 변동림과 두어 사람의 친지 만이었다. 그들은 이상의 건강만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상은 기차에 오르기 전 ‘휴머니즘은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라는 말을 남겼다. 부산에서 현해탄을 건너 동경의 간다끄진보조 3정목 101의 4번지 이시까와 석천(石川) 방에 기숙을 정하고 자기 문학의 점검에 들어갔다. 그의 텁수룩한 머리와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은 동경시민들에게 이단시 하는 꼴이 되었다. 니시간다(西神田) 서(署)로부터 불심검문 끝에 가택수색을 하니 수상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이상은 니시간다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풀려나온다. 이상은 폐결핵 3기였다. 그 슬픔을 달래며 맥줏집에서 만취한 끝에 일인 신사와 시비가 벌어졌다. 그러다 누구의 입에선가 ‘나가자’는 소리와 함께 둘은 대로상에서 싸움이 붙게 되었다. 군중이 몰려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상은 와이셔츠와 러닝을 벗었다. 이상은 공격의 자세를 취했다. 순간 신사는 실소를 하고 말았다. 이상의 몰골은 피골이 상접했다. 저게 사람인가 해골인가?
‘자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난 긴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오야봉(어깨대장)일세. 날 이기겠나?’
‘오야봉이라?’
‘글쎄, 그건 싸워 봐야지...’
두 사람은 금방 붙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상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허리를 구부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내가 진 것이 아니라 양보하네.’
하면서 이상은 개선장군처럼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한국의 천제 시인 이상의 기지야말로 감칠맛이 났다.
이상은 동경에서 아우인 김운경(金雲卿)에게 마지막 엽서를 보냈다.
어제 東琳이 편지로 비로소 네가 就職되었다는 消息 듣고 어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와서 나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이 집안 걱정을
하여 왔다. 울화가 치미는 때는 너에게 不快한 편지도 썼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놓겠다. 不潣한 兄이다. 人子의 道理를 못 밟는
이 兄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家庭보다도 하여야 할 일이 있다.
아무쪼록 늙으신 어머님 아버님을 너의 정성으로 慰勞하여 드려라. 내
자세한 글, 너에게만은 들려주고 싶은 자세한 말은 二 三日 內로 다시 쓰겠다.
一九三七年二月八日 아우(金雲卿)에게 보낸 葉書.
(타국에서 아우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이상은 동경에서 지병이 악화되었다. 그는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라는 경구를 남겼다. 사상이 의심스럽고 행적이 수상하다고 감방에 구금되었으나 병의 악화로 풀려난 이상은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이 소식을 전보로 들은 아내 변동림(卞東琳)은 서울에서 기차로 부산까지 12시간, 그리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 까지 또 그만한 시간이 걸려 동경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수필가 김소운(金素雲)과 몇몇의 ‘삼사문학’동인 그리고 ‘동경학생예술’ 후배들이 지켜보는 가문데 1937년 4월 17일 이상은 레몬향기가 맡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마치 반딧불이가 반짝하는 짧은 생을 살았다. 아내 변동림은 이상의 유해를 수습해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서울로 돌아온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시켰다. 변동림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 일을 했겠는가. 세월이 흘러 이상이 묻힌 미아리 공동묘지는 개발이 되어 그 묘지는 간곳없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세워졌다. 우리의 천재시인 이상의 영혼은 지금 어느 하늘을 헤매고 있을 것인가. 이상이 죽고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金煥基)와 재혼했다. 이름도 김향안 이라 바꿨다. 불과 4개월간 이상과 살았다. 김향안은 1986년 ‘문학사상’과의 대담에서 이상을 평하기를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 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가는 충분한 시간...천재는 또 미완성이다.’라고 했다. 이상은 아직 문학관이 없다.(끝)
정일남-강원 삼척 출생. 197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1석. 1973년 「풀과 별」추천. 1979-1980년 「현대문학」시 추천완료. 시집 「꿈의 노래」「훈장」「봄들에서」「감옥의 시간」시조집 「유배지」산문집「 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등 다수. 한국시인협회 회원. 표현시동인. 맥(脈)동인. 응시동인. 두타문학동인. 공간시낭송회 상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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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채 총무님. 여기 올린 것으로 해주세요. 먼저 것은 문장 구분이 안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이 저의 원문입니다. 잘 부탁 합니다. 정일남 배.
네 선생님 직접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