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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의 발달사
명리학의 분명한 시점을 따지면 대개 양한(兩漢-前漢 기원전202~195, 後漢 기원후25~220)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문자상에 반영된 것으로는 주로 「백호통의(白虎通義)」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등의 저작 속에 들어 있는데, 「논형(論衡)」이 대표적이다.
왕충(王充)은 「논형」에서 명리를 말한 편으로는 명록(命祿), 기수(氣壽), 행우(行偶), 명의(命義), 무형(無形), 길험(吉驗), 우회(偶會), 초품(初稟), 물세(物勢) 등이 있다. 이런 편들은 천명의 필연적 존재성을 전에 없이 드날렸을 뿐 아니라, 운명의 오묘함에 대한 탐구방법에 있어서도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명록(命祿)〉에서 왕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행운을 만나거나 해를 당하는 것은 모두 명 때문이다. 사생수요의
명이 있는가 하면 빈부귀천의 명도 있다.… 명이 응당 부귀하다면 비록 빈천
하게 만들려고 해도 오히려 복을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명이 귀하면 천한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명이 천하면 귀한 자리에서 스스로 위태롭게 된다.
※ 왕충(王充) : 중국 최초의 유물론적 철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는 후한(後漢)의 지식인이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었던 그는 당시의 수도인 낙양의 책방을 돌며 책이란 책은 모두 읽었고, 한번 읽은 책은 그대로 암기를 할 정도로 시대의 천재였다. 그러나 배경이 없던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불우한 처지에서 그는 《논형論衡》이라는 명저를 썼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식인들에게 읽혀지는 고전이다.
명리학 이론의 기원은 전국시대(戰國時代-BC8세기~BC3세기)의 낙녹자(珞琭子)와 귀곡자(鬼谷子), 한대(漢代-BC206년~AD220년)의 사마계주(司馬季主), 동중서(董仲舒)와 동방삭(東方朔), 엄군평, 삼국시대(三國時代-AD220년~280)의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관로(管路), 진유곽(晉有郭), 박북제(璞北齋), 유위정(有魏定), 진대(晉代)의 곽박(郭璞)과 갈홍(葛洪),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위령(魏寧)과 도홍경(陶弘景)으로 이어지는 인물에서 찾고 있으나 현재의 명리학 이론 체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는 그 관련성을 찾기 힘들다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 선구자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도 무책임한 태도다.
※ BC770년 周왕조가 낙양(洛陽-뤄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西周)시대, 이후를 동주(東周)시대라 한다. 동주(東周)시대는 춘추(春秋)시대와 전국(戰國)시대로 나누어진다. 춘추시대(春秋時代)는 周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韓, 魏, 趙 삼씨(三氏)가 진(晉)나라를 분할하여 제후(諸侯)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BC430년)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그 이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221년까지이다.
* 귀곡자(鬼谷子) : 귀곡자유문.
* 귀곡자는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를 가르쳐서 난세에서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후
세에까지 이름을 남기게 한 인물이다.
한(漢 BC206년~AD220년)은 진(秦)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 사마계주(司馬季主) 동중서, 동방삭, 엄군평 등이 이름을 남겼다.
삼국시대(三國時代-AD220~280) : 중국 후한 말기에, 위·오·촉의 세 나라가 맞서 있던 시대.
* 위(魏) : AD220년~265년
* 오(吳) : AD220년~280년
* 촉(蜀) : AD221년~263년
진대(晉代 AD280년~316년) : 삼국(三國)의 위(魏)를 이어서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왕조(王朝)
* 갈홍(葛洪) : 포박자(抱朴子) 저술(著述).
* 곽박(郭璞-276~324) : 옥조신응진경(玉照神應眞經), 산해경(山海經)을 주해(註解)
▸ 남북조(南北朝-AD420~589) : AD420년 북위(北魏)가 화북(華北)을 통일하고 강남(江南)의 송(宋)나
라와 대립한 때로부터 589년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쳐부술 때까지의 시대.
* 위령(魏寧)
* 도홍경(陶弘景) : 삼명초략(三命抄略)을 저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내력은 불명(不
明)이다.
당나라(618~907) 말(末) 송나라(960~1279) 초(初)에 이허중이 연주(年柱)의 납음(納音)으로 운명을 판단하는 이론을 세웠는데, 그의 저서로는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가 있다.
이허중은 자(字)가 상용(常容)이다. 위(魏)나라 이충(李沖)의 8세손으로 여섯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진사에 급제하여 당나라 헌종 때 전중시어사(展中侍御使)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오행서에 심취하였는데, 사람이 처음 태어난 생년, 생월, 생일을 간지로 배속시키고 상생, 상극, 왕성하고 쇠퇴함을 짐작하여 인간의 수명장단, 부귀빈천, 운의 이롭고 불리함 등을 추론했다.
이허중이 명리학의 발달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 이허중은 현재 명리학의 기본원리를 이루고 있는 생극제화(生剋制化)와 왕상휴수사(旺相休囚死)의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허중의 사주명리학은 현대 명리학과 전체적인 틀은 같으나 그 내용에서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명리학은 이허중 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인 서자평(徐子平)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사계(斯界)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아무튼 후대 사람들은 이허중을 명리학의 개산조사(開山祖師)로 떠받들기에 이의가 없다.
이허중(李虛中)은 천하에 유명한 「당사주(唐四柱)」를 만든 사람이라고도 전한다.
당대 대학자인 한유(韓愈)가 지은 전중시어사이군묘지명(殿中侍御史李君墓志銘)에 기록하기를 이허중(李虛中)은 한 사람의 출생연월일의 천간지지(天干地支)를 가지고 일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 빈천요수(貧賤夭壽)를 잘 추정해 냈는데 결코 백(百)에 하나 둘도 틀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허중(李虛中) : 위군(魏郡 : 現 河北 大名) 출신으로 자(字)는 상용(常容), 당(唐) 덕종(德宗) 시기에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 헌종(憲宗) 때(806~820)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의 관직에까지 올랐 던 관료 출신의 명리학자.
당대(唐代) 유학자 한유(韓愈)의 「한창여문집(韓昌黎文集)」에 수록된 〈전중시어사이군묘지명(殿 中侍御使李君墓誌銘)〉에 그에 관한 전기가 약술되어 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처음으로 년․ 월․일․시의 간지(干支)를 중심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추론하였다고 한다.
오백가주창여문집(五百家注昌黎文集) 〈당고전중시어사이군묘지명(唐故殿中侍御使墓誌銘〉: “전중 시어사(殿中侍御使) 이군(李君)은 이름이 허중(虛中)이며 자(字)는 상용(常容)이다.…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행(五行) 분야의 서적에 대단히 정통하여 사람이 태어날 때의 년․월․일을 통하여 일진(日辰)의 간지(干支)를 두고 상생승쇠사상왕(相生勝衰死相旺)을 적절하게 감안하여 사람의 수요(壽夭)․귀천(貴賤)․이(利)와 불리(不利)를 추측하였다. 이는 바로 년․ 시로부터 시작한 것인데, 백에서 한둘도 틀리지 않았다. 그의 설은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상세하게 그것을 열고 해설하여 수많은 단서를 통하여 얽혀 있는 것들을 거듭 풀어낸 것이다. 배우 려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을 전했으나 처음에는 이를 수용한 듯하지만 끝내는 놓치고 말았다. 성관 (星官)과 역법(曆法)의 원로(元老)조차 그와 더불어 득실(得失)을 비교할 수 없었다.”
唐(唐)-AD618~907) : 이연(李淵-高祖)이 수(隋)나라 공제(恭帝)에게서 임금자리를 물려받아 즉위
한 때로부터 애제(哀帝)가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기까지의 20세(世) 290년간을 이름.
남북(南北)을 통일하여 정치 ․ 문화의 대발전을 이룬 시대로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문명국
이라 일컬어졌음. 장안(長安)에 도읍(都邑).
* 원천강(袁天罡(綱), 일행(一行), 이필(李泌), 이허중(李虛中), 상도무(桑道茂) 등이 있다.
* 이필(李泌)은 낙천양결(駱天陽訣)과 일행(一行) 요지(要旨)를 터득해서 인명(人命)을 추명(推
命)한바 길흉(吉凶)이 최험(最驗)하였다고 하며 이를 허중(虛中)에게 전하고 추연(推衍)케 했다
고 한다.
* 이허중(李虛中)은 당(唐) 덕종(德宗) 정원 연간에 과거에 순조롭게 붙어 진사(進士)가 되었고
뒤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후대(後代) 사람들은 그를 명리학의 개산
조사(開山祖師)로 떠받든다. 당사주(唐四柱)라는 것을 만든 분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시대엔
대단하게 받아들여졌겠지만 현대에 와선 적중률에 있어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명리학의 중조(中祖)라고 할 수 있는 이허중이 쓴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는 오행의 왕상휴수(旺相休囚), 납음론(納音論), 삼명론(三命論), 본주론(本主論), 年/胎/月/日/時의 오명론(五命論), 녹마론(祿馬論)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구성은 上, 中. 下卷으로 짜여 져 있다.
권상(卷上)은 육십갑자(六十甲子)에 대한 설명과 귀인(貴人)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권중(卷中)은 통리물화(通理物化), 진가사정(眞假邪正), 승강청탁(升降淸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역(周易)과 십간십이지의 관계, 삼합(三合), 납음오행(納音五行)의 수(數), 사주(四柱-胎/年/月/日/時), 오행경중(五行輕重)의 이론 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권하(卷下)는 쇠왕취시(衰旺取時), 삼원구한(三元九限), 천승지록(天承地祿)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쇠왕취시(衰旺取時)를 보면, 이미 왕한 것은 일방(一方)의 기(氣)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쇠(衰)한 경우 성공했다고 말한다. 꽃의 화려함이 지나서 쇠(衰)하면 열매가 완성되므로, 이것을 궁즉변통(窮則變通)의 상(象)이라고 한다. 처음 태어나서 목욕(沐浴)하면 풍수도화(風水陶化)의 근원이 되며, 관대(冠帶)란 재능과 기량이 임무를 맡을 수 있는 것을 말하며, 임관(臨官)이란 귀신이 그것을 해(害)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왕(旺)이란 강개(慷介)하여 스스로 머무는 것이고, 쇠(衰)란 꽃은 사라지고 열매가 선다. 병(病)이란 고약(孤弱)하다. 사(死)란 물(物)이 없는 것이며, 묘장(墓藏)은 조화(造化)의 마지막이 된다. 절살(絶煞)은 정신(鼎新)의 기(氣)가 있다. 기(氣)가 다하여 없어진 이후에 완성된다. 포태(胞胎)는 응결하여 비로소 형상(形狀)을 나눈다하여 십이운성(十二運星)을 통하여 명리이론을 추론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는 기후개념(氣候槪念)을 사용하기 보다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십이운성(十二運星)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연주 위주의 사주학을 일간 위주의 사주학으로 개발한 사람이 서자평(徐子平)이었다.
서자평은 이름이 거이(居易)이며 당시 관상에 뛰어난 마의도인(麻衣道人) 진도남(陳圖南)과 함께 화산(華山)에 은거하여 명리학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고 한다.
서자평이 명리학의 발달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는 명리학이 자평술(子平術)로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자평은 오대(五代)말(末) 송(960~1279)초(初)의 사람으로 1135년경에 「낙녹자삼명소식부주(珞碌子三命消息賦註)」를 썼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간 위주의 명리학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해자평(淵海子平)」안에 수록된 「계선편(繼善篇)」도 그의 저술이다.
이렇듯 서자평은 이전의 명리학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며 현대에 통용되는 명리학을 완성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대(五代 AD 907~960) : 당(唐)나라의 멸망부터 송(宋)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과도기에 흥망(興
亡)한 나라를 통틀어 일컬음. 또는 그 시대(時代).
화북(華北)을 중심하여 일어난 오왕조(五王朝), 곧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
漢) 후주(後周)와 각지에 분립(分立)하여 있었던 십국(十國), 곧 전촉(前蜀), 오(吳), 남한(南漢),
형남(荊南), 오월(吳越), 초(楚), 민(閩), 남당(南唐), 후촉(後蜀), 북한(北漢)을 이름.
* 서자평(徐子平) : 오대말(五代末) 송초(宋初)의 인물로서 명리학의 시조격(始祖格)이다. 서자
평은 이름이 거이(居易)이며 당시의 관상에 뛰어난 마의도인(麻衣道人) 진도남(陳圖南)과
함께 화산(華山)에 은거하여 명리학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 진희이(陳希夷) : 진단(陳摶-진박 陳博), 진도남(陳圖南), 마의도인(麻衣道人) 등으로 불리어
짐. 마의상서(麻衣相書), 자미두수(紫薇斗數), 사주학의 창시자(創始者).
[단(摶)-칠(擊) 단, 박(博)-손얽을, 잡을 박]
서자평은 「낙녹자삼명소식부주(珞碌子三命消息賦註)」에서 사주팔자를 해독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알 수 있으며, 생월, 생일, 생시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으면 인간의 귀천과 수명의 장단 역시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여 사주와 인간의 귀천이 일대일 대응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후에 서대승(徐大升-1162년)이 「연해(淵海)」라는 명리학 책을 저술했다. 그는 서자평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 후에 당금지라는 사람이 「연해(淵海)」와 비결집 「연원(淵原)」을 합본하여 「연해자평(淵海子平)」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연해자평(淵海子平)」이며 지금까지 명리학의 고전으로 통용되는 책이다.
「연해자평(淵海子平)」은 당시 산재하던 명리학 이론서들을 집대성 하였는데, 이 책의 특징은 사주 여덟 글자 가운데 일간(日干)을 그 사람의 주체로 삼고서 인간의 운명을 해독해야 정확하다는 서자평의 주장을 증명해 보인 점이다.
송(宋 AD 960~1270) : 960년에 조광윤(趙匡胤)이 오대후주(五代後周) 공제(恭帝)의 선위를 받아 세
운 나라. 개봉(開封)에 도읍(都邑)함. 제8대 휘종(徽宗), 제9대 흠종(欽宗)이 금(金)의 침입을 입
어 북쪽으로 붙들려가기까지(1126년)를 북송(北宋 ), 흠종(欽宗)의 아우 고종(高宗)이 남으로 옮
기어 항주(杭州)에 도읍을 정하고 원(元)의 세조(世祖)에게 망할 때까지를 남송(南宋)이라고 함.
18대(代) 319년.
* 주렴계(周濂溪), 소강절(邵康節), 서대승(徐大升) 등이 이름을 날렸다.
원(元 AD 1271~1368)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
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명(明 1368~1644)나라 때는 만육오(萬育吾-萬民英)가 「삼명통회(三命通會-1578년 발행)」를 저술했고, 장신봉(張神峯)이 「명리정종(命理正宗)」을 저술했다.
명사(明史) 예문지에 「삼명담적천수(三命談滴天隨)」라는 것이 실려 있는데, 그것이 명나라 개국공신 유백온(劉伯溫-1311~1375)이 지은 「적천수(滴天隨)」의 원본이다.
명(明 AD 1368~1644) : 원(元)나라에 뒤이어 세워진 왕조(王朝). 태조(太祖)는 주원장(朱元璋).
성조(成祖) 때에 도읍(都邑)을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겨 남해 여러 나라를 경략(經略),
그 세력은 아프리카 동안(東岸)에까지 미쳤음.
중기(中期)이후 환관(宦官)의 권력이 증대하고 의적(義賊)의 침략(侵略)이 잦아 농민들의 반란이
계속 일어나 이자성(李自成)에게 북경(北京)이 점령되어 17대(代)로 망함.
* 만육오(萬育吾)-삼명통회(三命通會), 장남(張楠)-명리정종(命理正宗), 유백온(劉伯溫)-적천수 (滴天髓)
청나라(1636~1912) 초기에 여춘대(余春臺)가 「난강망(欄江網)」을 출판(出版)했다.
「난강망(欄江網)」은 「궁통보감(窮通寶鑑)」 또는 「조화원약(造化元鑰)」이라고도 한다. 지은이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책 속에 인용된 명조(命造)의 주인공들이 명(明)나라 시대 유명인사들의 명조가 많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명(明)나라 시대의 저작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청계(淸季)의 여춘대(余春臺)가 각행(刻行)한 것이다.
청나라(1636~1912) 초엽에 진소암(陳素庵)이 「적천수(滴天隨)」원본을 주해(註解)한 「적천수집요(滴天隨輯要)」와 「명리약언(命理約言)」을 저술했다. 진소암은 강희(康熙) 5년 병오(丙午)(1666년)에 사망했으니, 그의 저술 연대는 그 보다 앞설 것으로 추리된다.
청나라(1636~1912) 중엽에 심효첨(沈孝瞻)이 「자평진전(子平眞詮)」을 저술했는데, 건륭(乾隆) 41년 병신년(丙申年) 1747년에 호공보가 이를 발행했다.
심효첨(沈孝瞻)은 건륭 4년 1665년 기미년(己未年)에 진사(進士)에 급제한 사람이다.
임철초(任鐵樵)는 건륭 38년 1773년 음력 4월 18일 진시(辰時)에 출생하여 73세 되는 1846년에 「적천수천미(滴天隨闡微)」를 저술했다. 1933년에 원수산(袁樹珊)이 적천수천미(滴天隨闡微)를 발행했는데, 진소암의 주석도 함께 넣었다.
1935년에는 서낙오(徐樂吾)가 「적천수징의(滴天隨徵義)」를 발행했는데, 「적천수천미(滴天隨闡微)」에서 진소암의 주석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그 후에 서낙오는 다시 「적천수보주(滴天隨補註)」와 「자평수언(子平粹言)」을 저술했고, 원수산(袁樹珊)이 「명리탐원(命理探原)」과 「명보(命譜)」를 저술했다.
명리학의 대표적인 고전의 발행순서를 알아보았다.
임철초는 “적천수(滴天髓)”에 주석을 붙였다. 스스로도 책을 지을 수 있는 안목의 소유자였지만 당시까지 이론전개가 난해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적천수“에 주해를 달아서 그것을 부활시킨 공로는 새로이 책을 저술한 것보다 더욱 존경 받을 만한 일이었다. 임철초 선생이 아니었다면 ”적천수“라는 보옥(寶玉)이 땅 속에 묻히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주해를 달았던 책은 나중에 ”적천수징의“와 ”적천수천미“라는 다른 이름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천미”가 원문의 주석까지 삽입해서 상세하게 되었다는 점이 특색이라면 “징의”는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보충할 것은 보충해서 정리한 것이 특색이다.
간결한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은 “징의”를, 보다 상세한 설명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미”를 텍스트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징의”는 서낙오 선생이, “천미”는 원수산 선생이 출판했다.
근(近) ․ 현대(現代)의 명리학
원수산(袁樹珊)은 근대의 명리학 연구가이자 직업적 술사였다. 1881년 중국본토에서 출생하여 1912년에 「명리탐원(命理探原)」을 저술하였다.「명리탐원(命理探原)」은 명리학의 연원을 탐구하고 역사를 정리했으며 명리학의 기본적인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그 이전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명리학의 최고보전(最高寶典) 중의 하나인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를 발행했다는 점이다.
서낙오(徐樂吾)는 1886년4월6일 출생하여 1948년까지 생존하였는데, 근대 중국 사주학계의 최고 거두였다. 1938년에 사주학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평수언(子平粹言)」을 저술하였다. 그는 1937년에 「궁통보감(窮通寶鑑)」, 1941년 「조화원약평주(造化元鑰評註」), 1935년에 「명리심원(命理尋源)」과 「잡격일람(雜格一覽)」을 저술하면서 「적천수징의(滴天髓徵義)」를 출판, 1936년에 「자평진전평주(子平眞詮評註)」, 1937년에 「적천수보주(滴天髓補註)」를 저술하였으며 그 밖에도 「자평일득(子平一得)」, 「명리일득(命理一得)」, 「고인명인명감(古今名人命鑑)」 등을 저술하였다.
위천리(韋千里)는 1911년3월31일 절강성에서 출생했다. 1933년 진소암(陳素庵)의 명리약언(命理約言) 교정본을 출판, 1934년 명학강의(命學講義) 초판을 저술 발행, 1986년 명학강의(命學講義) 재판을 발행, 1935년 천리명고(千里命稿), 1941년 천리명초(千里命鈔), 1946년 팔자제요(八字提要), 1963년 고고집(呱呱集)을 저술했다.
위천리(韋千里)의 「명학강의(命學講義)」와 「팔자제요(八字提要)」는 의미가 깊은 책이다. 위천리의 「명학강의(命學講義)」를 한국의 박재완(朴在玩) 선생이 번역하여 「명리요강(命理要綱)」의 이론체계를 세웠고, 위천리의 「팔자제요(八字提要)」를 번역하고 거기에 일지론을 첨가하여 「명리사전(命理事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천리(韋千里)는 복단(復旦)대학 문학과를 졸업하였고 5․4 이전에는 상해에 살다가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대말(五代末), 송초(宋初)에 신법사주(新法四柱) 이론을 정립한 서자평(徐子平) 이후에 연구 계승되어온 자평학(子平學)은 송말(宋末) 서승(徐升)의 연해자평(淵海子平), 명대(明代) 만육오(萬育吾)의 삼명통회(三命通會)와 장남(張楠)의 명리정종9命理正宗), 청대(淸代)에는 진소암의 명리약언(命理約言), 심효첨(沈孝瞻)의 자평진전(子平眞詮), 임철초(任鐵樵)의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와 근대 중국의 명리대가인 원수산(袁樹珊), 서낙오(徐樂吾), 위천리(韋千里)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연구와 저술 활동에 의해 근9近), 현대(現代)의 사주명리학이 체계적인 논리구조를 가진 과학적인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다고 볼 것이다.
중화민국은 1912년1월1일 쑨원(孫文)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함으로써 탄생했다. 중화민국 수립은 1911년10월 양쯔강 인근의 무창(武昌)에서 혁명군이 봉기하고 1개원만에 17개 성이 호응해 궐기한 신해혁명(辛亥革命) 덕분에 이뤄졌다. 임시약법(憲法)을 제정하며 공화국으로 골격을 갖춰나갔지만 중화민국은 군사․재정적인 자립 역량이 부족했다. 일곱 살의 선통제 푸이(溥儀)는 쑨원과 북양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타협으로 2월12일 퇴위ㅡ 진시황 이래 2200년 동안 유지된 중국왕조 역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청조도 26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의 명리학
황제내경(皇帝內經)이 동이족(東夷族-우리민족)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 내려오나 자세한 기록은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무학대사(無學大師), 서경덕(徐敬德), 남사고(南師古),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이 유명하며, 불가(佛家)의 사명(四溟), 서산(西山)대사 등이 명리학의 대가(大家)로 알려져 왔다.
최근에 알려진 분으로는 전백인(全白人-온 몸이 희다고 함), 김선형(金善瀅-盲人) 등이 유명하다고 전해 졌다.
김선형(金善瀅)선생의 제자로는 자강(自彊) 이석영(李錫暎)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의 고전을 번역하는데 치중한 반면 자강(自彊) 이석영(李錫暎)은 이 학문을 현대화, 실용화 시켜서 실제적으로 직업(職業), 건강(健康), 제반인사(諸般人事)의 길흉판단(吉凶判斷)에 적용시킴으로써 획기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가 저술한 사주첩경(四柱捷徑)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명리학 서적으로 이름났다.
자강(自彊)의 쌍벽(雙璧)으로서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玩)선생이 거명되곤 한다.
도계(陶溪)는 말년에 이르러 대전에 은거하면서 「명리요강(命理要綱)」과 「명리사전(命理事典)」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위천리(韋千里)의 「명학강의(命學講義)」를 번역하여 「명리요강(命理要綱)」의 이론체계를 세웠고, 「팔자제요(八字提要)」를 번역하여 거기에 일지론(日支論)을 첨가하여 「명리사전(命理事典)」을 만들었는데 명리서적이 불모(不毛)이다 싶은 시기에 좋은 교범(敎範)을 제공해 준 셈이었다.
그리고 법조인(法曹人)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백영관(白靈觀-본명 최영철)이라는 분의 손으로 쓰여져 초학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는 책으로 「사주정설(四柱精說)」이 있다. 너무 내용이 간결해서 입문서(入門書)로서는 다소 난해하지만 상당히 정리가 잘 된 명리서적으로 정평이 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