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다 A를 또 생각했다.
추억처럼 일부러 떠올릴 필요 없는 자동 코스이다.
수 십 년 째 적어도 하루 한 번 이상은
A가 그렇게 커피잔을 타고 내 가슴 속에 들어온다.
아침엔 300mm 큰 컵으로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낮엔 식후 디저트 겸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는 편이다.
믹스커피는 (개인차는 있지만) 농도가 맛을 좌우하지 않는가?
습관처럼 정량의 물이 부어지지만, 어쩌다 적게 또는 많게 붓기도 한다.
2~3ml 차에도 미묘한 맛 차이가 나니 잘 부으면 좋다.
사진에 있는 컵이라면
몸통 주름 무늬 덕분에 무개념으로 주루룩 흘려도 딱...
믹스 커피에 최적화된 컵이라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유리잔보다는 도자기 커피잔을 선호한다.
색도 무늬도 모양도 다양한데다 열보존에 탁월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A는 이 유리잔에 커피를 마시곤 했다.
유리잔 커피는 내가 직장인 10년차 쯤 일 때서야 자주 눈에 띄곤 했다.
다방이 뒷골목으로 쫒겨나고 커피 전문점이라는 게 우후죽순 들어서며
아메리카노를 무슨 음료수 취급하듯 유리잔에 서빙하는 집이 드믈지 않았다.
요즘은 테이크아웃 커피가 유행이면서
역시 투명 재질 pe소재 컵이 접수한 모양새지만 말이다.
A는 유리잔커피에 관한 한 개척자였던 셈이다.
이 잔은 내열 강화(파이렉스) 유리라서 좀체 깨지질 않는다.
A가 먹던 그 잔을 바통터치해 내가 30년 이상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A는 내 바로 옆자리 동료였다.
나보다는 커피를 자주 마셨는데, 늘 이 컵에 마셨다.
난 유리잔에 먹는 커피 맛이 궁금했지만
파이렉스 유리 잔을 굳이 구입하진 않았다.
어느 날 A에게 유리잔커피에 대한 내 느낌을 얘기했다.
커피의 (밝은 갈색) 색상이 겉으로 보여서 푸근해 진다고
그리고 덩달아 커피를 마시도록 유혹된다고...
커피는 정리이고 평안이라고...
남겨진 커피 보는 것도 좋다고...
유리잔커피에 대한 동경에도 불구하고
난 잔을 교체하지 않았고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A가 집 근처로 직장을 옮긴단다.
(가는 곳에 다 있어서 굳이 가져갈 필요 없다며)
자기 사무용품 중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고개 저으며 그저 유리잔 커피맛은 궁금하다고..
사용하던 건 줄 수 없으니 사다 주겠단다.
난 새 거 보담 이걸 줄 수 있으면 주라고..
미소와 함께 잔이 바로 내게 건네졌다.
감격해서 눈물샘이 터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단지 커피 맛 때문에 그 잔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참 좋은 동료 옆에서 난 편했기에
좋은 기억을 커피잔으로 상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단 1년 이었지만 그녀를 옆에 둔 난 행운이었다.
지금 공장 미인들의 V라인과 거리가 먼 그렇다고 계란형도 아닌,
동그라미로 그려 넣을 수 있는 얼굴이지만
목화꽃처럼 밝고 투명한 톤의 피부는
공주가 되어도 용서될 수 있을 외모였지만,
오히려 늘 낮은 단화에 수수한 파스텔 색조의 마이 차림을 선호하는 그녀였다.
타인의 찬사에도 한두 번 도취할 만도 하지만
과잉 반응은 절제하는 건지 아예 무덤덤한 천성인지 늘 한결 같았다.
커피의 향과 맛보다 더 진한 마음씀씀이로
분명 거기 있고 꽉 찬 존재인데 생색내지 않는 여자였다.
공기 같다,거나 산소같은 여자,는이 여자를 위한 표현이다.
난 여전히 오늘도 그 잔으로 커피를 마시고 그녈 생각한다.
수십 년이나 기억해 주는 사람이,
그것도 하루 한 번 이상, 있다는걸 그녀가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으응~?그래?,하며 미소 한 번 짓고 말 것이다.
뱀발:
선물을 할 일이 생겼다.
난 늘 물건 선물을 하는 스타일인데,
요즘 사람들은 물건보다는 현금이나 상품권을 선호하니 고민이 아니 될 수 없다.
물건이 아니라도 주는 마음은 알아줄테지만,
과연 유리잔 받은 나처럼 사람을 기억해 주긴 할까?
몇 달에 한 번이라도? 아니 1년에 한 번이라도?
오히려 선물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지 않을까?
꼭 기억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선물 취지에 충실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