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6:4~22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같겠지만 1960년대에 미국에 탐 존스(Tom Jones)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었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디라일라(Delilah)’라는 곡이 있다. 1968년에 우리 나라에서도 조영남씨가 이 곡을 번역하여 불러서 당시 20대였던 그가 상당한 인기를 모았었다. “밤 깊은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 때… My my my 디라일라 Why why why 디라일라.” 아마도 이 부분을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영어 발음으로는 ‘디라일라’라고 읽지만 한국말 발음인 ‘들릴라’가 히브리어 원문 발음과 더 가깝다. ‘데릴라’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히브리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본문의 주인공인 이 여인은 주로 ‘배신한 여자의 대명사’로서 탐 존스의 곡에서도 자기 애인을 배신했다가 그 애인에게 살해 당하는, 곡조의 멋있음에 비해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손과 데릴라’는 헐리우드 영화의 주제로도, 음악의 선율로도(예, 헨델의 ‘삼손’), 소설의 소재로도, 화가의 영감으로도 매력이 있는 ‘근육질의 남성, 선정적인 미녀, 사랑, Sex, 돈, 음모, 유혹, 배반, 잔인, 비참, 죽음, 복수, 반전’이라는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세인들에게도 흥미 있는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유명한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사랑에 빠졌었던 남자가 다름아닌 하나님이 탄생 때부터 나실인으로 운명 지으신 사사 삼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의 압제 하에서 구원해야 하는(13:5)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스라엘 땅에 태어났다. 삼손은 그의 사역에의 부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계속 블레셋의 여인들과 불륜의 관계를 거침없이 맺고 있다. 본문이 시작되기 바로 전(前) 사건도 삼손과 가사의 한 기생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6:1~3). 서슴지 않고 기생의 집을 찾은 삼손의 도덕성도 문제지만 본문과의 연결성을 살펴 본다면 삼손은 결국 가사라는 블레셋 성읍에서 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16:21), 16:1~3은 그 성읍의 배경이 되는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들릴라의 등장과 음모(16:4~5)
본문은 “이후엽라고 시작함으로 1~3절의 ‘가사의 기생사건 이후’임을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반영해 본다면 ‘삼손이 여인을 사랑했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 표현은 삼손의 일반적인 성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와 깊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내 될 뻔한 딤나 여인의 경우처럼(14:16) 이번에도 그는 이 여인을 사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여인은 소렉 골짜기에 산다고 되어 있다. 블레셋 평야 북쪽 끝에 위치한 소렉 골짜기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삼손이 탄생한 소라도 바로 이 소렉에 위치해 있고 그의 첫 번째 아내가 살았던 딤나도 소렉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까 1~3절에 언급된 가사와 헤브론이 각각 블레셋의 성읍과 이스라엘의 성읍을 대표한다면 소렉이라는 장소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계에 속하는 애매한 장소를 일컬으며 삼손은 자신이 익숙한 곳의 한 여인에게 다시 사랑을 느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들릴라이다’라고 하며 마지막으로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힌다.
들릴라가 히브리 여인인지 블레셋 여인인지가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딤나의 여인과 가사의 기생이 모두 블레셋 여인인 패턴을 쫓아 저자는 굳이 들릴라를 블레셋 여인으로 언급하지 않고 기정사실화 한 것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삼손의 여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된 것은 들릴라 한 사람이다. 4절의 문장 구조상으로 이 여인의 이름을 가장 마지막에 극적으로 소개한 것만 보아도 저자는 이 여인의 이름을 강조하고 있다. 삼손을 탄생시킨 어머니의 이름은 밝히고 있지 않으면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여인의 이름은 밝히고 있다. 그만큼 그의 죽음에 더 많은 의미를 저자는 부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들릴라’라는 이름 속에는 히브리어의 ‘밤(night)’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삼손’의 이름 속에는 ‘해(sun)’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결국 해가 밤에 정복당하여 빛(시각)을 잃고 마는 삼손의 운명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름의 뉘앙스를 살려 시작부터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그녀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이 여인이 창녀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결혼하지 않은 관계에서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류의 여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들릴라에게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몰려와 삼손을 ‘꾀어’ 그의 힘의 비밀을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에서 ‘꾀다’라는 단어는 삼손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손님들이 딤나의 여인에게 남편을 ‘꾀어’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14:15). 두 여인 다 동일한 종류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하나는 삼손이 낸 수수께끼의 정답을, 다른 하나는 삼손 자신에 대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달라는 것이다. 블레셋 방백들의 목적이 네 가지의 동사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고’(히브리어 반영),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는지’를 알려 달라는 것이다. 딤나의 여인에게는 협박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했지만(14:15) 들릴라에게는 돈으로 유혹한다. 여기에서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을 다스리는 ‘다섯 방백’(3:3)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여 각각 은 일천 일백씩 모두 ‘은 5천 5백’을 주겠다는 것으로 계산이 된다.
참고로 출애굽기에서는 노예 한 사람의 배상 값으로 은 30세겔이 들었으며(출 21:32),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로 구입한 막벨라 굴은 은 400세겔이 들었고(창 23:15), 아간이 여리고에서의 노략물을 숨겼다가 가족까지 몰살당한 전략물 중에는 은 200세겔이 포함되어 있었다(수 7:21). 이러한 것으로 비추어 보아 ‘은 5천 5백’이라면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다. 여기에 놀란 어떤 성경 학자들은 ‘천’이라는 숫자가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던지지만 ‘은 5백’도 상당한 액수이며 본문에 엄연히 적혀 있는 ‘천’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마음대로 없앨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삼손의 몸값이 메가톤 급이라 하겠다. 그만큼 블레셋인들은 삼손을 구속하기를 원했으며 이 자체만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한 그 분의 목적을 독특하게 달성하고 계셨음을 볼 수 있다. 어쨌든 들릴라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거액의 액수의 거래가 들어 온 것이다.
1.유혹과 배반(16:6~20)
여기에서부터는 삼손과 들릴라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들릴라의 ‘위험한 게임(?)’이 진행된다. 저자는 반복적인 패턴을 사용함으로 이 부분의 긴장감과 흥미를 더하고 있다. 아래와 같이 도식화하여 살펴 볼 수 있다.
(1)첫 번째 시도(16:6~9)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삼손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본다. 삼손의 응답은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결박하면 본인이 약하여 져서 다른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답한다. 일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함으로 그럴듯하게 둘러 된다. 들릴라는 블레셋인들에게 그대로 준비시켜 매복시키고 삼손을 결박하고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것을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들릴라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2)두 번째 시도(16:10~12)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을 희롱하고 속인 것을 불평하며 삼손이 어떻게 결박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삼손의 응답은 이번에는 더 그럴 듯하다. 쓰지 아니한 새 줄로 결박하면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답한다. 사실 새 줄은 전에 이미 삼손이 한 번 경험한 것이었다(15:13~14 참고). 들릴라가 새 줄을 취하고 삼손을 결박하고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하니 삼손이 그것을 실을 끊음 같이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이 매복했었지만, 들릴라의 계략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3)세 번째 시도(16:13~14)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을 희롱하고 속인 것을 불평하며 그가 어떻게 결박될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삼손의 대답은 이번에는 더욱 더 그럴듯하고 또한 위의 경우와 달리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고 답한다. 다시 일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동반하고 있고 그의 ‘머리털’이 언급되면서 그의 대답은 진실과 많이 가까워 졌다. 듣기에도 아슬아슬하다.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짰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사기 4장에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기 위하여 장막 말뚝을 취하여 그가 잠든 사이에 그의 살쩍에 박으매 그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4:21). 거기에서 ‘말뚝’이라는 단어와 ‘박았다’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여기에서 ‘바디’라는 단어와 ‘단단히 짰다’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디’라고 해석된 단어는 ‘핀’이나 ‘말뚝’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단단히 짰다’는 단어는 ‘찔렀다’나 ‘박았다’의 의미를 가진 말들이다.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털을 위선과 함께 단단히 짜고 그것을 핀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함으로 죽음의 불길한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 지고 있다. 야엘의 손에 잔인하게 죽어간 시스라의 운명이 들릴라에 의한 삼손의 운명이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이번에도 들릴라가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하니 삼손이 직조들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냄으로 그녀의 계략은 다시 실패로 돌아간다. 위기를 일단은 넘긴 셈이다.
(4)네 번째 시도(16:15~20)
불안함으로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들릴라의 공략이 계속된다. 위의 세 번의 반복으로 인하여 들릴라도 삼손도 글을 읽는 독자도 모두 인내심을 잃어 가고 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종용한다. 사랑한다면 비밀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이 말은 딤나의 여인이 사랑한다면 수수께끼의 답을 말해 달라는 것과(14:16) 같은 종류의 수법이다. 삼손이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16절에 보면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재촉하여 조르다’라는 단어도 딤나의 여인이 삼손을 ‘강박하였다’(14:17)는 단어와 동일하다. 삼손이 이쯤에서 무너지지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는 부분이다. 또한 여인의 재촉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유머와 과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그 자체가 예언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삼손이 드디어 “진정을 토하여” 진실을 발설한다(17절). 그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첫 번째는 삼손이 자신의 모태로부터의 나실인으로서의 삶의 부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나실인의 의무에 대해 무관한 사람처럼 행동한 삼손의 무책임한 행동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심리적 분석이 필요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두 번째는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는 표현이다. 한글 번역은 동일하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이제까지는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like any other man; 7, 11절)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약간의 차이이기는 하나, “모든 사람과 같으리라.”(like all men; 17절)는 표현을 쓰고 있다. 결국 이러한 언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삼손의 진심은 그가 나실인으로 살기 보다는 ‘평범한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를 갈구하고 있었다고 분석해 볼 수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원하는 방식대로 살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기에 들릴라의 집요한 요청과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이 힘센 나실인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삼손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바람은 그가 설사 평범한 한 남성이었을지라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인 허상’임을 잊고 있다는 현실이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고 멸망의 대상인 그들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자초할 뿐임을 삼손도 이스라엘도 잊고 있었다. 특히 본문에서 삼손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야훼’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인 용어인 ‘엘로힘’을 사용함으로 자신들의 언약의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블레셋에게 던져지는 진실이라는 것은 돼지우리 속에 던져지는 진주와 같은 것을(마 7:6) 삼손은 잊었거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들릴라가 전격적으로 모든 주도권을 쥐고 일을 진행시킨다. 그녀는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블레셋 방백들을 불러 들였으며(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이번에는 아예 그들이 은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손을 잠들게 하고, 사람을 불러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게 하고, 삼손을 괴롭게 하여 그의 힘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전에 했던 공식대로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고 외친다.
놀란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으면 자신의 머리를 미는 것도 몰랐는지 그것도 미스터리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최대의 착각이었다. 나실인으로서 다른 조건들을 무시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간과하셨으나 머리털에 대한 조건만은 결정적이었음을 삼손이 간과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음을 본문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2.배반의 결과 (16:21~22)
‘밤’의 여인인 들릴라에 의해 ‘해’와 같은 삼손이 지고 말았다. 그 까닭에 블락(Block)이라는 학자는 이 부분의 제목을 ‘the sun has set’(‘해가 지다’) 이라고 붙였다. 삼손은 빛을 빼앗기고 영원한 어둠 속에서 살게 되었다. 마치 14장의 수수께기의 내용처럼 강한 자가 단 것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다(‘딤나의 여인’참고). 삼손의 이야기는 계속되나 들릴라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일단락이 난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들릴라에 대한 논쟁. 페미니스트(Feminist) 성경 신학자들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중심의 성경해석의 편견에서 벗어나 성경 속의 여인들을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많이 노력한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들릴라는 조금 불편한 존재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 성적 매력을 동원하여 사랑을 배반한 여인에게서 여성들이 모델로 삼을 점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녀를 딤나의 여인처럼 남성들의 싸움에 희생된 억압당한 여인처럼 볼 수도 없다. 스미스(Smith)라는 여성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적어도 들릴라를 재정적으로 독립을 이룬 사업가적 기질이 있는 여인으로 본다. 그녀는 주위에 가족이나 다른 남성이 언급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집을 소유하여 사는 여인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삶을 개척하여 창조적으로 살아가며, 자기만족을 추구하면서도, 재정적인 자급을 이룬 21세기형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사사기에서 들릴라는 1장에서의 악사라는 여인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악사’ 참조). 가나안 족속을 물리친 이스라엘 장수를 남편으로 맞이한 이스라엘 여인 악사는 희망과 약속의 성취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들릴라는 가나안 여인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사사를 무너뜨림으로 이스라엘의 나락 끝까지 다다른 타락상과 가나안 족속과의 연합으로 비참한 결말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 관점에서 들릴라는 드보라와도 대조가 된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미’(5:7)로 불렸다. 들릴라는 삼손을 잡는데 일등공신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녀를 ‘블레셋의 어미’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영웅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기 속에서 이 여인들은 당당히 그들의 이름을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논쟁을 떠나서도 그녀는 자기의 역할을 당당히 해내고 자기의 몫을 철저히 챙긴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삼손의 몰락은 그녀가 속한 블레셋의 몰락과 직결되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계셨다는 사실이다(16:30). 사사기의 입장에서 그녀는 여전히 멸망당해야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다곤 우상에게 충성된 가나안 족속의 한 여인일 뿐인 것이다.
둘째, 삼손의 우매함. 삼손의 어리석은 모습은 그의 스토리의 여기저기서 풍겨 나온다. 그 중에서 두 가지만 지적해 보자면 첫 번째는 여인을 고르는 안목이다. 대개 남자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여인을 아내로 찾는다는 말이 있는데 삼손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계속 그의 어머니와는 거리가 먼(적어도 영적으로는) 여인들만 가까이해서 그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두 번째는 경험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싶다. 들릴라가 딤나의 여인과 똑같은 패턴으로 삼손을 종용하는데도 이번에도 답을 해주고야 마는 삼손은 그야말로 ‘육체미는 있으나 머리는 텅 빈 남성’인지 아니면 ‘너무도 순수한 순정파’의(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는) 감수성 예민한 남성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잠언에서는 실수를 되풀이 하고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련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는 말씀을 모두 새겨 들어야 한다.
셋째, 은사의 사용. 현대판 ‘헐크’를 상기시키는 삼손의 ‘힘’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특별한 은사이다. 두 번에 걸친 하나님의 사자(the angel of Yahweh)의 출현으로 신성한 목적을 부여받고 탄생한 특별한 인물이다(13장). 그러한 그의 결말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것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부르심을 소홀히 하고 육적인 만족에 많은 정력과 시간을 낭비한 데에 있다. ‘사사’라는 막중한 지도자의 위치도 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가볍게 받아들인 그의 삶을 보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부르심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은사와 분명한 부르심이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그것을 어떠한 자세로 얼마나 신실하게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존 밀톤(John Milton)의 작품 중에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이라는 시극(詩劇)이 있다. 거기에 보면 ‘내가 내 자신 외에 누구에게 불평을 할 수 있단 말인가?’(whom have I to complain of but myself; line 46)라는 구절이 나온다. 삼손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론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의 모습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