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이산표석의 뿌리는 경주 남산
장산 이산표석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장산 폭포사 아래에 ‘이산(李山)’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일제의 임야 수탈에 맞서 조선 왕실의 소유임을 알리는 경계석’으로 되어 있지만, 이후 장산 일원에서 160여 개가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안내판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몇 개나 세웠는지 이산표석에 얽힌 수수께끼를 탐사해 2021년부터 10여 회 이상 본지에 연재한 바 있다.
(해운대라이프 인터넷신문 www.omhl.co.kr 참조)
우스갯소리지만 이산표석을 찾는 노력과 정성으로 산속에서 산삼을 캐러 다녔으면 아마 이산표석보다 더 많이 찾았을 것이다. 2023년 2월 11일 현재까지 장산 일원에서 발견한 이산표석은 총 165개다. 이산표석의 몸통 길이는 약 80cm이다. 이 중 땅 위로 드러난 부분은 약 30cm인데 가로 세로가 약 12~13cm 정도이고, 땅속에 묻힌 부분은 약 50cm로 가로 세로가 약 15.2~16cm에 무게는 약 40kg 정도 나간다. 이산표석의 구조를 보면 표석의 윗부분을 재차 다듬어 ‘이산’이란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 이산표석은 경주 남산의 암석과 동일한 재질
그럼 이 많은 이산표석은 어디서 어떤 암석으로 만든 것일까? 그동안 옥숙표 장산습지보존위원장을 중심으로 이산표석의 모체와 가공 터를 찾아 장산은 물론이고 금정산과 통도사 주변까지 탐문했다. 또한 석재 전문가를 모셔와 정확한 제작연도와 암석의 출처도 감정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산표석을 다듬느라 표석에 남아 있는 징의 쇠 성분을 분석해 시기를 측정하려 던 시도는 무위로 끝났고, 그나마 “암석이 백두대간의 것이다”는 정도의 감정 결과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 올 초 서울에서 내려온 석재 전문가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쏟아졌다.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의 재질이 경주 남산의 암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경주 남산이야 워낙 불상 조각이 많은 곳이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커다란 암석에서 수백 개의 표석용 돌을 뜬다는 것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정황상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가공석을 이용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가공석을 찾아 다시 경주 남산을 인터넷에서 뒤지니 남산신성이 등장했다. 혹시 신성의 성벽 돌로 만든 것은 아닐까 추측했지만 성벽 돌의 길이가 50cm가 넘지 않아 후보군에서 제외했다.
다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 남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마침내 남산신성 안에 있던 창고의 기단석(基壇石)과 장대석(長臺石)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근거리며 문화재관리국 자료를 파헤치니 긴 장대석들이 유력한 후보자로 떠올랐다. 문화재관리국 자료에 의하면 세 곳의 창고 중 좌창지(佐倉址)와 우창지(右倉址)에는 장대석이 없었고 가운데 중창지(中倉址)에만 남아 있었다.
◇ 경주 남산신성 중창지 2회 탐사
드디어 1월 27일, 남산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남산신성만 치고 도착한 곳은 옥룡암인데 옥룡암 앞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가 차에서 지도까지 꺼내와 중창지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얼굴을 맞대고 설명하는 내내 담배연기를 뿜어댔지만 눈앞에 중창지가 떠올라 기침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최단거리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최치원 선생과 관련 있는 상서장이란 말에 상서장으로 향했다. 함께 탐사에 나선 ‘해운대를 사랑하는 모임’ 이무성 회장과 중창지 안내판을 찾아 남산을 뒤지고 등산객과 신성 복원 사업 중인 분들에게 물어봐도 중창지를 찾을 수 없었다. 들뜬 마음에 점심도 거르며 뒤졌건만 끝내 남산은 중창지를 내놓지 않았다. 근데 하산하는 기분은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뿌듯했다.
중창지에 대한 정보를 모은 후 2월 9일, 간절한 기도 후 2차 탐사에 나섰다. 이번에도 이무성 회장과 함께했다. 2차 탐사라 그런지 남산의 모든 사물들이 확연해져 절로 여유가 생겨났다. 40분가량 올랐을까, 문득 고개를 돌리니 기단석이 보였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니 그토록 원했던 장대석과 창고 주춧돌 등이 사방에 놓여 있었다. 장대석 하나를 줄자로 재어보니 가로세로 29~25cm, 길이 156cm라 이산표석을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밖에 다른 크기의 장대석도 많았다. 문화재관리국 자료엔 길이 107m, 폭 23m나 되는 기단(基壇)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엄청난 숫자의 장대석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 장대석들이 이산표석을 위해 남산에서 장산 일원으로 옮겨온 것이라 확정 지었다.
신기한 일은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 중창지 장대석을 마주한 점이다. 1차 탐사 땐 그토록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마 남산이 단번에 중창지를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 상서장에서 이산표석 바로 앞 단계 가공석 만나
가볍게 상서장(上書莊)으로 내려왔다. 상서장 안내판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가 놓여 있다’는 구절에 이끌려 상서장으로 들어섰다. 근데 들어서자마자 담장 아래 긴 가공석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크기를 재보니 이산표석과 같이 길이가 80cm요 가로세로 15.5~16cm가 아닌가. 솟구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 석재가 쓰인 부분을 찾고자 상서장 내의 건물과 담장까지 샅샅이 살폈다. 아무리 살펴도 이 석재가 사용된 곳은 어느 데도 없었다. 다만 안내판에 언급된 오래된 각기 다른 가공석이 안쪽 담장 아래 많이 누워 있었다. 여기에도 앞서 발견한 가공석과 유사한 석재는 없었다. 그렇다면 안내판에서조차 언급되지 않고 상서장 그 어떤 곳에도 사용되지 않은 이 가공석은 어디서 굴러왔단 말인가?
불현듯 중창 및 근방의 좌·우창 바닥에 놓여 있었던 장대석을 근처에서 1차 가공한 뒤 가장 도로와 가까운 상서장 옆으로 옮겨 오는 그림이 펼쳐졌다. 남산신성 내 창고의 장대석이 이산표석이 되는 과정 중 일부가 드러난 셈이다.
◇ 최치원 선생 따라온 장산 이산표석
보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 경주시청 문화재 담당 부서를 거쳐 경주최씨 문중을 탐문했다. 문중 관계자는 담장 아래 누워 있는 가공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에게 이산표석으로 남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한 뒤 이산표석 제작과정을 밝히는 데 협조를 요청했다.
돌이켜보면 이산표석을 따라 경주 남산까지 오게 된 과정과 중창지를 찾고 장대석을 만나는 순간순간이 한 편의 잘 짜인 각본 같다. 마치 누군가 남산 중창지와 상서장으로 이끄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남산 상서장 최치원의 자는 해운(海雲)과 고운(孤雲)이다. 동백섬엔 최치원의 해운대가 있고 경주 남산 상서장엔 최치원의 고운대가 있다. 아마도 장산 일대의 이산표석은 경주 고운대에서 해운대에 이르는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한 것이리라.
/ 예성탁 발행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