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표현된 장산국 건국기
[ 편집자 주 ] 지난 19일 해운대문화원 향토사세미나에서 ‘건국신화로 본 장산국’이란 주제발표가 있었다. 이날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장산국 건국에 대한 대한 스토리를 정리해 본다.
단군신화로 부르긴 해도 이제는 신화로 보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선조들의 비유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장군지』와 『해운대구지』에 있는 장산국신화를 엮음
어느 여름날 소나기가 그치자 하늘에서 선인이 무지개를 타고 이 마을에 내려왔다.
선인은 선녀보다 아름다운 고선옥의 모습에 매혹되어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 아들 열 명과 딸 열 명이 출생했는데, 장성하여서는 모두 20곳의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선인은 마을에 토성을 쌓아 그 씨족들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되었다. 선인은 때가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고선옥은 고씨족을 다스리는 고씨 할매가 되었는데, 날마다 옥황상제께 선인의 하강을 열심히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씨 할매는 선인을 기다리다 지쳐서 숨졌다. 20곳의 마을에 있던 아들딸들은 고씨 할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가족들을 이끌고 와서 바위를 다듬어 상여를 만들고, 상여 바위 정상에 큰 묘를 만들어 안장하였다.
◇ 간비오에 등장한 금관가야 김해 김씨 귀족
장산국 신화 역시 마찬가지 경우다. 장산국 건국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선인의 정체가 금관가야에서 황산강을 건너 지금의 동래 지역으로 진출한 김해김씨 귀족집단이란 것을 이해하면 쉽게 신화의 요소는 벗겨진다. 당시 청동기 문명에 머물던 해운대 지역 주민들의 눈에는 월등한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선인 일행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보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귀족 일행은 동래 부근에서 배를 타고 ‘큰 나루터’란 뜻을 지닌 ‘간비오’에 도착하여 현재 우1동 마을로 진출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마을 처녀 중에서 선별하여 선인의 여자로 삼았고 이어 ‘철기문명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근 마을에서 젊은 남녀 20여 명을 뽑아 입교시켰다. 아카데미 과정에는 대장간을 만들고 금관가야에서 가져온 최첨단 하이테크 제품인 덩이쇠로 여러 철제 무기 및 농기구를 만드는 법도 들어 있었다. 아카데미 과정을 마친 이들에게는 수료증과 함께 대장간 설계도와 덩이쇠를 함께 딸려 인근 마을로 보냈다.
◇ 장산국의 출발지 ‘장지마을’
그래서 장지마을이 탄생했다. 이들에게 철기문명이란 지혜를 전했다 하여 선인이 머문 마을이 장지(萇旨)마을이 되었고, 교육생 중 맏이 즉 장자가 터를 잡은 좌동 일대는 장자(長子)벌로 불렸다.
장지마을 뒷산이 장지봉으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장지마을을 굽어 흐르는 내가 바로 장지천이다. 그리고 굽이굽이 장지천을 따라 흐르는 물이 햇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너무 가관이라 해운8경의 하나인 장지유수로 칭해졌다. 장산 주변 마을로 보내진 젊은 남녀들이 마을의 지도자로 자리 잡아 하나의 연방체제를 갖추게 되자 선인은 다시 금관가야 왕의 부름을 받아 본 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물론 소, 돼지 등을 잡아 충분히 송별회도 열었으며 귀국의 길을 선인의 왕의 부름이라 옥황상제의 부름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 존경스런 선인의 여자 고선옥
선인이 남겨놓은 탄탄한 바탕 위에 선인의 여자 선옥은 주변 마을을 잘 다스렸다. 이에 따른 공적으로 후일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위대한 선인의 여자라는 뜻으로 고(姑·高)선옥이라 명명했다.
고선옥이 죽어서도 장산 인근의 마을연합체는 복천동 고분군의 귀족층과 협력하며 장산국을 발전시켜나갔으며 후일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복천동 지역에서 황령산 지역으로 후퇴하게 되었어도 여전히 장산국의 명맥은 이어졌다.
◇ 내산국은 장산국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자 장산국 역시 신라에 항복한 탓에 7세기가 넘도록 유지하다 759년 경덕왕에 이르러 장산국이란 이름 대신에 동래군으로 변경되었다. 동래(東萊) 동쪽의 내산이라 ‘내산이란 물가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수영강 옆에 자리 잡은 장산국은 내산국으로도 불렀다.
/ 예성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