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사야 전승의 수용과 전수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39장까지 등장한다. 그는 40장 이후부터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대기적 의문은 계몽주의와 역사비평 방법론의 등장 이전까지 논리적 설명과 해석이 아닌 신앙의 영역에서 설명되었다. 신약성경, 초기 유다이즘과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한 미래를 예고할 수 있었던 인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제1이사야서, 제2이사야서, 제3이사야서의 표현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이사야 예언자가 등장하지 않는 40장 이후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렇게 이사야서를 구분하게 된 연구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에 이르기 이전, 이미 이사야서의 연대기적 모순을 언급한 사람이 있다. 그는 유다교의 성경학자였던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1089-1164?)인데, 이사 40장 이후가 바빌론 유배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의 의문 제기가 당시에는 빛을 발하지 못하였지만, 19-20세기에 이르러서는 학자들의 폭넓은 동의를 얻게 된다. 에즈라 이후 이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요한 크리스토프 되덜라인(1746-1792)이다. 그는 1775년에 이사 40장 이후는 바빌론 유배 시기의 본문으로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아닌 또 다른 익명 혹은, 동명의 예언자가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892년에 베른하르트 둠(1847-1928)은 되덜라인의 이론을 바탕으로 익명의 예언자에게 ‘제2이사야’, 56-66장의 예언자적 인물에게 ‘제3이사야’라는 가공의 이름을 부여했다. 이후 이사야서는 한 권이 아닌 세 권의 분리된 책으로 여겼다.
(1) 바빌론 유배 시기
제2이사야서라고 알고 있는 40-55장은 바빌론 유배 시기(기원전 587-538년)를 배경으로 한다. 이는 앞선 1-39장의 시대(약 기원전 740-700년)와 약 150년의 시차를 보여준다. 이사 40-55장의 본문은 그 시대에 대한 몇몇 정보를 제공한다. ‘바빌론’과 ‘칼데아’(43,14 ; 48,14.20) 및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44,28 ; 45,1)에 대한 언급과 40-48장의 주요 내용인 유일신론, 우상숭배 논쟁과 신탁에 관한 논증 등은, 그 본문의 배경이 바빌론 유배 시기임을 알려준다. 아울러 유배가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은(예 : 40,1-2 ; 48,20 등), 바빌론의 세력이 점점 기울고 영향력을 잃던 시기였음을 알려준다.
제2이사야서는 문학적 양상도 선행하는 이사 1-39장과 구별되는데, 시편에 주로 등장하며 전례적 예배의 형식을 만드는 찬양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제2이사야서는 구약성경의 전통을 다수 수용하였다. 여기에 수용된 전통은, 성조 전승, 탈출 전승, 예언자적 심판과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서의 신학, 신명기 신학과 함께 시온, 백성과 다윗의 주제가 담긴 예루살렘 전통 등이다. 무엇보다 제2이사야서는 이사 1-39장에서 사용된 표현들을 그대로 써서 선행하는 이사야서를 계승한다. 이런 사실들은 제2이사야서가 제1이사야서의 신학을 계승하고 심화하였으며, 이를 위해 구약성경의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수용하여, 이사 1-39장과 분리된 책이 아님을 드러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익명의 예언자 제2이사야는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적 가르침을 수용한 이사야의 제자로서(8,18 참조) 바빌론에서 유배 중인 백성들을 위로하고(40,1 ; 49,13 ; 51,3.12.19 ; 52,9 ; 54,11),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재건에 대한 희망을 선포한다(40,1이하). 그런 맥락에서 그는 복음 선포자로 등장한다.(41,27 ; 52,7)
(2) 페르시아 시대와 초기 헬레니즘 시대
바빌론 유배 시기는 55장에서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56-66장은 유배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앞선 40-55장과 구별되는 본문으로 또 다른 익명의 예언자, 곧 제3이사야가 등장하게 된다. 이 단락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은 60-62장이다. 학자들은 이 본문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위해 애쓰는 분위기에서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저술 시기는 제2성전이 축성된 기원전 515년과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성벽 재건이 완료된 기원전 445년 사이로 추정된다. 유배에서 귀환한 하느님 백성 공동체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우면서 사회정의를 바탕으로 삼은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관점에서 제3이사야서는 신앙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혈통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윤리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면서 만백성에게 열린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선포한다(56,1-6 참조). 예루살렘의 재건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제3이사야서는, 제2이사야서가 그러했듯이, 선행하는 제1, 제2이사야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제2이사야서의 중심에 서 있는 ‘주님의 종’과 ‘시온’이 제3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 재건의 중심이 되는 시온의 의로운 공동체와 직접 연계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사야 예언서 가운데 가장 늦게 저술된 부분은 56-66장이 아니라 24-27장이다. 이 본문은 ‘이사야의 묵시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묵시록이라는 문학 양식은 유배 이후의 시기보다 귀환 이후 헬레니즘 문화와의 충돌에서 생성된 장르이다. 24-27장은 엄밀한 의미의 묵시문학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세상에 대한 심판과 심판 이후의 세상을 묘사한다는 사실에서 초기 묵시문학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사야 묵시록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예고한다. 심판의 대상은 지상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명령을 거스르며 영원한 계약을 깨뜨린 이들이다. 이에 따라 심판의 기준도 이스라엘 백성인지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했는지의 여부이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사람은(비록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심판의 대상이 되고, 하느님 계명과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은(비록 그가 이방인이라도) 구원의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