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새로운 체제나 변화된 룰을 접하면 상당히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일부는 그러한 새로운 체제속에 잘 적응해 녹아 들기도 하고 일부는 오락가락하는 분위기속에 살고 일부는 적응을 못해 주변만 맴돌다 사라집니다. 정치 사회적 대변혁속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부서져 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두고 그 자신의 문제이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이끌고 함께 가지 못한 그 당시 사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 (2020.1.5) 오후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어느 영화가 눈에 띕니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라는 영화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영화입니다. 저는 불현듯 조용필 선생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련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 프랑스 대혁명으로 탄생한 공화제와 자본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절하게 소외되고 처절하게 짓밟힌 예술가를 찾아 집을 나섭니다.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처절한 생을 살았던 고흐의 인생이 고흐의 탓이냐 우리들의 탓이냐를 생각하면서...
서양미술사 역사상 빈센트 반 고흐 만큼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낳는 화가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양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고흐만큼 갖가지 주장이 나오는 화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고흐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다루는 영화감독들도 다양한 각도에서 그를 조망합니다. 그만큼 빈센트 반 고흐는 알 듯 모를 듯 아니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금도 그의 예술세계를 더듬어 보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일생은 불운과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사후에 역사상 가장 영예를 누리고 있는 화가가 바로 빈세트 반 고흐라는데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예와는 달리 그의 무덤은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에 있지 않고 현재 프랑스에 있습니다.
고흐의 무덤(Tombeau de Van Gogh)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와서 언덕으로 조금 올라가면 넓은 밀밭이 나오는데, 이 밀밭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인 테오 반 고흐의 무덤이 있는 오베르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이곳에서는 19세기 오베르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여러 화가들의 무덤을 만날 수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바로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는 고흐 형제의 무덤입니다. 동생 테오 반 고흐는 형이 타계한 지 6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으며, 처음에는 네덜란드에 안장되었으나 1914년 그의 아내가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나란히 묻힌 형제의 무덤에는 작은 비석 외에는 별다른 표식이 없어 더욱 쓸쓸한 감상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조국 네덜란드는 고흐로 인해 거액의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그의 유해를 고향으로 옮기는데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국 출신 유명인사의 유해를 고향으로 옮기는 것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고흐 형제의 유해를 본국으로 옮기는데 공을 들인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국내의 한 전문가는 네덜란드가 무슨 염치로 그렇게 하겠는가라며 생존에 그를 철저히 무시하고 사후에도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을 갑자기 유명해졌다고 요란법석을 떠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그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향에서 쓸쓸하게 묻혀 있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참 많습니다. 그가 정말 미쳤는지, 고갱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그가 정말로 자기 스스로 귀를 잘랐는지, 그리고 정말 자살한 것인지 등등 아직도 미스터리한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서양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제각각 주장을 내놓고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이른바 카더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의 경우에도 2009년 고흐의 귀는 사실 폴 고갱이 펜싱검으로 잘라냈다는 주장이 2009년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에 보도돼 충격을 줬습니다. 독일 역사가 Hans Kaufmann과 Rita Wildegans는 2009년 책 "Pakt des Schweigens"(침묵의 협정) 출간 및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의 증언들과 당사자들의 친구, 가족에게 쓰인 편지들을 분석하여 판단한 결과, 당일 밤 어두운 조명 아래서 논쟁이 격렬해지며 고갱이 본의 아니게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펜싱검으로 고흐를 다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고흐는 고갱이 처벌받지 않기를 원하는 우정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고흐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도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정신 질환을 앓던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 7월 27일 스스로 총을 쏴 자살했다는 주장이 한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2011년 하버드대 출신 변호사 스티븐 네이페 변호사 등이 저서를 통해 타살설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법의학자 빈센트 디 마이우는 법의학적 소견으로 자살일 수 없다는 분석으로 타살설에 힘을 더하고 있습니다. 반 고흐의 총상 부위는 스스로 겨냥하기 어려운 위치고, 손에 화약 흔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타살설은 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으로 인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의 줄리언 슈나벨 감독은 스티븐 네이페의 타살설을 채택해 영화 속에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유명 화가이기도 한 줄리언 슈나벨 감독은 당시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자살로 보기 어려우며 특히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80일 머물면서 그림을 75점이나 그린 고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영화속에서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줄리언 슈나벨 감독은 고흐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고흐의 다 떨어진 구두와 아주 큰 구멍이 나 있어 양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궁색맞은 모습이 화면 가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조롱받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받고 돌맹이를 맞아가면서 까지 고흐가 추구하려고 했던 예술혼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감독은 처절한 몸짓으로 뒤쫒고 있습니다.당신은 화가가 아니며 결코 화가가 될 수 없다라는 최악의 지적까지 참고 들어야했던 그 빈센트 반 고흐. 견디다 견디다 못해 알코올의 힘을 빌면서 작업을 하는 그에 대해 동정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분이 솟아오르는 가운데 영화는 진행됩니다. 내용은 좋았지만 카메라를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흔들며 찍은 영상(핸드 헬드 기법)에 눈이 피곤해서 보기 힘들 정도였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에 대한 미스터리한 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의 저자이며 고흐의 예술세계를 심도있게 연구해온 이동섭 작가의 의견을 소개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노동의 가격만이 유일한 관심사이자 숭상하는 가치이다. 한 달 동안 식당에서 일하고 번 돈, 주식으로 번 돈, 그림 1점을 그려서 번 돈의 액수가 같다면, 자본주의 관점에서 그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다. 그래서 적게 일하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일수록 좋은 직업으로 간주된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의 중심을 돈으로 환원시켰고, 초창기 자본주의를 살았던 19세기 예술가들은 완전히 달라진 사회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시장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과 구매자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개성을 중시한 빈센트 반 고흐는 전자를 택했다.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난과 외면이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초기 자본주의를 살았던 반 고흐의 고난이 지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새겨진 그림을 보기도 전에 동정심과 애틋함을 느끼는 이유다. 프랑스 혁명으로 안착된 공화정은 결국 부르주아지를 위한 사회였고, 그들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어긋난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들로 버림받았다. 그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
2020년 1월 6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