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메모: 순경(順境)으로서의 '사랑'에 관하여,

[청라]

백팔십도 회심에는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품고, 2) 길을 찾고, 3) 스승을 찾고, 4) 혼자서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에요.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그가 어떻게 양육되는가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족에 의해서, 지역사회와 전통문화에 의해서, 양육되어야 해요. 역사의 장場에서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생겨날 수 없어요. 자아를 능가한 어떤 힘에 의해서 양육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순경順境에서 자라나야 한다는 말이에요. 반드시 역경逆境에서 자라야 괴로움을 벗으려는 욕망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흔히 있는 경우지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순경에서 생깁니다. 석가모니를 보십시오. 

마이다 슈이치, 『여시아문』, (서울: 삼인, 2012)

 
깨달음이라는 이상한 경로로의 진입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촉발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로 그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아닌 것'에 대한 체험과 체감으로부터일 것이다.
 
인생의 매 순간이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 점철된 한 사람이 있다라고 쳐보자. “평생 동안 빨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빨간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빨간색을 볼 수 없는 것”[i]처럼, 그(녀)의 삶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생로병사의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대한 욕망, 즉, 생로병사의 고통이라는 '역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었다면, 이는 생로병사와의 고통과는 무관한 '순경'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순경에 대한 몇몇 체험의 자리에, 바로 '사랑'에 대한 감각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 순경(順境) 하나: 원체험으로서의 사랑, 혹은, 어두움과 울림, 그리고 물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다시 말해, 태생으로서의 한 개체로서 양수 속에 둥둥 떠 있을 무렵, 그 존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온몸을 감싸던 그윽한 어두움과 작은 울림, 그리고 따스한 물결의 감각뿐이다. 언어 이전의 이 무념의 상태에 대한 원체험을 인간은 ‘실낙원’에 대한 감각질[ii]의 체험으로써 무의식에 각인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과격한 방식으로 끌려 나오면서 너무나도 눈부신 세상을 맞이하는 순간, 생로병사의 고통 가운데 '생'의 고통이 인간 모두에게 평등하게 부여됨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기억의 다발은 타인의 기억에 의거하여 점차 엉켜가기 시작한다.
 
2. 순경(順境) 둘: 타자성에의 끌림으로서의 사랑, 혹은 연인
 
사랑을 발견하였을 때, 다시 말해, 내가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 기억, 온몸을 감싸던 그윽한 어두움과 작은 울림, 그리고 따스한 물결에 대한 감각을 나-아닌-인간을 통해 문득 재발견하였을 때, 나는 그 대상을 향해 한없는 끌림을 느낀다. 원체험으로써 각인되어 있던 사랑의 감각질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면, 무의식의 깊은 심연으로 본능적으로 투신하듯 대책 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나는, 어느 새 사랑이라는 신세계에 조난되고야 만다. 나-아닌-인간과의 관계는, 이윽고 나의 원체험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그 아픈 진실을 드러내며, 바로 그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실연의 아픔 속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연정의 훼손으로 인한 배신감이 아닌, 언어 이전의 내 존재를 포근하게 감싸주던 안정감 있는 세계의 멸절과도 같은 충격으로 다가오며, 결국 이 충격은 실연한 인간으로 하여금,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망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한 조건으로 등장한다.
 
3. 순경(順境) 셋: 생사심으로서의 사랑, 혹은 돈/명예/건강/가족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명예/건강/가족'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두움과 울림 그리고 물에 대한 감각질의 흔적과 연인과의 합일에 대한 추억을 언제 어디서나 다시금 눈앞에 대령해 줄 요술램프 속 지니로 등장한다. 돈과 명예, 건강과 가족이 있으면, 어머니 자궁 속의 그 안도감과, 연인의 품속에서의 그 포근함이 언제라도 다시 나의 것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양산시킨다. 그 환상적인 속삭임 속에서, 인간들은 어머니의 자궁과 연인의 품속을 되찾기 위해, 그 순경에서 노닐던 어떤 원체험에 대한 감각질을 다시금 경험하기 위해, 돈과 명예, 건강과 가족을 제 손에 넣고자 맹목적인 에너지를 발휘하여, 일평생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의 자발적인 노예로서 헌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구성하던 순경의 경험들을 회복하기 위한 그 모든 발버둥이 이미 그 자체로서 역경이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음을 문득 발견하게 되고, 고오타마와 같은 몇몇 이들은, 순경의 경험들의 주체라고 인식되는 '나'의 구성과 성립 그리고 그 유지의 원동력이 다름 아닌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벼락같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태어난 적이 있었던가?”라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역경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되었던 일체의 순경마저도, 그리고 그 순경에 담겨 있던 모든 감각질의 체험마저도, 결국 '생각'과 더불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인간, 그러니까, '깨달은 인간'은 새로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깨달은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무관해진 인간이며, 이는 달리 말해, 생로병사의 고통을 알아챌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순경의 여러 경험 앞에서도 넉넉해진 인간인 셈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깨달은 인간은, '역경'의 거친 다이내믹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초인이 되어 고통의 문제를 끝장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순경', 그러니까, 자궁 속의 안도감이나 연인의 품 속의 포근함, 더 나아가, 삶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돈/명예/건강/가족과 같은 일체의 '좋은 것'과의 만남 앞에서 "미쳐서 털렸다가 제정신 돌아오고 또 미쳐서 털렸다가 제정신 돌아오기를 죽도록 반복"하면서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에 즐거이 투신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미쳐서 털렸다가 제정신 돌아오고 또 미쳐서 털렸다가 제정신 돌아오기를 죽도록 반복해야 영혼이 순수하게 제련됩니다. 미친 열정과 당황스러운 고통만이 영혼의 불순물들을 태워준답니다. 그렇게 순결해진 영혼은, 멀쩡하게 정신 차리고 사는 것이야 말로 생각 몇 조각에 팔려 노예가 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은 원래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고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 자체입니다. 사랑 때문에 미쳐서 빼앗기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생각입니다.[iii]

 
바로 이 관점에서, 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순경'에서 발생하는 다종다양한 외부적 개입에 '나'라는 생각의 폐쇄구조를 겸허히 내어놓고 또 느슨히 열어놓는 자세에 다름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다가오는 모든 인연법들에게 ‘나’를 먹잇감 같이 내어 던지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써, 사랑은 '하는 것' 아니라 '당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사랑은 '힘 빼는 일'의 다른 이름으로써, 자기해체로 나아가려는 벡터를 지향하는 일체의 구도행의 첨병이자 알짬일 수 있는 것이다. 
 
역경과의 만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강화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은, 순경과의 만남 혹은 그에 대한 회억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해체로의 '백팔십도 회심'이다. 이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부분은, 자기강화가 단순한 '건설'이 아니듯, 자기해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며, 오히려, "고요하고 그윽하고 미묘한"[iv] 개방된 체계로서의 자기를 다시금 조직해 나아가는 진화의 역동으로서,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려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교미를 원하는 암 사마귀를 조우한 숫 사마귀처럼 목숨걸고 사랑을 하세요. 까짓것 뒈지기 아니면 깨닫기랍니다. 자식 부끄럽게 바람피우고 다니라고 권장하거나 교주님 계좌에 입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빼앗길 방법은 얼마든지, 무궁무진하답니다. 전봇대에 부딪혀 기절이라도 해보시든지.[v]

 
전봇대는 하 많으나, 오호라, 기절이라는 사건은, 언제나, 역시나, 오직 모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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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소공님 블로글 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대하여>에서 인용. https://m.blog.naver.com/bestprpr/222001356098
[ii] 소공님 블로글 글 <지금 저기, 어제 여기>를 참조. https://m.blog.naver.com/bestprpr/222460864178
[iii] 소공님 블로글 글 <사랑은>에서 발췌. https://m.blog.naver.com/bestprpr/222011374735
[iv] 김지하의 인터뷰에서 인용. “난초는 사군자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고요하고 그윽하고 미묘하지요.”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0112072019031
[v] 소공님 블로글 글 <사랑은>에서 발췌. https://m.blog.naver.com/bestprpr/222011374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