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초 황덕환 열사
◎ 일초 황덕환(一櫵 黃德煥)
황덕환은 영광군 군남면 양덕리 206번지에서 1895년 2월 26일 부친인 황일수의 4형제 중 2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업하던 12세 때 유행성 전염병으로 양친이 돌아가시자 16세 때 상경하였다.
1913년 경성 자동차 학원에 입학하여 운전 면허증을 얻은 뒤, 일본군 내부를 정탐하기 위해 1915년 일본군 용산 보병대에 군속으로 들어갔는데 일본군 장교의 신임을 얻어 1916년 12월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 입학하였다.
3․1운동으로 조선 유학생들에 대한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시정부로부터 1922년 3월 본국 입국 명령을 받고 일본인으로 가장, 일본을 경유 국내에 잠입하려다 부산 수상경찰에 체포되어 정체가 탄로나서 대구 지법에서 5년형을 받고 복역 중, 일본 황태자의 출생으로 특사가 있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5년 7월 가출옥되었다. 그 후 고향에서 6개월간 휴양하는데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다시 상경, 용산에 ‘민생사’라는 이발관을 위장 경영하면서 서울 청년회 간부로 지하운동을 하다 일경의 미행이 계속되자 부득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당시 만주 일대 한인 50만 교포 사회를 통괄하는 독립단체인 신민부 경리부위원장 유정근 선생의 추천으로 1926년 1월 신민부에 가담하였다. 직책은 군정위원회 부위원장 겸 별동대장이었다.
황열사는 군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일본 영사관을 비롯, 일본 경찰관서, 군부대, 변절 친일 반민족단체 등을 수없이 습격하였다.
특히 악명 높은 해림시 민회 회장 배두산을 습격하여 그 자리에서 처단한 사건과 민회 토벌 사건은 변절 한인을 응징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변장, 백주에 자동차로 하얼빈시에 침입하여 정모 라는 민회 회장 및 민회 본부를 습격하여 분쇄해버린 것이다.
황열사와 대원들의 이같은 쾌거로 말미암아 일본의 독립운동 방해 공작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27년 9월 그는 무기 구입차 하얼빈시에 잠입하여 독일제 권총 20정을 구하여 본부에 밀송하고 남은 임무를 수행하려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남만주의 다롄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1928년 10월 다롄지법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일인 죄수가 한인 죄수를 멸시하자 이에 격분, 일인 죄수를 옥중에서 타살하고 이를 말리는 일인 간수마저 살해하였다.
일인 살인죄가 추가되어 뤼순 고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0월 5일 38세를 일기로 남만주 뤼순 감옥에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신경에서 운수업을 하던 그의 종제 황길환(현재 만주 거주)이 1933년 10월 유해를 고향 군남면 백양리 선영하에 모셨다가 정부의 배려로 1965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순국선열 황덕환 열사에게는 1963년 3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황열사의 호는 일초요, 일명 건(健)이라고도 한다.
.소재지:전남 영광군 영광읍 우산공원내
출처 : 靈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