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번 설공휴일날
오산리기도원 3일 동안 가장 먼저 해결할 영적인 문제는
사역자로서 '인내'할 것인지, 사역자로 '착각'한 것을 인정하고 평신도의 삶을 준비할 것인지...였습니다.
1987년 부산의 한대학교에 원서를 사러 갔다가 한 선교단체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고
1996년 이 선교단체를 나와
다음해 감리교 소속인 대전의 목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후 2년을 보낸 후 졸업하게 되었고
장로교 합동 총신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갈 생각에 앞서
선교단체 출신으로 기성교회를 알고 싶어
대학원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시간을 내어 여의도순복음교회 명성교회,
사랑의 교회, 다일교회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옥한흠목사님이 시무하시고 계시던 사랑의 교회에서 청년부, 고등부, 중보기도실,
치유상담모임, 목회자 대상 수련원 제자훈련사역 봉사 등 여러 모임에 참석해 기성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교회로 통하는
사랑의 교회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총신대대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제가 편입해 배운 신학과 내용과 비슷해
제 입장에서는 중간 시간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 특히 부산의 가족들의 눈치때문에 총신대대학원 시험을 2번 치루게 되었는데
마음이 가지 않은 시험은 오히려 합격하길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치루니 불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영어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기도)
그러다 이젠 시간이 흘렀고 또 2번 불합격한 것이 조금은 부끄러워
3번째 총신대 시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자신 없던 영어도 답이 아닌 것이 보여, 그러나 남은 것은 답)
그러나 등록금은 준비하지 못해
부산 가족의 도움은 더 이상 받을 수 없어(편입한 신학교 등록금도 부산 가족들이 도와줘서)
어쩔 수 없이 카드빚을 얻게 되었고
이런 중에 입학하자 마자 2년 휴학을 결정 후
일차적으로 카드빚을 갚고자 배도 타기도 하였는데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 오산리기도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기도원 사랑의 집 1층 로비에 있던 피시 컴퓨터를 통해 최일도목사님이 운영하시는 '다일교회'에서 운영하는 '밥퍼'와
무료다일병원을 알게 되어 이 다일공동체에 대한 궁금증과 ㄴㅅ인 사역에 대한 관심과 경험을 하고 싶어 무조건
서울 청량리 매춘지역으로 유명한 속칭 588 지역을 지나 다일병원에 찾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이곳에서 1년 2개월 정도 숙식하면서 봉사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영적인 약점인 음란의 문제에 매번 넘어지면서 영성의 한계를 느꼈고
다일병원의 수익저하로 더 이상 병원에서 숙식하며 봉사할 수 없게 되자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일병원측에서 제게 먼저 100만원을 예비 목회자로서 봉사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고
100만원은 매달 20만원씩 5개월 동안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저는 받은 100만원을 후원금 성격으로 내어놓았고
나머지 100만원도 받지 않겠다고 하였고
그 다음날 다시 오산리 기도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성교회를 경험하면서
저의 영적 약점이 '음란'임을 알게 되었고 이 음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어
기도원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자 작정하며
다시 몇번의 금식과 기도와 성경읽기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다 3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조용기 목사님이 당회장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오산리기도원도 은혜 중심에서 조금은 율법적으로 바뀌어 점점
기도원에 장기 상주하는 이들을 내보내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고
저도 2008년 여름 오산리 기도원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의 가족과 관계가 끊어진 후
서울로 나왔을 때 서울에도 제 몸을 의탁할 숙식할 장소가 없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근처 국회도서관에서 보내고 새벽 아침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경제활동은 하지 않고 무료급식소도 이용치 않는 제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솔직히 아직 밝힐 수 없는 다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예를 들면 겨울에는 여의도에서 새벽기도후 아침식사를 제공하던 서울역근처 삼일교회(당시 ㅈㅂㅇ목사가 시무하던)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였습니다.
이 방법이 가장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고상한(?) 방법이였고
나머지 방법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음식물에
이런 고통의 시간도, 제 입장에서는 사역자로서 깨끗한 내면을 갖는 시간이라 생각해 긍정적으로 보냈지만
7년을 지나고 8년차에 들어서서는 더 이상 이 생활의 반복은 의미가 없게 느껴졌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끊어지고 반발심마저 생겨 1년 동안 참 많은 생계형 절도범이 되어 몇군데 대형마트와 거리의 매점의 가판대에 있는
음식물(주로 컵라면)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