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伊於이)에서 분동한 풍산(豐山)마을에서 22년을 살았다.
이어리는 마을형상이 마치 잉어가 노니는 것 같다 하여 ‘잉어리’라고 부르다가 조선 태종 13년 ‘이어리’라 불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 마을의 등어리를 어영등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잉어의 등이 변해서 된 지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우리나라에 지방분권이 시작되고 이장이 군수가 되었고 현재에는 김포에서 국회의원을 하는 김두관국회의원의 마을로 기억 할 것이다.
우리남해 사람으로 장관에서 대통령정무특보를 지낸 사람의 마을이니 우리가 주목을 하는데 개인적인 경험을 한번 소개 해 볼까한다.
28살 남해로 내려왔다. 그리고 남편이 민방위훈련을 다녔는데 어느 해 민방위교육을 다녀와서,
“심아, 오늘 교육에 강사가 왔는데 그 사람 참 강의 잘 하더라.
민방위교육을 가서 강사가 강의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졸고 지겨운데 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졸지 않게 강의를 잘 하더라. 내용도 좋고 말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고... 그 사람 아마 큰 사람이 될 것 같더라.“
“그래? 간혹 그런 감동을 주는 명강사도 민방위강의를 하나보네...”
그러고는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가 지방분권이 시작되고 지방선거를 하던 해 군수후보사진이 벽보에 붙었는데 남편이 김두관 후보의 사진을 가리키며,
“심아,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 민방위교육 때 강사를 한 사람이다.
저 사람 찍어라 저 사람은 아마 크게 될 것이다.“
선거권이 주어지고 지방의 리더를 뽑는 선거에서 후보자와 악수도 안 해 보고 직접 얼굴도 한 번 안 보고 후보자를 선택한 예로서 유일무이한 사람이 김두관후보가 아닐가 싶다.
그런데 정말 남편 말처럼 남해군수로 끝나지 않고 큰 사람이 되었다.
별로 책도 안 읽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 남편이
별로 애교도 없고 재미는 없지만 나처럼 근면 성실한 여자를 선택한 것을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다. 이 표현은 좀 민망스럽지만 늘 부족한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독자를 위해서 서재심이 던지는 유머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이어리에서는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이 많다.
경남 기업경제 성장구조 분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문정으로 시작하여, 김영명공학박사, 김대황이학박사, 김선봉농학박사 김기영체육학박사 그리고 김야물 효행상, 정귀엽 고부상...
남치마을에서 잠깐 풍수를 언급 한 적이 있는데 이어마을도 인물을 많이 내는 자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설천에 살 때 간혹 읍내 왔다가 지금의 풍산마을을 지나가다보면 아파트를 짓고 마을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느낌에 그곳이 참 아늑해 보이고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무조건 그곳에 분양을 받고 집을 샀다. 그곳에 분양을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은 그곳의 뒷산에 공동묘지가 있다며 염려를 했다.
하지만 “풍수학적으로 음택으로 좋은 자리는 양택도 복 된 땅이지...‘
하는 생각과 순간적인 느낌을 무시하지 않는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 곳에 집을 장만하여 22년을 살았다.
아이들도 공부를 잘 했고, 경제적인 기반도 잡았고 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살았던 마을이다. 원래는 ‘이어리’에 속하다가 분동이 되었고 풍성할 풍이란 말처럼 참 풍성하게 살게 해 준 마을이다.
지금도 풍산마을에는 처음 이사를 온 사람들이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편안하고 큰 시련을 주지 않는 ‘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어어마을 바닷가에 가서 보면 풍산마을로 중심 룡이 내려오고 오른쪽 팔인 백호는 심천마을 바닷가까지 가면서 풍산마을을 감싸고 있고 왼쪽 팔 격인 이어마을도 풍산마을을 잘 감아 돌고 있다.
그리고 뒷산은 약간 기울기는 했지만 나락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이다.
집주변이나 산소주변에 그런 노적봉이 가까이 있으면 인근에 사는 사람이나 그 후손들이 부자로 산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풍산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가 되어 떠나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인걸지령(人傑地)이라! 땅이 좋은 곳에서 인물이 난다고 하니 이어리 뿐만 아니라 이어리 땅이 좋아서 곳곳에서 자기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 또 풍산마을의 땅이 좋아 재력을 쌓는 가정들이 많은 것 같으니 이어마을과 풍산마을은 복 된 마을로 기억 될 것 같다.
그러나 옛말에 ‘관상이 수상만 못 하고 수상이 심상만 못 하다’라는 말도 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땅이 좋아도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사람이
‘권모술수’를 쓴 다면 땅의 이로운 기운을 받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땅이 아무리 나빠도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사람이 ‘근면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남을 이롭게 할 생각을 한다면 하늘이 감동하여
행운을 주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참고로 나는 이어마을에서 분동한 풍산마을로 이사하여 든든한 아들도 얻고 22년을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