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鄭蘊) : 1569~1641.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ㆍ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식(曺植)의 학맥을 잇고 정인홍(鄭仁弘)을 사사하였다.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닦고 제주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제주오현(濟州五賢) 중의 하나로 추앙받았다. 인조반정 때 풀려나 사간ㆍ대사간ㆍ대제학ㆍ이조 참판 등 주로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의 장악을 공격하였다. 병자호란 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다. 이후 모든 관직을 버리고 경남 거창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 5년 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주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계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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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고등학교(五賢高等學校)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주동로(화북1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시대 현대
성격 고등학교, 사립고등학교
설립시기 1946년 2월
설립자 황순하(黃舜河)
1946년 2월 황순하(黃舜河)가 교육입국의 창학정신 아래 제주제일중학교로 설립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광복을 맞아 새로 건국되는 나라에 선현(先賢)의 뜻을 받들어 멸사봉공의 헌신으로 기여하자는 뜻에서 교명을 오현초급중학교로 개칭하였다.
1947년 6월에 중등과정을 이수하고 입학하였던 제1회 졸업생 39명을 배출하였으며, 1951년 9월 학제변경에 따라 오현중학교와 오현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1953년 3월에 고등학교 개편 이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7년 3월 현재 27학급에 재학생 1,286명, 교원 67명이며 졸업생은 45회에 총 1만7028명을 배출하였다.
학교명칭 ‘오현’은 제주시 오현단에 봉안된 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정온(鄭蘊)·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 등 5명의 선생을 봉향한 오현단(五賢壇)에서 비롯되었다. 이 분들이 굽힘 없는 지조로 나라에 헌신한 뜻을 본받아 멸사봉공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는 건학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목표는 ‘발랄한 창의력을 지닌 생활인의 육성, 풍부한 인간성을 지닌 사회인의 육성, 역사적 사명감을 지닌 봉사인의 육성’으로 되어 있으며, ‘학행일치(學行一致)’의 교훈 아래 건학정신의 구현에 힘쓰고 있다. 개교 이래 해마다 오현제를 개최하여 미전·음악제·시화전·연극제·방송제 등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밴드부는 1953년 제4회 개천예술제에서 전 부문 특상을 차지한 이래 16연승의 기록을 세웠으며, 1976년 제1회 KBS배쟁탈 전국관현악경연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였다. 축구부는 1963년 우리 나라 고교팀으로는 최초로 일본에 원정하여 통산 5전4승1패의 성적을 올렸고, 1996년 백록기쟁탈 전국고교축구대회에서 4강에 입상하기도 했다.
젊은 지성과 정서의 산물인 교지 『현악(賢岳)』을 발간하고 있다. 졸업생 모임인 오현고 총동창회는 월간 소식지 『현우(賢友)』를 발간하고 있으며, 선후배의 우위를 더욱 돈독키 위해 매년 ‘오현의 날’을 정하여 선후배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참고문헌
•오현사반세기 (오현고등학교, 1976)
집필 (1995년)황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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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五賢檀)
유교문화재 | 유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제단. 시도기념물.
분야유교유형문화재, 유적시대조선지정기관제주특별자치도지정부류시도기념물지정번호제1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제단.시도기념물.
키워드
김정
김상헌
정온
송시열
송인수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호.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橘林書院)이 훼철된 후, 1892년(고종 29)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祭壇)이다.
역사적 변천
귤림서원은 1578년(선조 11) 조인후(趙仁後) 판관이 1521년(중종 16) 10월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에 충암사(沖庵祠)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5년(현종 6) 최진남(崔鎭南) 판관이 충암사를 이곳으로 옮겨 사(祠)라 하고, 이미 1659년(효종 10) 제주 김진용(金晉鎔)의 건의에 의해 이회(李禬) 목사가 이곳에 세운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오현은 김정을 비롯하여, 1601년(선조 34) 소덕유(蘇德裕)·길운절(吉雲節) 역모 사건 때에 안무어사(安撫御史)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669년에 배향], 대정현에 유배되었던 동계(桐溪) 정온[鄭蘊: 1669년에 배향]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95년에 배향], 제주목사를 역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682년에 배향]를 말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유적 내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의 마애명과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 등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제주시의 옛 터 (제주시·제주대학교박물관, 1996)
집필 (1998년)김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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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림서원(橘林書院)
교육유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조선전기 김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조선전기 김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내용1576년(선조 9)에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정(金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충암묘(冲菴廟)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6년에 판관 최남진(崔南鎭)이 제주시 이도동으로 이건하였으며, 1683년에 정온(鄭蘊)·김상헌(金尙憲)·이약동(李約東), 1678년에 송인수(宋麟壽)를 추가배향하였고, 1682년(숙종 8)에 ‘귤림’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이회(李檜)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1892년에 지방유림이 오현단(五賢壇)과 단비(壇碑)를 쌓아 매년 향사를 지내오다가, 1910년부터 중단되었다. 오현(五賢)은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이며, 현재 오현단은 제주도 기념물 제1호(1971.08.26.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