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https://essac.tistory.com/78
일본의 농부이자 시인인 야마오 산세이는 “힘들 때는 민들레를 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가 어떤 책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쉽게 수긍이 가는 말이다. 봄이 되면 산에 들에는 말할 것도 없이 도시에도, 민들레는 피어난다. 도시의 가로수 밑이나 공터, 심지어는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조차 민들레는 생명의 뿌리를 내린다. 민들레에게 생명의 거처는 도처에 널려 있다.
나무들은 겨울이 오면 나뭇잎을 떨어뜨려내고 거기에 떨겨를 만든다. 떨겨는 겨울 동안 나무 몸 안의 물과 양분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외부의 병충해가 유입되는 것을 막는 전략의 산물이다. 그렇게 겨울나무는 안으로 안으로 여물어 간다. 긴긴 겨울이 지나면 나무는 이제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얻기 위해 나뭇잎의 새순을 쑤욱 세상에 내어 놓는다. 그렇게 하나 둘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봄기지개를 켤 때쯤, 민들레도 피어난다. 산과 들은 물론 도시의 거리를 생명의 거처 삼아 노오란 꽃잎을 피어낸다.
모든 식물들이 겨울을 이겨내고 찬란한 봄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경이를 느끼곤 한다. 하지만 민들레가 한없이 낮은 곳에서 어느 날 불쑥 노오란 꽃잎을 여기저기 밀어올려 놓은 것을 보면 울컥 서러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서러움은 이내 아름다움에게 감정의 자리를 내놓는다. 아름다움은 다시 희망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서러움과 아름다움과 희망의 감정이 서로 치환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피고 지는 생명의 리듬에서 그런 정체 모를 서러움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 서러움이 아름다움과 희망과 연결되는 것도 기이하다. 그런 기이함이 삶의 진실이 아닐까. 어쨌건 무수한 봄을 맞이하면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나에게 일종의 봄의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봄의 결실을 수확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동화 『강아지똥』덕분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읽은 동화 『강아지똥』은 길거리의 강아지 똥조차도 그저 더럽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데 함께 참여하는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한없이 작고 여린 꽃 하나를 피우는 데는 그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의 사랑 가득한 연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민들레뿐이랴.“힘들 때면 민들레를 보라”고 한 야마오 산세이의 속내도 나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문학 세계를 다시 되짚어 보는 ‘권정생 문학기행’ 소식이 들려왔던 지난 해 12월, 나는 자연스럽게 봄을 떠올렸고, 민들레를 떠올렸고, 『강아지똥』을 떠올렸다. 야마오 산세이의 말도 뒤따라 내 머릿속을 채웠다. 오래 전부터 권정생 선생님의 삶의 터전이자 작품의 배경이며 집필 공간이었던 안동 조탑리를 가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막연한 생각에 그치곤 했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안동 조탑리를 가보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부지불식간에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생겼던 듯하다. 그럼에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나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던 차에 들은 ‘문학기행’ 소식이었다. ‘민들레가 노란 꽃잎을 내미는 봄이라면 권정생 문학기행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투정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대구와 인근 등지에서 참여한 스무명 남짓 문학기행 참가자들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권정생 문학기행’은 대구의 복합문화공간 ‘물레책방’이 주관하는 ‘북콘서트 - 권정생 톺아보기’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권정생 선생님 관련 책을 발표한 여섯 명의 작가와 그에 어울리는 인디음악 가수 여섯 명을 매칭해 콘서트가 진행됐고, 북콘서트 전체를 갈무리하는 행사로 ‘권정생 문학기행’이 배치되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생전에 살았던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일대, 2014년 8월에 개관한 ‘권정생 동화나라’, 『몽실언니』의 주요배경이 되었던 운산장터와 운산역이 문학기행의 코스로 예정돼 있었다.
대구에서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로 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문학기행 참가자 일행을 태운 버스가 남안동 IC를 빠져나왔는가 싶더니 왕복 2차선 도로를 조금 더 달리니, 건물 상단 중앙부에 ‘일직예배당’이라 음각돼 있는 게 눈에 띄는 일직교회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교회를 돌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만들어진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민들레꽃이 모닥모닥 / 산모퉁이 길로 / 바삐바삐 걸어가는 / 아주머니를 보고 있네 // 함지박에 고추 모종을 수북이 담고 / 엉덩이 삐딱삐딱 걷는 아주머니 // 민들레꽃은 / 보다가 보다가 / 방실방실 웃네 / 노랗게 방실방실 웃네” (시 「민들레꽃」)
1983년 동네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빌뱅이 언덕 아래 처음 자신만의 집을 지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권정생 선생님은 아마도 아래 도로에서 빌뱅이 언덕 앞 집까지 이어진 돌담길 길섶에 얼굴을 내민 민들레꽃을 감상하고, 돌담길을 지나다니는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 「민들레꽃」을 지었을테고, 『강아지똥』의 모티브도 얻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돌담길은 그림책 『강아지똥』의 돌담길과 닮아 보였다. 그림을 그린 정승각 선생님이 이 돌담길을 참조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돌담길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내 개울이 보이더니 언덕배기 앞 작은 집이 나왔다. 권 선생님이 1983년 마흔 여섯 살부터 돌아가셨던 2007년 일흔 살까지 사셨던 집이다. 누구는 일곱 평이라 하고 누구는 다섯 평이라 하는, 부엌 한 칸 방 한 칸 집에서 선생님은 홀로 살면서 동화를 쓰고 글을 썼다. 기행단 사람들은 집 앞 마당에 서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자물쇠 채워진 단칸 방 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방 안은 생전에 책들로 가득 찼던 모습과 달랐다. 기행단을 이끈 물레책방 장우석 대표의 설명이 이어졌다. 방 안 책들은 다른 유품들과 함께 권정생 동화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벽쪽 작은 탁자 위에 영정 사진,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 갖다놓은 생기 잃은 국화 몇 송이. 흙으로 벽을 두르고 거기에 다시 함석판을 덧댄 집의 단칸방 안 풍경은, 주인을 잃어서인지 초겨울 날씨 탓인지, 생기가 없어 보였다. 영정 사진 속 권 선생님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앞마당에 서있는 앵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도 모두 이파리를 떨궈 더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과 말동무가 돼주던 강아지들이 살던 집도 주인을 잃은 건 마찬가지여서인지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앞마당 한 모퉁이에는 두세 평 될까 싶은 땅 위에 줄이 둘러쳐져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살피던 한 아이가 작은 팻말을 찾아내 읽었다. “권정생 선생님께서 가꾸던
부추밭입니다. 밟지 말아 주세요. 제발.” 선생님 생전에 부추를 가꾸던 곳이었나 보다. 줄 위에는 노란 리본들이 묶여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인가. 우리는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문학 속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기행단 사람들은 집 주위를 둘러보면서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작은 것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생명을 사랑하는 선생님을 늘 흠모하다 인연이 맞아 기행에 참여하게 됐다”는 성희경 씨는 권 선생님이 만들어 놓았다는 새집을 발견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 작은 새집 안에 새가 앉을 수 있도록 발판도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그 시선을 잊지 않고 싶다”고 했다.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한 그는 “선생님의 삶과 문학이 시를 쓰는 모티브가 되어준다”고 귀띔해 주었다. 평소 물레책방의 허드렛일 돕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이번 문학기행에도 스태프로 참여한 박장순 씨는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는 물질만능의 세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문학기행을 주관한 물레책방 장우석 대표는 “‘단순한 동화작가 권정생’ 너머에 있는 선생님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이해해 보기”를 주문했다.
기행단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권정생 선생님이 종지기로 있었던 일직교회에 이르렀다. 물레책방 장우석 대표의 말로는 지금의 교회는 한 번 옮겨와 선생님이 실제 종지기로 있던 교회 자리는 아니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정생은 1937년 도쿄의 한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 미군의 공습으로 집이 불타 없어지면서 처음 전쟁을 경험했다. 그리고 두 번의 이사와 귀국. 아홉 살 정생은 어머니 큰누나 동생과 함께 청송 외할머니댁으로 갔다.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안동으로 거처를 잡았다. 열 살 때는 온 가족이 안동에 모여 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다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정생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닭을 키워 중학교 학비를 마련하려고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정성을 다해 키우던 닭들이 돌림병으로 한꺼번에 죽어 버렸다. 그 길로 정생은 집을 떠나 이곳저곳에서 가게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정생의 나이 열여섯이 되던 해였다. 그러다 열여덟 살에 부산으로 가 점원생활을 하다 열아홉 되던 해에 평생 그를 괴롭히게 될 결핵에 걸렸다. 스무 살에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늑막염에 폐결핵이 겹친 데다 얼마 있지 않아 신장결핵과 방광결핵까지 얻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됐고 스물일곱 되던 해 어머님이 돌아가신다. 그 이듬해 대구와 경북 등지를 다니며 거지생활을 하게 됐다. 그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신다. 서른 살 되던 해에는 남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살고 있던 집을 비워줘야 할 처지가 된다. 그 이듬해 서른 한 살, 그러니까 1968년에 정생은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게 된다. 1983년 마흔 여섯 살 빌뱅이 언덕 아래 집을 지어 거기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십 몇 년을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았던 것이다.
원래 자리에서 옮겨온 일직교회 한켠에 종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든지 와서 종을 칠 수 있도록 했다. 아이 한 명이 종을 쳤다. 작은 소리가 울렸다.
“겨울의 새벽하늘은 참 아름답다. 종을 치면서 나는 줄곧 이 아름다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성에가 끼고 꼬장꼬장 얼어 버린 종 줄을 잡은 손이 무척 시리지만, 나는 장갑을 끼지 않는다.(중략)그만큼 한 번 한 번 종 줄을 잡아당기는 데 정성이 가기 마련이다.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울려 더없이 성스럽게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순간이다.”(「새벽종을 치면서」, 『빌뱅이 언덕』)
혹독한 추위에도 새벽에 일어나 맨손으로 종을 치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 스스로 묘사해 놓은 종 치는 풍경은 그 자체로서 한편의 성화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풍경의 묘사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 글의 뒤쪽에 이어진 선생님의 바람이었다. 이어서 옮겨 본다.
“그러나 정작 종을 치는 나는 이런 것과는 다른 무엇을 염원한다. 그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황당한 염원인지는 모르지만, 새벽하늘에 반짝이는 별의 수만큼 나의 바람은 한없이 많다. 종 줄을 한 번 잡아당기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리듯 쏟아지는 나의 바람들. 불치병을 가진 아랫마을 그 애의 건강을, 이 새벽에도 혼자 외롭게 주무시는 핏골산 밑 할머니의 앞날을.(중략) 다시는 헤어짐도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가 오기를... ....” 당신 역시 전쟁과 가난과 질병으로 힘들고 외로운 삶을 평생 살았으면서도 기도는 항상 더 외롭고 더 아프고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전쟁도 없고 억압도 없고 착취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유년 시절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 권정생 선생님의 삶은 헤어짐과 외로움과 고통으로 점철됐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헤어져서 울고 외로워서 울고 아파서 울고. 울고 울고 울었다. 하지만 눈물은 선생님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간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의 것이었다. 원하지 않는 전쟁과 원하지 않는 이별과 그것이 초래한 질병과 외로움과 가난. 눈물의 사람이었다. 눈물이 사람을 만들었고, 삶은 눈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보라. 그 눈물 속에서도 얼마나 성스러울 수 있는지. 그래서 권정생 선생님은 눈물의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것이 눈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맑은 영혼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 작은 것과 여린 것에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선생님은 말한다. “작은 꽃다지가 노랗게 피어있는 곳에도 나비가 날아든다. 작은 세상은 작은 대로 아름답다”고. 작다고 해서 여리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핍박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교회는 그들을 위한 공간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 나선 사람의 이름이다. 선생님에게 사상과 삶의 거처가 교회인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작은 것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황금을 숭배하는 교회를 경계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예의 나지막한 어조는 잠시 뒤로 밀쳐 두고 크게 목소리를 낸다.
“아니, 아니, 교회는 없어져도 좋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나 교회입니다. 동족끼리, 인간끼리 무기를 맞대고 싸우는 전쟁터에 아무리 거대한 교회당을 지어 놓고 수만 명이 모여도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황량한 들판이든, 강가이든, 산 위이든, 싸움이 없는 곳이, 무기가 없는 곳이, 권력이 없는 곳이, 황금이 없는 곳이, 억압이 없고 공갈이 없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김 목사님께」,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기행단은 일직교회를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인 ‘권정생 동화나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권정생 동화나라’는 2014년 8월 일직남부초등학교가 폐교한 자리에 들어섰다. 3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는 전언에, 의아한 생각을 품고 ‘권정생 동화나라’에 도착했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깔끔하게 정비가 돼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존 학교 건물의 리모델링이라는 한계 탓인지는 몰라도, 일단 운동장에서 건물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가파르고 긴 계단을 통해야만 했다. 이미 지역언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은 부분이었다. 어린이나 장애인의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은 시설이라는 지적이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참가자들은 건물 입구에 마련해 놓은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 속 주인공 형상을 본떠 만든 조형물을 좋아했다. 강아지똥과 민들레, 엄마 까투리와 새끼 까투리, 몽실언니 조형물 등을 보며 가족들은 아이들과 동화 속 주인공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가족과 함께 기행에 참여한 박선배 씨는 “아이들과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서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이것이 권정생 콘텐츠의 가능성이 아닐까.
사람마다 권정생 문학의 세계로 들어오는 경로는 다르겠지만 어쨌건 나는 『강아지똥』을 통해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내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읽고 책장에 꽂아 둔 『강아지똥』은 올해 아홉 살인 첫째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함께 읽는 책이 되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둘째 아이도 『강아지똥』을 좋아라 한다. 세대를 넘나들면서 사랑받는 책이 그리 흔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아지똥』은 우리 문학의 큰 성과라 할 만하다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나의 발걸음도 강아지똥 조형물 앞에서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강아지똥』은 쉽고 단순하지만 생명의 본질을 꿰뚫는 투명한 통찰이 담긴 동화다. 거기에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서사는 많은 사람들을 권정생 문학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물론 『강아지똥』만이 권정생 문학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일한 매개가 됐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강아지똥』이 권정생 문학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권정생 문학에 담긴 사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로는, 권정생 선생 사후 5주기를 맞이해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선생의 산문을 엮은 『빌뱅이 언덕』이나 ‘녹색평론사’에서 펴낸 『우리들의 하느님』같은 산문들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몽실 언니』나 『한티재 하늘』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강아지똥』은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전 세대에 걸쳐 고루 읽히고 있다는 점에서, 권정생 문학의 대표작의 반열에 올려놔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권정생 동화나라’는 2층 건물이었다. 1층에는 선생님의 유품을 모아놓은 전시실과 선생님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도서관, 체험관, 구연연구소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2층에는 올라가보지 않았지만, 회의실과 작가들의 창작 공간과 숙소 등으로 이용되는 곳이라고 했다. 아직까지는 콘텐츠가 그리 풍부해 보이지 않았고, 예산 부족으로 운영 인원이 부족해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기행단 박선배 씨는 “예산을 건설 시공쪽에 과도하게 배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오리려 운영비와 콘테츠 개발 쪽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쓴소리를 던졌다. 어차피 운영하는 시설이니 좀 더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이 잘 전달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쪽으로 힘을 쏟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뒤로 하고 기행단은 다음 행선지인 운산장터와 운산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운산장터는 마침 아스팔트 공사 중이어서 그냥 스쳐 지나갔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이기도 하거니와 선생님의 소년소설『몽실언니』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운산장터에서 운산역까지 걸어가는 것이 문학기행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운산역으로 가기 전, 해설사 권경옥씨는 권정생 선생님이 동생의 결혼으로 집을 떠나야만 했던 그 순간을 끄집어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의 아버님께서 정생아, 너가 바람을 좀 쐬고 오너라, 고 하셔서 선생님이 새벽에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집을 나서서 여기 운산역에 왔는데 그때가 4월이었어요. 선생님 글에서 보면 ‘4월의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기차 대합실에 가있으니 그때서야 날이 밝았다’라는 부분이 있어요. 동생 장가가는 걸 축하해주지도 못하고 그걸 피해서 조용히 사라져주어야 되는 심정이 어땠겠어요? 행여나 남들이 볼까봐 남들의 눈을 피해 이른 새벽에 도망치듯 자기 집을 빠져나와야 하는 심정. 그 심정을 한 번 떠올려 보면서 걸으면 좋을 것 같아요. 또 몽실엄마 밀양댁이 돈 벌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 몰래 어린 딸을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도망쳐 나올 때도 여기에서 운산역까지 걸었어요. 몽실이 손을 잡고서요.”
장터에서 십여 분 정도 걸었을까. 간이역 하나가 나왔다. 운산역이었다. 초행의 나에게 그 역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간이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권정생 선생님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에게 운산역은 떠남과 헤어짐과 만남이 이뤄지는 관문이었다. 정든 집을 떠날 때도 운산역을 찾았고, 병들어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운산역을 거쳐야 했다. 운산역은 지금이야 사람들을 태운 열차는 거의 서지 않고 화물열차만 주로 이용하는 중앙선의 한 간이역이지만, 권정생 선생님에게 있어 운산역은 만남과 이별을 알리는 메타포이기도 했던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은 서른한 살 되던 해인 1969년 일직교회로 거처를 옮겨 교회 종지기 생활을 하면서 그해 쓴 「강아지똥」으로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어 1971년에는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가 가작으로 입선됐고, 1973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동화를 쓰지 시작했다. 1974년에는 첫 단편동화집 『강아지똥』을 펴냈다. 이후 마흔 여 편에 이르는 동화책과 산문을 썼다.
선생님의 글들은 하나같이 가장 낮은 곳에서 여린 것과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의 문학은 그대로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동화는 어릴 때 있었던 이야기나 주위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꾸밈도 없이 단순하다. 단순한 것은 엉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통찰에 가닿아 있다고 보면 된다. 그의 문학작품은 그래서 우리 삶의 진실을 통찰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오늘 우리가 그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진실일 것이다. 문학기행단에 참여한 사람들도, 아이들도 삶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간 하루였기를 바라며 나도 대구로 발길을 돌렸다.
권정생 선생의 삶의 발자취와 작품
1937년 일본 도쿄 혼마치 빈민가에서 5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남. 아버지가 주 워온 동화책과 그림책을 보며 혼자 글을 익힘.
1944년(7세) 소학교 입학. 미군 공습으로 집이 불타 없어짐. 군마현의 쓰마고이로 이사.
1945년(8세) 해방. 후지오카로 이사.
1946년(9세) 가족들과 함께 귀국. 어머니 큰누나 동생과 함께 청송 외가에서 자람.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안동으로 감.
1947년(10세) 가족들이 안동에 모여 지냄. 아버지는 소작 농사, 어머니는 행상을 함.
1950년(13세) 한국전쟁으로 다시 흩어졌다가 다시 안동으로 돌아옴.
1953년(16세)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 중학교 진학 못함. 중학교 학비 마련을 위해 닭을 키웠지만 폐사.
집을 떠나 여러 가게에서 점원
1955년(18세)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 명자, 기훈 등의 친구를 사귐.
명자는 윤락가로 흘러들었고 기훈은 자살. 정신적 충격
1956년(19세) 결핵을 앓기 시작. 늑막염에 폐결핵이 겹침
1957년(20세) 안동으로 돌아옴. 신장결핵 방광결핵 으로 병세 악화
1964년(27세) 어머니 별세
1965년(28세) 집을 나와 대구 김천 상주 점촌 문경 예천을 떠돌아 다니며 거지생활.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옴. 아버지 별세
1966년(29세) 두 번에 걸쳐 한 쪽 콩팥과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
1967년(30세) 남동생 결혼. 살던 집을 비워야 할 처지
1968년(31세) 조탑리 일직교회 문간방으로 거처를 옮겨 종지기 생활을 시작함.
이곳에서 병마와 싸우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
1969년(32세) 강아지똥으로 기독교 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수상
1971년(34세)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가 가작으로 입선
1973년(36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
1974년(37세) 첫 단편동화집 『강아지똥』 펴냄
1983년(46세) 빌뱅이 언덕에 집을 지음
1984년(47세) 장편 소년소설 『몽실언니』
1986년(49세) 글모음집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출간
1988년(51세)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출간
1990년(53세) 장편 소년소설 『몽실언니』가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
1995년(58세)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로 제22회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 거절.
1996년(59세) 그림책『강아지똥』,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2003년(66세) MBC TV ‘느낌표’에서 『우리들의 하느님』을 선정하려 하자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혼자 책을 고르는 순간인데, 그걸 왜 방송에서 막느냐”며 선정 거부
2005년(68세)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첫 유언장 씀.
2007년(70세) 3월 31일, 10억 원에 이르는 인세 수입 등을 굶주리는 북한 아이를 위해 써달라는 내용을 담은 두 번째 유언장 씀.
5월 17일, 세상을 떠남
* 위 삶의 발자취와 작품 소개는 『강아지똥별』(김택근, 추수밭, 2014년)을 약간 수정하여 옮긴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