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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여신도회 2020년도 주제강연 원고>
“화해의 성령이여 하나되게 하소서”
(요엘 2:28-32 고후 5:18-19 요한 17:22-29)
여신도회전국연합회는 1929년에 조직되어 ‘생명, 정의, 평화’를 가치로 삼고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동참해 왔습니다. 교회여신도들을 교육하고, 여교역자들과 선교협력을 통해 여성지도력을 고양하고, 해외 기독여성들과의 연대, 나아가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회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인권과 생태계 보전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제 100주년을 향해 나아가는 2020년을 맞이하여 ‘화해의 성령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 가는 우리 기장 여신도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화해를 이야기 하는가?
정의와 평화가 깨어진 세상. 갈등과 분쟁 상황에서 가장 먼저 상처받는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린이, 여성, 노인, 이방인 등 그 사회의 비주류들인 소수자들입니다. 이 땅에는 오늘도 상처 입은 생명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GDP(국내총생산) 33,434달러인 세계 7위국가로 3050클럽-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5천만명이상 나라-의 선진국입니다. (한국은행, IMF 2018년 최종확정판 기준)
그러나 올해 1년 사이 비정규직은 87만명이 급증해 700만명을 돌파했고, 15년만에 정규직은 감소했습니다.(2018. 통계청 자료).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룬 드라마 ‘미생’이 떠오릅니다. 단지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땅 곳곳에는 미생(미완결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생명. 정의. 평화’를 이야기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고 하시며 우리들이 미생(미완결 생명)이 아닌 풍생(풍성한 생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화해를 말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와 공동체 안에 갈등과 분열이 많다는 반증입니다. 거대담론인 화해는 결코 혼자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분쟁 당사자들이 있습니다. 화해는 법적용어로 ‘재판 과정 중 당사자끼리 합의가 되어 재판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해계약은 민법상 쌍무계약이며 유상계약에 속합니다. 유상계약이란 계약당사자 쌍방이 서로 대가를 가지는 출연(대금이나 차임)을 하는 계약입니다. 화해는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화해가 되면 화해 이전의 법률관계는 소멸되고 화해의 내용에 따라 새로운 법률관계가 발생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화해는 쌍무계약이며 유상계약이기에 값을 치룰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금전 등으로 치룰 수 없으면 구속수감되어 몸으로라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때문에 대가를 치룰 무엇인가가 없는 사람들은 화해마저도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화해를 선물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은혜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와 선의의 관계로 대체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화해의 선포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해야 할 봉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의 사신이 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 (고후 5:20)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화해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해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화해의 사신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해체시키고 온전한 회복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1. 자신과의 화해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발견
화해는 라틴어 ‘conciliat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함께 오다’ ‘같이 모이다’라는 뜻이다. 화해를 위해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넘어서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폐증입니다. 자기안의 갇혀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도 못하고 자연과 교감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를 잊고 삽니다. 그저 알아주고 인정받음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면 다시 허전해지고 공허해 집니다. 재산의 축적, 가문의 번성함으로 세상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 같은 사람도, 혼자 서 보면 자신은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의 야곱이 떠오릅니다. 세상 것들을 움켜쥐고 쟁취하며 살아왔던 야곱이 가족과 재산을 내어놓고 나누며 형과의 화해를 도모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환도뼈를 다쳐 절뚝거리게 되면서 비로소 자기만의 공간(자폐증)에서 벗어납니다. 야곱은 빠르고 영민하게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는 공허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었는데, 화해를 위해 자기 것들을 내려놓고 나누며, 절뚝거리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시작했을 때, 희망의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절뚝거림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야곱은 절뚝거리게 되면서 미생의 삶을 다시 정의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알고 참된 자아를 찾으려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 가운데서 나의 욕망과 거짓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본래의 나’를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잘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성과를 내었느냐? 내가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느냐?를 묻기 이전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나’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최종관심은 바로 ‘나’ 자체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게 되면 오직 감사로 그 분과 함께 기쁨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세상과의 화해 –관계의 회복
김승섭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을 통해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습니다. 그는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기에 건강도 정의의 문제라고 합니다. 16세기 영국의 헨리 8세는 사형당한 죄수의 몸을 해부학자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이후 의과대학이 급증하면서 18세기에는 시체거래가 활성화되고 사체절도범까지 생겨났습니다. 해부학자에게 넘겨진 시체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가난한 사람의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의 몸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 여러 오점이 남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주로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혈중 코르티솔을 높아지고 심장병, 고혈압, 당뇨 같은 만성병 발생이 증가하고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집니다. 드물게 고소득 계층 사람의 몸을 해부하게 되면서 ‘비정상적으로’ 부신이 작은 것을 발견하고는 부신조직이 축소되는 질병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부유한 사람의 부신크기가 인체의 정상적인 부신 크기였습니다. 그동안 해부용으로 사용된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에서 발견된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컸던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불평등이 기록된 몸이요, 차별이 투영된 몸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사회 속에서는 우리의 인식마저 혼미해집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되면 엄청난 장미빛 꿈이 이루어 질 알았습니다. 그러나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상대적 빈곤 속에서 늘 허덕이며 삽니다. 편견과 차별, 미움과 갈등, 폭력과 전쟁, 불평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삽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갈등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 된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임하셨습니다.(incarnation)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화해의 사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화해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민감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화해사건을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데일 카네기의 고백이 와 닿습니다. ‘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순간이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결단의 때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화해를 이루는 성령의 은총으로
요엘서 2장에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면서 또한 구원의 날입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 ‘주님의 날’이 다가왔음을 이야기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여호와의 날. 주님의 날은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지만, 선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요, 억울하게 핍박받던 자들에게는 위로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 앞에서 회개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회개하는 이들에게 부어집니다. 회개는 ‘메타노니아’로 그 의미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라’는 윤리적인 뜻이 있습니다. 본래의 어원은 ‘되돌아서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에 서의 ‘방향전환’, ‘관점의 전환’을 뜻합니다. 회개는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린 사람들의 진행형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의 심정(눅15:17-21)입니다.
요엘서 2장 28-32절에는 경계를 넘어 하나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른과 아이. 노인과 젊은이. 종. 남자와 여자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 세계를 꿈꾸는 데는 차별이 없어집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혁명적인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경계를 넘어 차별을 철폐하고 분리된 것들을 하나되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온 땅에 선포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남겨둔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세상이 하나되도록 기도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2)
창세전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에, 연합한 관계 속에 있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기도하십니다.
1.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사랑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나됨에는 방향과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요17:19) 하나님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어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내가 그들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2. 하나됨은 다양성에 대한 인정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은 상대방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나와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편견은 차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됨의 방식은 자기가 없어지고 완전히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색깔과 소리를 내며 그 상태로 서로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나의 고유한 개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성령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경계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선을 지켜주면서 경계를 넘나드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은 고정되지 않고 유연합니다.
3. 하나됨은 약자의 아픔에 대한 감수성을 갖는 일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에는 한 인권강사가 장애인단체에서 강의하던 중에 ‘결정장애’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 지적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장애인들은 아무런 느낌없이 사용하지만 장애인들은 그런 단어에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 가운데는 이미 무시하고 차별하고 언어가 많습니다. 갑들은 ‘웃자고 하는 말인데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갑들이 하는 웃자고 하는 말은 을들에게는 전혀 웃기지 않습니다. 단지 분위기를 깰까 봐 인내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익숙한 생각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약자를 희화화하는 말들은 갑에게는 우스운 농담이 되지만 을에게는 수치심이 됩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해 질 때, 비로소 하나됨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4. 하나됨은 강한 자가 먼저 자기 것을 내려놓는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권자의 정치권력은 개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며 국민의 모든 영역에 통제를 가하려고 합니다. C.J. 프리드리히는 공적 이데올로기, 비밀경찰. 메스미디어의 독점. 무기의 독점. 관료주의적인 획일화 등을 산업사회의 특징과 결부된 전체주의적 독재라고 했습니다. (「Totali tarian Dictatorship and Autocracy」)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개개인의 생각이나 주장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보다는 소수의 리더집단이 세운 원칙과 방향에 그저 따라오기만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강한 집단에 약한 자들이 흡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시혜를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고 합니다. 쏟아지는 비를 막을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 됨은 약한 자들의 자리에 내려가서 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몸소 실천하셨고(성육신 사건),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이미’ 맛보고 경험한 그 나라, 그러나 ‘아직’ 온전히 임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도 함께 그 길 위에 섭니다.
2020년, 화해의 성령안에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우리 기장교회가 실천해야 할 주요 과제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 의 충만함을 받고, 언어가 소통되고 유무상통하며 하나가 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행2:4)
화해와 하나됨! 결코 생각이나 말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연약함 넘어 오직 성령의 능력에 힘입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온 기장교회가 기도하며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독립문교회 김성희목사
(*위 글은 2020년도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부장임원교육 주제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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