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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0호
진천 금성대군 사당 (鎭川 錦城大君 祠堂)
진천 금성대군 사당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수의1길 75-7 (용기리)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이재영
· 상 세 문 의 : 충청북도 진천군 문화홍보체육과 043-539-3624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1426∼145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이름은 유(瑜)이고, 1433년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자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사당은 영조 16년(1740)에 세운 것이고 1974년에 보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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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정보
문화재자료10호 진천 금성대군 사당 (1990-12-14 지정)
조사연구 자료명
금성대군 사우(錦城大君 祠宇)
발행기관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역상세
충북
분류명
문화재자료10호
이미지
문화재자료10호 진천 금성대군 사당 (1990-12-14 지정)
설명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소생의 8대군 중 여섯째 왕자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된 후 세조 3년(1457) 6월에 단종이 전에 금성대군의 집에 거한 일이 있었다 하여 금성대군을 이 곳으로 유배하니 금성대군은 이 곳에서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일대의 충의인물들에게 격문을 돌리고 거병하려다가 고변을 당하여 세조 3년(1457) 10월에 사사되었다. 그 후 영조 13년(1740)에 사우를 창건하고 금성대군을 제향하였다. 사우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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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15년 신해 > 2월 21일 > 최종정보
정조 15년 신해(1791) 2월 21일(병인)
15-02-21[04] 규장각과 홍문관이, 단종이 손위(遜位)하였을 때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에 대해 널리 고찰하여 계품하였다.
○ 본각이 아뢰기를,
“신들이 근거할 만한 공사 간의 문적(文蹟)을 삼가 고찰하였더니, 고(故) 상신(相臣)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의 시장(諡狀)에 ‘단종이 영월(寧越)로 피신하였을 때 공은 순흥(順興)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마주 앉아서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산호(珊瑚)로 만든 갓끈을 주고는,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이보흠을 불러 격문의 초안(草案)을 잡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안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서너 필의 말을 갈아타고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이에 공이 이보흠과 함께 잡혀 죽음을 당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의 시장에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六臣)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자,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며,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영풍군(永豐君) 이천(李瑔)과 함께 처자식은 노비가 되고 가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묘(中廟) 갑오년(1534, 중종29)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킬 것을 명하였고, 명묘(明廟) 때에 또 작호(爵號)를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1734, 영조10)에 종부시가 아뢰기를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에 김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 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상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 ‘남효온(南孝溫)은 소릉(昭陵)의 위호(位號)를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 김시습)과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남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睍)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2) 즈음에 세상 판도가 바뀌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였다. 초하루에는 매번 아침 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판서 이재(李縡)가 지은 조려(趙旅)의 비명(碑銘)에 ‘경태 계유년(1453)에 진사가 되었는데, 어느 날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묘(肅廟) 기묘년(1699, 숙종25)에 영남의 유생들이 절개를 지킨 공의 행실을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김시습, 원호(元昊), 이맹전, 성담수(成聃壽), 남효온과 함께 배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상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 ‘단종이 영월로 손위하자, 영월의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삼년상을 치르면서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는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1698)에 복위해 준 뒤 의리와 절개로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품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 ‘허후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음을 당했을 때 불려 들어가서 잔치에 참여하였는데,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고 결국에는 적소(謫所)에서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동시에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의 〈서문〉에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을 핑계 대고는 재능을 숨긴 채 벼슬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라고 하였습니다.
〈장릉지〉에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할 뻔하였는데,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손자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 ‘광묘가 왕위를 물려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부제학포인조상치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날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죽을죄를 짓고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 앞에 세우라.」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 것은 단지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섬기던 분에 대해 충성을 다해서 스스로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정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금성대군 이유가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를 지키다가 죽자 뒤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사(六臣祠)에 어찌 금성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하여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려, 원호, 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生六臣)인데, 혹은 방랑 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절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 한 사당에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을 누가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인 김시습은 영릉(英陵 세종(世宗)의 능호)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척하며 스스로 종적을 감추어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 추강(秋江) 남효온을 여기에 제사 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 송석동 등을 함께 제사 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 한 것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 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과 권자신 등은 그 사적이 같은데도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는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니, 허후 등 7인이 성취한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추배(追配)하는 은전을 신들이 감히 멋대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별도로 윤음을 내리겠다.”
하였다.
○ 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 간의 문적을 가져다가 살펴서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증명이 될 만한 사실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대군, 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자기 뜻을 지키려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00여 인이 넘는데,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서 대부분 상고하기가 어려우므로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영의정 김종서, 좌의정 황보인(黃甫仁),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정난(靖難) 때에 함께 죽었으니,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서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성삼문(成三問)과 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영릉(英陵)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1456, 세조2)에 그의 아들 충정공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고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박팽년과 성삼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은 그들이 전수받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니, 두 집안의 부자(父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납니다. 그런데 박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1788, 정조12)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지 못했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영릉의 셋째 아들인데, 타고난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훌륭하였으며 문장이 매우 뛰어나서 제가(諸家)들의 수장(首長)이 되었습니다. 광묘의 정난 때에 황보인, 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김종서는 죽고 이용은 강화도에 찬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종조(英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습니다.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영풍군(永豐君) 이천(李瑔)은 모두 세종의 아들입니다. 정축년(1457, 세조3)에 금성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가 이유에게는 형법을 적용하고, 이어와 이천은 이유와 죄가 같으므로 그들만 살려 줄 수가 없으니 그대로 이유의 무리로 연좌하여 모두 안치하고 금고시키자고 계청하였고, 종부시는 이영(李瓔), 이어, 이천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이어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이어와 이천은 모두 양빈(楊嬪)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묘(端廟 단종)에게 젖을 먹여 기른 분입니다. 단묘가 손위한 뒤 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이어는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에 금성대군의 모의가 실패하게 되자 양빈이 전후로 내응(內應)하였다 하여 화를 당하였는데, 두 아들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묘조에 선계(璿系)에 다시 속하게 하라고 명하였고 명종조(明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묘조에 단묘를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 주고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1734, 영조10)에 종부시가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 수백 명이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하기를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의 〈가승(家乘)〉을 상고해 보면, 호남 유생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저 세 신하는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칠지언정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이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고 심지어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의(忠義)가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호장(戶長) 엄흥도보다도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 신하는 바로 이영, 이어, 이천인데, 신들이 전후의 문적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이어와 이천은 이유와 이영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유와 한 일이 같고 이영과 삭직된 것이 같으며 이어는 또 육신의 일에 참여하였으니, 천륜으로 볼 때는 형제간이고 절의로 볼 때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성대군을 봉향하는 청안사(淸安祠)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흠전(欠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金時習)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영릉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는데, 단묘가 손위한 뒤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뿌리내리게 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목숨을 아껴서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는데, 마침내 이것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原州)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광묘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에 특별히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를 상고해 보면, ‘성희는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폐고(廢錮)되었다. 그의 아들 성담수는 지극한 품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해 볼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복역하였으나 유독 성담수만 끝내 벼슬하지 않고 늙기도 전에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1784, 정조8)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2)부터 떠나려는 뜻을 두어서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 대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1781)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묘가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작별을 고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逍遙自適)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묘 임오년(1702)에 특별히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김시습부터 조려까지는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입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고 집현전 교리입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의 서문을 상고해 보면 ‘광묘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고, 마침내 덕과 재주를 감추고는 병들어 혼미해서 방향도 모르는 자처럼 행동함으로써 그 절의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다.’라고 하였습니다. 율정은 바로 권절의 호입니다. 문간공(文簡公) 이수광(李晬光)이 말하기를 ‘권절은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고 정두경(鄭斗卿)이 말하기를 ‘단묘 때의 절의에 대해 세상에서는 육신을 일컫는데, 또한 은둔한 군자 권절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숙묘 임오년(1702, 숙종28)에 강원도 유생들이 육신사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정려할 것을 명하였고, 갑신년(1704)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상신(相臣) 이유(李濡)의 상주문에도 역시 말하기를 ‘권절의 절의는 육신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요청하니 세조가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墓表)에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 세 인자(仁者)의 행동이 같지 않았지만 공자께서 그들의 인(仁)을 모두 허여하였듯이, 공은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들과 길은 달랐어도 가는 곳은 같았다.’라고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또 말하기를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고,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부제학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曺尙治之墓)」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보기가 쉽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이 복위된 뒤에 육신과 함께 노량진(露梁津)의 사당에서 아울러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승문원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성희는 성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서로 권면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이 죽자 성희 역시 열 차례 엄한 국문을 받은 다음 안치되었으며 처자식은 노비가 되고 가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뒤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에 비분강개하였는데, 일찍이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상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서매가 죄인을 국문하느라 대궐에 가 있다고 하자, 정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광묘가 친국(親鞫)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묘 을해년(1455, 단종3)에 광주(光州)로 찬배되었다가 정축년(1457, 세조3)에 금성대군이 단묘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와 의정부가 ‘정종, 송현수(宋玹壽), 이어, 이천의 흉역죄는 나라의 법으로 볼 때 반드시 죽여야 하니, 죽여서 전형(典刑)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라고 아뢰어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특별히 명해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종조에 와서 시호를 주는 은전을 함께 받았습니다.
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묘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약간 뽑아서 거론한 사람 이외에도 필시 명분과 절의가 이들과 같은 사람이 있을 텐데, 세대가 이미 멀고 문적(文蹟)이 미비합니다. 비록 뽑아서 거론한 사람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은전은 그 격례가 더욱 중대합니다. 김종서, 황보인, 정분 세 대신의 매우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朴仲林)과 성승(成勝)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위차(位次)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안평대군 및 한남군과 영풍군은 이미 금성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 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배향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은 사육신과 함께 제사 지낸다 한들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남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과 송석동 등을 함께 제사 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 한 것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이고 추강은 남효온의 호입니다. 김시습과 남효온을 배향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이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도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전(祠典)에 관한 일이라서 신들의 얕은 견해로 감히 억측하여 단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별도로 윤음을 내리겠다.”
하였다.
[주-D001] 단종이 …… 때 : 원문은 ‘端宗孫位于寧越’인데, 한국문집총간 213집에 수록된 조현명(趙顯命)의 《귀록집(歸鹿集)》 권17 〈금성대군시장(錦城大君諡狀)〉에 근거하여 ‘位’를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주-D002] 달아났다 : 이 부분은 앞뒤의 문맥이 통하지 않아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走’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3] 소릉(昭陵) : 단종(端宗)의 모후(母后)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이다.[주-D004] 최석정(崔錫鼎) : 원문은 ‘崔錫恒’인데, 한국문집총간 154집에 수록된 《명곡집(明谷集)》 권23 〈집현전직제학원공묘갈명(集賢殿直提學元公墓碣銘)〉과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恒’을 ‘鼎’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5] 권자신(權自愼) : 원문은 ‘權自新’인데, 《승정원일기》와 《정조실록》의 다수 용례에 의거하여 ‘新’을 ‘愼’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 기사 안에서는 동일하게 적용하였다.[주-D006] 율정난고(栗亭亂稿) : 권유청(權幼淸)이 그의 선조 율정공(栗亭公)의 글을 모아서 편집한 문집이다.[주-D007] 용서해 주었다 : 원문은 ‘厚之’인데, 《승정원일기》와 《정조실록》의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厚’를 ‘原’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8] 그 …… 쓰고 : 원문은 ‘凝婉其辭’인데, 《승정원일기》와 《정조실록》의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凝’을 ‘微’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9] 만약 …… 것이다 : 1457년(세조3)에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는데, 다음 해에 이곳에 들른 세조가 단종을 비롯하여 단종을 위해서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東鶴寺)라고 사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주-D010]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 원문은 ‘不甚異同’인데, 《정조실록》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甚’을 ‘無’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1] 정난(靖難) :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단종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 찬탈을 꾀하여 단종에게 충성하려는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죽이고, 그들이 모반을 꾀하여 죽였다고 거짓으로 고한 사건을 말한다.
[주-D012] 청안사(淸安祠) : 1740년(영조16)에 창건하여 금성대군의 기신제(忌辰祭)를 지내는 사우(祠宇)이다. 청당사(淸塘祠)라고 하는데 지금은 ‘금성대군사우(錦城大君祠宇)’로 충북 진천군(鎭川郡)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주-D013] 결국 …… 것입니다 : 원문은 ‘終不見爲欠典’인데, 《정조실록》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見’을 ‘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4] 무인년 : 원문은 ‘甲寅’인데, 《승정원일기》와 《정조실록》의 이날 기사와 《승정원일기》 영조 34년 3월 12일 인견 기사에 의거하여 ‘甲’을 ‘戊’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희자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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輿地圖書 上(한국사료총서 제20집) > 補遺篇(忠淸道) > 淸安縣 > 祠宇
錦城大君貞愍公癸亥四月迎謚在縣三十里西 원주
敬天廟在縣東二十里敬順王畫像奉安甲子年創立 원주
張潭戊申逆變倡義討賊爲賊被死事聞己酉旌閭 贈同副承旨 원주
輿地圖書 上(한국사료총서 제20집) > 補遺篇(忠淸道) > 淸安縣 > 學校
鄕校在縣東二里 원주
龜巖書院在縣南十里東臯李俊慶樂齊徐思遠守庵朴枝華西溪李德胤芳村李塘未賜額 원주
輿地圖書 上(한국사료총서 제20집) > 補遺篇(忠淸道) > 淸安縣 > 館宇
淸塘館安民軒淸心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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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 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 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 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 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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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낙재(落齋)이다.->徐思遠 1550 1615 達城 行甫 樂齋, 晩悟堂, 顧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