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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FRAMEWORK 역사적 뼈대 들어가는 말 프란치스코(1182-1226) 성인의 시기는 11세기~13세기를 지나면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다양한 현상이 있었으며 종교적 쇄신과 재탄생이 많았던 시대이다. 이 기간 동안에 봉건사회는 위기를 맞이하여 서서히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가는데 그 질서는 새롭고 흥미로운 종교적 요소가 수반되어 더욱 공동적이고 시민적이었다. 교회 내부에서 부패와 세속의 이유들은 여러 계층에 현존하였다. 즉 주교의 임명에서 정치권의 간섭(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부터 시작하여-9세기) 그리고 교황은 교회제도의 많은 요원들에게 도덕성의 정도를 훼손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Reform movement of Benedictine origin. 베네딕토 수도회의 개혁운동. 교회의 “개혁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예전대로 성 베네딕토의 규칙으로 돌아오기를 촉진하면서 교회를 복음주의 기원으로 돌아가자는 목적으로 910년에 설립한(불란서) Cluny 수도원이 시작하였다. 수도원의 힘은, 곧 중요한 영성의 중심이 되었는데, 당시의 관례적인 시각으로는 하나의 혁명인, 수도원장에 관한 주교의 권한을 박탈하여 교황의 권한으로 수도원장을 교황청 직속으로 있게 하였다는 사실에 의존하였다. 그 당시에 주교의 권위는 정치권력에 의하여 환영을 받거나, 정치권력에 의하여 지명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Cluny의 모범을 따라, (1012년에 성 Romualdo에 의하여 설립된) Camaldoli 수도원, 및 (1036년에 성 Glovanni Gualberto에 의하여 설립된) Vallombrosa수도원, 그리고 (성 Bruno of Cologne,1030-1101,에 의해 설립된) Carthusians수도원과(Molesme출신의 성 Roberto, 1024-1111,와 그리고 그 중에도 Chiaravalle출신의 성 Bernardo, 1090-1153에 의하여 설립된) Cistercians 수도원 같은 다른 수도원 조직체도 모범을 따랐다. European revival 유럽의 부흥 복음정신으로 회귀를 위한 인식강화를 하는데 수도회들이 한 기여는 서기 1000년 이후로 “유럽인의 재탄생”의 초기현상에 합류한 새로운 삶의 관점과 연결되어 아주 놀라웠다. 재탄생은 다음에서 열거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몇 가지 요소로 결정되었다. 즉 야만인들의 침략종식, 상당한 인구증가, 정치체제로서의 봉건주의 쇠태, 도시팽창, 경제와 문화적인 분야 및 사실은 교회의 개선운동에서 발생하는 요소이었다. 교회는 2개의 광범위하게 퍼진 악마에 부담을 받고 있었는데 성직매매(교회직무획득)와 축첩(교회내 저명인사들의 위반)이었다. 이 악마들은 교회생활에서 황제의 정치 권력적인 면 과 세속적인 봉건주의 측면 모두에서 정치간섭과 깊게 연계되었다. 교회가 황제 권한에서 벗어나 교회의 권한을 회복하는 투쟁에서 2분의 교황이 등장한다. NICHOLAS 2세(980-1061) 교황과 특히 GREGORY 7세 (대략 1015-1085)교황이다. NICHOLAS 2세는 성직자 중에서 교황 선출을 반대하는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추기경 회의 (1059년의 시노드)에서만 교황을 선출하는 운동이다. 뚜렷한 차이는 GREGORY 7세 교황과 Henry 8세 국왕 사이에 발생하였다. 그들은 소위 “서임식에 대한 투쟁”의 두 주인공이었는데, 이것은 수십년간 지속된 갈등을 보름스 협약으로 1122년에 종결되었으며, 향후 불협화의 소스가 되는 일종의 타협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교황의 자치권의 인정을 나타냈다. From monastic spirituality to the birth of a new lay spirituality Monastic orders have been mentioned. 수도자의 영성으로부터 새로운 평신도 영성의 탄생까지 수도회가 언급되었다. 세속적인 현실이 영적인 위험의 원천이었다는 믿음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그들 제안의 바탕에 있다. 하느님과 개인의 관계만이, 수도원에서 금욕과 내핍생활로 살면서, 구원의 길을 열수 있었다. 물론 성직매매자와 축첩성직자들의 내부에서 발견된 것에 반대하는 시각이 세속적인 이익에는 기여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생활로 수행되는 활동이 (귀족 출신의 많은 수도승의 기원, 돈 많은 영주의 재정지원을 자주 받는 수도원의 탄생….) 구조적으로 봉건체제와 거래 요소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그 어느 경우에서도 이 이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위대한 종교적인 열정을 지탱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기 1000년 이후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커다란 변화는 평신도 측에서 종교적인 차원의 삶의 방법에 대한 파급효과를 주었다. 즉 새로운 양심이 대두되고, 초기 교회에 더욱 가까운 진실한 감성, 복음을 일상생활로 도입하기를 원하고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며, 평신도가 복음 메시지를 그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살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대두되었다. 진실로 새로운 사상은 사회 와 세속의 염려사항들을 거부하고, 수도원 또는 은둔자적인 생활을 고수하면서, “경멸의 태도”(세상을 경멸)로만 크리스천 완벽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에 비교된다. 그러나 복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강력한 열망은 몇몇 경우에는 교회에 대하여 반대하는 태도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세상 물정을 아는 교회체계의 부패계층에 반대하는 태도가 격론을 만들었다. 순결파(the Cathars), 왈덴시안파(the Waldensians), 아르날디스트파(the Arnaldists), 및 우밀리아티파(the Umiliati)와 같은 운동이 사건을 일으킨 국가에 반대 세력으로 탄생하였으나, 그들은 교리 입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시작하지만 주장이 너무 심하여 (verona공의회, 1184)에서와 같이 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간주되어 비난을 받았다. The penitential tradition and its evolution after the year 1000 서기 1000년 이후의 회개하는 사람들의 전통과 발전 교회의 역사에서 회개자의 운동은 매우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영세 받기로 선정한 다음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들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사람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일관성을 항상 존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기도, 금욕, 의연금 등등으로 구성된 회개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내적인 생활과 매일 활동을 진실로 변경한다면, 중대한 죄를 계속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회개자가 된다는 의미는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공적인 예식 중에 누구에게나 가시적인 생활의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의지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당의 뒷자리, 무릎을 꿇은 자세, 낡은 외투, 삭발, 긴 턱수염… 등이다. 회개를 위하여 정해진 봉사를 한 다음에만 회개하는 회 또는 그 범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의 생활 스타일은 형편없는 옷차림(튜닉)을 제공하는 이외에 예를 들면 상업 및 금융 활동, 그리고 인기 있는 축제와 쇼 등, 사람들의 영혼에 해가 될 수 있는 일을 수행하기를 거절하며 순응해야 하였다. 무기휴대 와 전쟁참여가 또한 금지되었다. 회개자의 생활 가운데 다른 특징들은 정해진 기독교가 수립한 지침에 따른 금식이었는데, 특히 사순절에 3회 금식을 하였다. 부활시기에, 성령강림 다음에, 성탄 때에 정해진 회개를 하였다. 자발적으로 맞는 태형은 다른 회개를 대체하는 체벌로 또한 간주되었다. 순례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먼 장소를 가는 것인데, 매 세기에 실행하는 회개의 한 형식이었다. 또 다른 회개형태는 수도자와 평신도가, 같이 선택할 수 있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고립인 은둔주의였다. The laity towards the "Fraternities" 형제회를 향하는 평신도 커진 경제규모와 사회의 커다란 변화가 반영되어 회개자의 “회개상황”에 변화를 가져왔다. 즉 기독교인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개인 용어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고, 가난하고 겸손한 기독교인을 닮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을 중심에 놓고 세상 안에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높은 이상을 향하는 이 긴박감은 많은 평신도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이 평신도들은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협회 또는 그룹에 어떤 현실에서는 생기를 주었고, 그들은 함께 살 필요 없이 동일한 “Propositum vitae” 즉 회개생활에 대한 동일한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Propositum vitae ”(Cf. Fr. RIVI,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그 시대의 평신도, Series TAU / 2, Rimini 2004, p. 64).] 가톨릭 교회 안에서 새로운 평신도운동을 환영하기 위하여 Innocent III(1160-1216) 교황의 지혜는 회개하는 이들의 운동을 좋아했다. 즉 모욕을 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재개하여 1201년 6월 날자의 서신으로 그들을 승인하신 분은 바로 Pope Innocent III (1160-1216)이시다. 그것은 모욕을 당한 사람들의 상태를 규정한 Propositum의 내용을 포함하였는데 즉 모욕, 인내, 자선, 금식 및 기도가 격려하는 원칙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모욕당한 이들의 3회를 프란치스코 3회를 어느 정도 앞선 생활 양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회개하는 이들의 상태를 쇄신하는 긴 여정을 종식시킨 것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경험한 보기 드문 인간적이고 신앙심 깊은 체험일 것이다. “평신도의 가장 진실한 인간적이고 크리스찬적인 열망과 그 해결책으로 가장 돋보이는 제안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그분에게 가능하다” (Fr. RIVI, Francis of Assisi ... p. 72).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말씀은 남녀로 구성된 커다란 꽃들을 육성할 것이며, 이들은 상이한 형식으로 크리스천의 완성에 이르는 길을 걸을 것이다. Francis penitent 프란치스코의 회개자 프란치스코가 세상의 유혹들(돈, 기사로서 그 자신을 만족시키는 꿈, 그의 동료무리들의 즐거운 경험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의 인생에 심오한 의미를 줄 수 없다고 이해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복음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 핵심을 살도록 자신을 이끄는 새로운 생활 스타일을 찾아 내면적인 여정을 착수하였다. 그가 유언장에 서술하듯이 그의 새로운 신앙체험 초기에 회개하는 영성의 소명을 느낀다. 주님께서 프란치스코인 저에게 이와 같이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즉 제가 죄 중에 있을 때,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너무나 쓴 맛이었지만, 주님께서 친히 나를 그들에게 인도하시어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자비를 보이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그들 곁을 떠났을 때, 내게 쓴 맛으로 느꼈던 것은 내 심신의 단맛으로 변하였다.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잠시 머물다가 나는 그 시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내가 그 시대를 벗어났다”는 표현을 수도원으로 물러가거나 또는 숲에서 또는 은둔 지에서 살기 위하여, 이 세상을 도피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즉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사는 고립은 “세상과의 접촉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 총체적으로 감동적이다.” 그리고 “거룩한 복음형식에 따라 본받고 싶은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사람들 가운데 더욱 적극적인 삶인 사도적인 생활지향으로 그를 움직이게 하였다.”(G. CASAGRANDE , 평신도회, 13세기에서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시대, 그리고 프란치스코 역사의 제1세기에서의 참회와 속죄 토리노, 1997, 238쪽) 영혼들을(이 영혼들을 위하여 주님이 돌아가셨다) 하느님에게로 안내하도록 하느님에 의하여 보내진 것으로 프란치스코는 인식하고 있었다고 강조하는 사람은 비타 프리마(35)에 사는 첼라노의 토마스 자신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Actus Fioretti(16장)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프란치스코는 실베스트로(Silvestro)수사 및 글라라 성녀(St, Glare)의 권고에 의존하여 이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첼라노의 토마스가 (Vita Seconda, 17)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처럼 이노센트 3세는 또한 그에게 설교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다음에 그에게 수여된 능력을 활용하여 프란치스코는 도시 및 촌락을 두루 다니면서 더욱 성스러운 열정으로 설교하면서 덕행의 씨앗을 심기 시작하였다. 설교는 모든 사람 즉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노동자와 농민, 귀족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그 메시지는 일관되게 복음을 살기 위하여 참회와 개종의 메시지이었다. “참회”의 주제는 성인의 삶의 중심에 있고 설교에 핵심이다.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프란치스코가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형태는 “생명과 구원의 기준”(A. FREGONA, The Secular Franciscan Order cit., p. 83)의 핵심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이웃과 적들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 되며 육체와 육체의 악행에 대하여 연민, 자선, 겸손, 순수함, 소박함, 자비, 등으로 또한 고해성사의 회수, 및 영성체 회수 등으로 구체화 된다. 이러한 것들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 자들이 사람들과 대면하는데 있어서, 평온과 낙관주의를 전파하는 설교에서 제공하는 생활 흔적들이다. 이들의 설교는 그들의 가족 과 직업을 포기하는 일없이, 그들 자신의 가정에 잔류하면서, 회개자 들로서 살기를 선택하는 기혼과 미혼의 사람들이 많아지게 증가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Conclusion 결론 따라서 자발적인 회개의 모습은 초기시대 이후로 존재하였고 다른 형태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평신도들을 교회가 인정한 생활 양식이었다. 프란치스코가 평신도들에게 제시한 생활양식은 상이하였고, 새롭고 독창적이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중북부에 특히 회개운동의 강력한 부흥에 기본이 되었으며 로마교황청이 숙고하였을 정도로 강력한 현상이었다. 이렇게 하여 1221년 Memoriale Propositi(생활지침)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첫댓글 재속프란치스코회 800주년을 맞아 국제에서 보내 온 글을 모든 회원들이 한번쯤은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800주년이면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뒤따를 줄 알았는데 코로나19가 요란한 행사보다 800주년의 의미를 우리 회원들이 가슴에 새기는 계기로 하라고 가르치고있는것 같네요.
저같은 애송이 프란치스코회원에게 800주년이란 시간과 이글의 내용이 프란치스칸다운 삶의 뿌리를 내려보고자 하는 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서신은 계속되겠지요.? 이 결론은 "역사적 뼈대"의 결론일 뿐이고
참으로 어려운 이 세기적 사건(코로나 19)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고
우리 재속프란치스칸은 어떻게 살아가자는 제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평화와 선.
* 제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로 수정 게시 (21:25)
코로나19가 올해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칙 반포
800주년 행사도 막았나봅니다.
역사적 뼈대있는 프란치스코회 가족으로
코로나의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회개 생활을 노력할 것을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