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복추(張福樞) 1815년(순조 15)~1900년(고종 37)
四未軒文集卷之七 / 記 / 睡足堂記
睡足堂。卽全州李氏讓寧大君八世孫諱秀完字公直之攸芋者也。公以孝友之性。精博雄渾之文。三入科選。爲當路所惎。擬上經綸十策。遇遯而止。退處安陰。別搆小堂于錦水上鶻山下。山水以自娛。又取草堂春睡足之意以自况。若公非阨窮不怨。遯世無憫之人歟。於乎。世代玄遠。文獻無徵。公之事行。百不存一。堂之廢。亦不知何年何日。其後承相與慨𢝋。歲乙未。鳩財募工。拓舊址而創新之。揭舊號而瞻慕之。功告訖。李君在三,在寬,在寅。屬福樞以記之。顧耄廢不敢當是寄。然念吾旅軒先祖於公祖禰二公。有輓詞與往復書。契誼之有別。跽而告曰。堂廢而興。僉賢之孝思可則。若能推是心而不忮不求。一如睡足公之爲。則其將勿替家聲。永世昌熾矣。豈但以此堂之興。爲張老頌已哉。遂書此。爲睡足堂記。
[주-D001] 秀完 : 저본에는 '秀元'으로 되어 있으나, 《睡足堂遺稿》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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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7권 / 기(記) / 수족당기〔睡足堂記〕
수족당(睡足堂)은 곧 전주(全州) 이씨(李氏) 양녕대군(讓寧大君)의 8세손 휘(諱)가 수완(秀完)이며 자(字)가 공직(公直)이었던 분이 오르내리던 곳이다. 공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성품과 정박(精博)하고 웅혼(雄渾)한 문장으로 세 번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실권자에게 미움을 받았다. 경륜(經綸) 십책(十策)을 상소하려고 생각하였지만, 점을 친 결과 돈괘(遯掛)를 만나 그만두었다. 이에 안음(安陰 안의(安義))에 물러나 거처하며 금수(錦水)의 위와 골산(鶻山)의 아래에 별도로 조그만 당을 지어 산수로 스스로 즐기고는, ‘초당에 봄 잠이 넉넉하네.〔草堂春睡足〕’의 뜻을 취해 스스로에게 견주었으니, 공과 같은 이는 액궁을 당해도 원망하지 않고 세상에 은둔해도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 세대가 아득하고 멀며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어 공의 행적이 백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당이 폐해진 것도 어느 해 어느 날인지 모른다. 그 후손들이 서로 함께 개탄하며 을미년(1895, 고종32)에 재목과 목수를 모으고, 옛 터를 넓혀 건물을 새로 짓고서 옛 당호를 내걸어 우러러보며 사모하였다. 공사가 완료되자 이재삼(李在三),재관(在寬),재인(在寅)이 나에게 기문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늙고 피폐한 내가 이 부탁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여헌(旅軒) 선조께서 공의 조부와 아버지 두 분에게 드린 만사(輓詞)와 왕복한 서찰이 있어 계의(契誼)가 각별하였음을 생각하고, 꿇어앉아 고하여 말하기를 “당이 허물어졌다가 건립되었으니, 여러 현자들의 효성을 본받을 만합니다. 만약 능히 이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해치지도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아 한결같이 수족공이 한 것과 같이 한다면, 장차 집안의 명성이 쇠퇴하지 않고 영세토록 창성할 것입니다. 어찌 다만 이 당의 중수를 가지고 장씨 노인〔사미헌〕이 칭송하는 것에 그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 점을 써서 수족당 기문으로 삼는다.
[주-D001] 양녕대군(讓寧大君) : 1394~1462. 태종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백(厚伯)이다. 1404년(태종4)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1418년(태종18) 폐위되고,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주-D002] 수완(秀完) : 저본에는 '秀元으로 되어 있으나, 《수족당유고(睡足堂遺稿)》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여 번역하였다.[주-D003] 금수(錦水)의 위와 골산(鶻山) : 수족당(睡足堂)은 현재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고실마을에 있는데, 옛날에는 수동면이 안의현에 속하였기 때문에 안음이라 하였다. 금수(錦水)의 원래 이름은 금호천으로 지금의 남계천(蘫溪川) 골산(鶻山)은 지금의 골무산(鶻舞山)이다.[주-D004] 초당에 …… 넉넉하네 : 제갈량(諸葛亮)의 시에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었는고, 평생을 나 자신이 스스로 알지. 초당의 봄 잠이 넉넉하니, 창문 밖에 햇볕이 더디고 더디네.〔大夢誰先覺?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窓外日遲遲.〕”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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睡足堂。卽全州李氏讓寧大君八世孫諱秀元字公直之攸芋者也。
睡足堂卽全州李氏讓寧大君八世孫諱秀元字公直之攸芋者也。
秀元->秀完
*남명학고문헌시스템 睡足堂遺稿 卷二 附錄 - 91 面 장석추 원문이미지 보고 完자로 교감해야 함
*원문교감하고 이에 의거하여 번역도 바로잡을 것
睡足堂遺稿 李秀完 (1676~1744) 公直(공직) 睡足堂(수족당) 全州(전주)
樗村先生遺稿卷之二十三 / 詩
李君秀完。自智異下來訪。又將轉入楓嶽。乃以衰年徒往之不宜。勸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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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2] 금수(錦水)의 위와 골산(鶻山) : 수족당의 위치가 현재 함양군 서상면에 있는데, 서상면이 옛날에는 안의현에 속하였기 때문에 안음이라 하였다. 따라서 금수(錦水)와 골산(鶻山)은 모두 서상의 산수 이름이다.
수족당(睡足堂) 함양군 서상면에 있는데->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고실마을에 있다. 금수는 금호천 현 남강천, 골산은 골무산이다.
*함양의 정자들
〔수동면〕-수족당(睡足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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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18-10-16 17:37
본문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상백(上栢)마을 서쪽 남계천 상류에 위치해 있다
이 고장 선비 이신 수족당(睡足堂) 이수완(李秀完)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그 후 이 정자는 고실(古실)마을 왼편으로 옮겨졌다.
이건 김윤수가 1996년 조사편찬한 <함양문화재도록>에 있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