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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산57-17 한강정구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卷四下 / 慶尙道 星州牧
陵墓
李兆年墓。在州東三十里,釜洞。
金宇顒墓。在州南二十里,大家谷。
鄭逑墓。在州南三十里,羊腸里。
*안정복의 〈반계선생연보〉에는 본서가 1656년에 완성
광해군 | 12 | 1620 | 경신 | 泰昌 | 1 | 78 | 1월 5일, 持敬齋에서 졸하다. ○ 4월, 蒼坪山의 夫人墓에 합장하다. ○ 8월, 光海君이 賜祭하다. |
인조 | 11 | 1633 | 계유 | 崇禎 | 6 | - | 4월, 蒼坪山 아래에 神道碑를 세우다. |
현종 | 4 | 1663 | 계묘 | 康熙 | 2 | - | 3월, 星州 印懸山으로 移葬하다. |
현종 | 9 | 1668 | 무신 | 康熙 | 7 | - | 2월, 神道碑를 檜淵書院 옆으로 옮겨 세우다. |
학사집(鶴沙集) 김응조(金應祖)생년1587년(선조 20)몰년1667년(현종 8)자효징(孝徵)호학사(鶴沙), 아헌(啞軒)본관풍산(豐山)특기사항유성룡(柳成龍),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의 문인
鶴沙先生文集卷之八 / 墓誌 / 寒岡先生墓誌銘 幷序
四月二日。
葬于州南蒼坪山。遠近會者四百餘人。監司鄭造不以上聞。八月。廢主始聞之。致賻祭。癸亥。仁祖大王命贈吏曹判書。遣禮官祭之。秋。監司 啓請從祀川谷書院。賜諡文穆公。丁酉。孝宗大王命贈領議政。
癸卯。移窆於州北印懸山壬坐之原。夫人李氏合窆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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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연보 제1권 [연보(年譜)]
목종 순황제(穆宗純皇帝) 48년, 광종 정황제(光宗貞皇帝) 원년 광해 12년 경신(1620) 선생 78세
○ 1월 1일에 병세가 위급해졌다.
○ 5일 갑신일 아침에 《가례회통(家禮會通)》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예설(禮說)》을 교정할 당시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 둔 종이가 똑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정돈하여 다시 붙이게 하였다. 유시(酉時)에 이르러 돗자리가 바르지 않다는 말을 세 번 연이어 말하였으나 기운이 약하고 말이 유창하지 않았다. 손으로 돗자리를 가리킨 뒤에야 곁에 있는 사람이 비로소 그 뜻을 알고 선생을 부축해 안고서 바르게 하였다. 조금 뒤에 지경재(持敬齋)에서 운명하였다. - 이전 해인 기미년(1619)에 가야산의 북쪽 모서리가 무너졌고 5일인 이날 아침에는 사수(泗水) 가의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끼는 이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선생이 운명할 조짐이라고 말하였다. -
○ 문인들이 초상을 치렀는데 한결같이 《의례》를 따랐다. 명의재(明義齋)에 초빈하여 두었다. - 부음을 접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고 애통해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
○ 2월 30일 무인일에 사손(嗣孫) 유희(惟熙)가 널을 받들고 나가 이튿날 창평산(蒼坪山) 밑에 이르러 임시 모암(慕庵)에 초빈하여 두었다.
○ 4월 2일 기유일에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 도내와 경기(京畿), 관동(關東), 호서(湖西)로부터 와서 회장(會葬)한 사류가 460여 인이었다. -
○ 8월에 광해군이 관원 - 예조 좌랑 이유일(李惟一) - 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이때 정조(鄭造)가 감사로 있으면서 제때에 즉시 계달(啓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문에 ‘게다가 부음 늦어 무덤 이미 지었으니.〔晩聞凶耗 若堂已封〕’라는 말이 있다. -
○ 치부(致賻)를 예법대로 하였다.
희종 철황제(熹宗哲皇帝) 천계(天啓) 2년 광해 14년 임술(1622)
○ 3월에 대구(大丘) 사류들이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 연경은 퇴계 이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다. -
○ 겨울에 성주 고을 사류들이 회연(檜淵)에 서원을 세웠다. - 회연은 선생이 도를 강명하던 곳이므로 특별히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
3년 우리나라 인조 헌문대왕(仁祖憲文大王) 원년 계해(1623)
○ 6월에 임금이 관원 - 예조 정랑 전식(全湜) - 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 10월에 감사가 고을 사류의 요청에 따라 조정에 계문하고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정자(程子)ㆍ주자(朱子) 두 선생 사당에 종사(從祀)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5년 우리나라 인조 3년 을축(1625)
○ 9월에 임금이 관원 - 이조 정랑 김시양(金時讓) - 을 보내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한 것〔勤學好問〕’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지니고 의리를 지킨 것〔抱德執義〕’을 목(穆)이라 한다.” 하였다. -
7년 우리나라 인조 5년 정묘(1627)
○ 9월에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숭정(崇禎) 3년 우리나라 인조 8년 경오(1630)
○ 9월에 묘갈(墓碣)을 세웠다.
6년 우리나라 인조 11년 계유(1633)
○ 4월에 신도비(神道碑)를 창평산 밑에 세웠다. - 비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7년 우리나라 인조 12년 갑술(1634)
○ 9월에 창원(昌原) 사류들이 회원서원(檜原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8년 우리나라 인조 13년 을해(1635)
○ 4월에 성천(成川) 사류들이 용천서원(龍泉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무인(1638) 우리나라 인조 16년
○ 2월에 창녕(昌寧) 사류들이 관산서원(冠山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기축(1649) 우리나라 인조 27년
○ 2월에 목천(木川) 사류들이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워 주자를 봉안하고 선생을 종사하였다.
신묘(1651) 우리나라 효종 현인대왕(孝宗顯仁大王) 2년
○ 11월에 사양서원(泗陽書院)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였다. - 사양은 선생이 운명한 지방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당을 세운 것이다. -
정유(1657) 우리나라 효종 8년
○ 10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증직되었다.
경자(1660) 우리나라 현종 순문대왕(顯宗純文大王) 1년
○ 2월에 묘갈을 고쳐 새겼다. - 증직을 썼다. -
신축(1661) 우리나라 현종 2년
○ 4월에 충주(忠州) 사류들이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세워 주자(朱子)를 봉안하고 선생을 종사하였다.
계묘(1663) 우리나라 현종 4년
○ 3월에 묘소를 인현산(印懸山) 임좌병향(壬坐丙向 남남동향) 언덕으로 받들어 옮겼다. - 고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
무신(1668) 우리나라 현종 9년
○ 2월에 신도비를 회연서원 곁으로 옮겨 세웠다. - 발문 내용을 덧붙여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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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耳溪集) 홍양호(洪良浩)생년1724년(경종 4)몰년1802년(순조 2)자한사(漢師)호이계(耳溪)본관풍산(豐山)초명양한(良漢)시호문헌(文獻)특기사항심육(沈錥)의 문인. 신경준(申景濬), 신대우(申大羽), 이광려(李匡呂), 송재도(宋載道) 등과 교유
耳溪集卷二十五 / 碑 / 星州戊申紀功碑 幷序
英宗大王四年戊申春。盜起嶺右。內連畿湖。賊魁麟佐。夜襲淸州鎭。殺節度使。自稱大元帥。先遣其弟熊輔。與安陰賊希亮,陜川賊聖佐。各逐其守長。署置僞官。發倉募衆。約日將北上。以應麟佐。勢甚張。中外大震。時星州牧使李公。聞變出坐衙。召掾佐。勵以大義。閱兵械以戒嚴。已而。按使黃公璿。知公有文武才。權署公右防將。令發本鎭兵討賊。以知禮,居昌,高靈三縣軍屬焉。公揮涕誓衆曰。國家不幸。凶賊猖獗。爾等俱蒙三百年涵育之澤。將偸生以從賊乎。將効死以報國乎。此正大丈夫立功名之秋。其各勉之。遂書王師字印。揭士卒前襟。一軍皆爲感激泣下。卽馳檄三縣。使領兵赴陣。剋日會于本州
羊腸坪。三月丁丑。公親祭關武安王廟。大犒進兵陳
羊腸。諸軍皆會。惟居昌兵不至。偵聞希亮自安陰入居昌。奪其兵。又聞陜川賊已據邑。公急引兵向陜川。分遣二縣兵。截居昌賊路。移牒左防將鄭暘賓。使遏賊北上路。以高靈縣監兪彥哲兼中軍。據冶爐嶺。遮賊南走路。又馳檄尙州善山晉州諸鎭。爲後援。多發間諜。諭從賊者以逆順禍福。於是海印僧將海琳,高靈賊校河世浩等。相繼詣陳前。請擒賊自効。公授計縱遣之。進兵至陜川之金陽驛。與賊隔水而陳。軍容整肅。賊皆喪氣。時巡撫使吳公命恒。已破安竹賊。捷報至。公卽遣海琳。諭賊中。徒衆益驚潰。邑人擒斬聖佐等四賊帥。公遂移兵向安陰。陳娥林。督諸營。晉州兵直趍咸陽。金烏兵從牛旨峙而下。雲峰兵防湖南路。高靈兵備新倉。賊窮蹙鳥散。王師進次邑中。希亮,熊輔等二十餘賊。皆被擒。嶺右平。遂班師。自始起兵。僅踰旬矣。按使驛聞。上嘉公功。冊輸忠竭誠奮武功臣。進階爵仁平君。公諱普赫字聲遠。龍仁人。累官至判敦寧府事。公歿二十餘年。星之人士。追思公不已。將勒石紀功。徵文於良浩。良浩曰。公之勳名載太常。戰功鏤金券。何待乎碑。然方亂之作也。升平日久。人心波蕩。列郡望風而逃竄。帥臣擁兵而觀望。惟公奮身提兵。直擣巢穴。羣醜騈首。指日勦滅。微公則大嶺西南。非國家有也。其功偉矣。况其隨方設機。先事伐謀。不待交鋒。坐收全功。兵志曰。善用兵者。不戰而屈人兵。公之謂也。星州之人尙說當時事如昨日。而從征將士老死且盡。則必欲鑱之石而傳諸後。不亦宜乎。遂敍次。而系之以詩曰。
惟戊之春。方內弗靖。三路構亂。實倡于嶺。公仗厥義。提戈剔藪。不懾不疑。談笑指顧。揚威出奇。前薄後扼。不亡一矢。羣盜自縛。如火始炎。撲之渰之。如獸將噬。畢之掩之。王旅載旋。旌旄蕤蕤。士女齊迓。牛酒嬉嬉。王報公勞。金珥鐵編。血牲盟壇。僮御土田。施于孫子。永世休顯。匪勇曷奮。匪忠曷勸。星山𡺚𡺚。其石不磨。鑱公之績。星人戶歌。非我私公。公跡攸起。公去詩存。徵于國史。
이계집 제25권 / 비(碑) / 성주 무신 기공비 병서 〔星州戊申紀功碑 幷序〕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 4년 무신년(1728) 봄에 적도(賊盜)들이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일어나 안으로 기호(畿湖)의 적도들과 결탁하였다. 적도들의 수괴인 이인좌(李麟佐)가 밤에 청주진(淸州鎭)을 습격하여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죽이고 스스로 대원수(大元帥)라 칭하였다. 그러고는 먼저 그 아우 이웅보(李熊輔)를 보내 안음(安陰)의 적도 정희량(鄭希亮)과 합천(陜川)의 적도 조성좌(曺聖佐)와 함께 각각 그 지역의 수령들을 쫓아내고서 거짓 관원을 임명하고 창고를 열어 군중을 모집하여 날짜를 약속해서 장차 북상하여 이인좌에게 호응하게 하니 세력이 몹시 불어나 중외(中外)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때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공(李公)이 변란 소식을 듣고 관아로 나와 좌정한 채 관속(官屬)들을 불러 대의(大義)로 권면하고 병기를 점열(點閱)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얼마 뒤 관찰사 황공(黃公) 선(璿)이 공이 문무(文武)의 재주를 지녔음을 알고서 임시로 우방장(右防將)에 임명하여 본진(本鎭)의 병사를 출동시켜 적도들을 토벌하게 하면서 지례(知禮)와 거창(居昌)과 고령(高靈) 세 현의 군사를 소속시켰다. 공이 눈물을 뿌리며 사람들에게 맹세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적이 창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국가가 3백 년 동안 함양하고 길러 준 은택을 입었으니, 장차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면서 적도를 따르겠는가, 아니면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겠는가? 이때는 바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시기이니 각자 힘쓸지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왕사(王師)’라는 자인(字印)을 적어 사졸들의 앞섶에 거니 일군(一軍)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즉시 세 현에 격문을 띄워 병사들을 거느리고 진영으로 나와서 날을 정해 성주의 양장평(羊腸坪)에 모이게 하였다.
3월 정축일에 공이 친히 관무안왕묘(關武安王廟)에 제사하고 군사들을 넉넉히 먹이고 진군하여
양장평에 진을 쳤는데, 여러 군대가 모두 모였으나 거창의 병사들만 당도하지 않았다. 정탐하여 정희량이 안음에서 거창으로 들어가 거창의 병력을 탈취했다는 정보를 듣고, 또 합천의 적도들이 이미 합천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공이 급히 병사를 이끌고 협천으로 향하는 한편 두 고을의 병력을 나누어 보내 거창의 적도들의 길을 끊었다. 그러고는 좌방장(左防將) 정양빈(鄭暘賓)에게 첩문(牒文)을 보내 적들이 북상하는 길을 막게 하고, 고령 현감(高靈縣監) 유언철(兪彥哲)을 겸중군(兼中軍)에 임명하여 야로령(冶爐嶺)을 점거하고서 적들이 남쪽으로 도주하는 길을 막게 하였다. 또 상주(尙州)와 선산(善山)과 진주(晉州)의 여러 진(鎭)에 격문을 띄워 후방의 원군으로 삼고 세작(細作)들을 많이 풀어 적도를 따르는 자들을 역순화복(逆順禍福)의 이치를 들어 깨우쳤다. 이에 해인사(海印寺)의 승장(僧將) 해림(海琳)과 고령의 적군 장교 하세호(河世浩) 등이 서로 이어 군진 앞에 나아와서 적도를 사로잡아 스스로 공을 세우는 데 노력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계책을 주고서 방면하여 보냈다.
그러고는 진군하여 합천의 금양역(金陽驛)에 이르러 적들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니 군대의 위용이 정제되고 엄숙한지라 적도들이 모두 기운을 잃었다. 이때에 순무사(巡撫使) 오공(吳公) 명항(命恒)이 이미 안죽(安竹)의 적도들을 격파하였는데, 승전보가 당도하자 공이 즉시 해림을 보내 적들에게 가서 효유하게 하니 적도들이 더욱 놀라 흩어지는지라 읍인(邑人)들이 조성좌 등 적도의 수괴 네 명을 잡아서 참하였다.
공이 마침내 안음으로 병력을 옮겨 아림(娥林)에 진을 치고서 여러 군영을 독려하여 진주의 군병은 곧장 함양으로 달려가고, 금오(金烏)의 군병은 우지치(牛旨峙)에서 내려가게 하고, 운봉(雲峰)의 군병은 호남(湖南)으로 가는 길을 막게 하고, 고령의 군병은 신창(新倉)을 방비하게 하니 적도들이 궁지에 몰려 뿔뿔이 흩어졌다.
왕사(王師)가 진군하여 고을 안에 진주(進駐)하니 정희량과 이응보 등 20여 명의 적도가 모두 사로잡혀 경상우도가 평정되어 마침내 회군하였는데, 처음 거병했을 때로부터 겨우 열흘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관찰사가 역말로 보고하니 성상께서 공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수충갈성분무 공신(輸忠竭誠奮武功臣)에 책록하고 품계(品階)를 올리고 인평군(仁平君)에 봉작하였다.
공의 휘(諱)는 보혁(普赫)이고 자(字)는 성원(聲遠)이니 용인(龍仁) 사람이다. 여러 번 승진하여 관직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공이 몰(歿)한 지 20여 년에 성주의 인사들이 공을 추모해 마지않아 장차 비석을 다듬어 공적을 기록하려 하면서 양호(良浩)에게 비문을 요청하였는데, 양호가 말하기를 “공의 훈명(勳名)은 태상시(太常寺)에 기재되어 있고 전공(戰功)은 금권(金券)에 새겨져 있으니 어찌 비석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바야흐로 변란이 일어났을 때 태평세월이 오래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물결치듯 요동쳐 각 고을의 수령들은 적의 기세만 보고서도 달아나 숨어 버렸고 수신(帥臣)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관망하기만 하였다. 오직 공만은 떨쳐 일어나 병사를 이끌고서 곧장 적의 소굴을 박살내어 적의 괴수들을 일망타진하여 얼마 되지도 않아 소멸시켜 버리니 공이 아니었다면 대령(大嶺) 서남쪽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공이 위대하도다. 게다가 정세에 따라 계책을 세우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적의 계략을 깨뜨려 교전할 필요도 없이 앉아서 온전한 공적을 거두니, 병지(兵志)에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는 싸우지 않고도 적병을 굴복시킨다.’라고 한 것은 공을 이르는 말이다. 성주 사람들이 아직도 당시의 일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벌에 따라나섰던 장사들은 늙고 병들어 다 사라지려 하니, 반드시 비석에 새겨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공적을 기술하고 이어서 시를 읊는다.
무신년 봄 / 惟戊之春
나라 안이 평온하지 못하여 / 方內弗靖
삼남(三南)에 변란이 생기니 / 三路構亂
실로 영남에서 창도하였네 / 實倡于嶺
공이 의리를 주장하여 / 公仗厥義
창 들고 적의 소굴 치니 / 提戈剔藪
두려움도 의심도 없이 / 不懾不疑
담소하며 지휘하였네 / 談笑指顧
위엄 떨치고 묘책 내어 / 揚威出奇
앞에서 들이치고 뒤에서 움켜잡으니 / 前薄後扼
화살 하나 잃지 않고 / 不亡一矢
적도들 절로 결박되었네 / 群盜自縛
불이 막 타오르는 듯 / 如火始炎
때려 치고 휩쓸며 / 撲之渰之
맹수가 씹어 먹으려는 듯 / 如獸將噬
잡아 거두고 급습했네 / 畢之掩之
왕사(王師)가 이에 개선하니 / 王旅載旋
깃발 성대하게 펄럭이고 / 旌旄蕤蕤
백성들 일제히 맞이하니 / 士女齊迓
소고기와 술로 즐겼네 / 牛酒嬉嬉
왕께서 공의 노고에 보답하니 / 王報公勞
금서철권(金書鐵券) 내리고 / 金珥鐵編
희생의 피를 바르며 제단에서 회맹(會盟)하며 / 血牲盟壇
노비와 토지를 내렸네 / 僮御土田
자손에게까지 복을 베풀어 / 施于孫子
영원토록 영화로우리니 / 永世休顯
용맹이 아니면 어찌 분발시키며 / 匪勇曷奮
충성이 아니면 어찌 권면하랴 / 匪忠曷勸
성산이 높고 높은데 / 星山𡺚𡺚
그 돌이 닳지 않으리니 / 其石不磨
공의 공적 새김에 / 鑱公之績
성주 사람 집집마다 노래하네 / 星人戶歌
내가 공을 사사로이 위한 것이 아니라 / 非我私公
공의 자취가 흥기한 것이니 / 公跡攸起
공은 떠나도 시는 남아 / 公去詩存
국사에서 징험하겠네 / 徵于國史
[주-D001] 성주 무신 기공비 : 이 작품은 1728년(영조4)에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강경파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진압의 공을 세운 이보혁(李普赫, 1684~1762)의 공적을 서술한 비문이다. 이 기공비는 현재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 남아 있다. 성주의 비석에는 1784년(정조8)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보혁의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원(聲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성주 목사 재직 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정희량(鄭希亮)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분무 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인평군(仁平君)에 봉해졌다. 이후 호조 참판, 병조 참판, 부총관,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황공(黃公) 선(璿) : 황선(1682~1728)으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성재(聖在), 호는 노정(鷺汀),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형조 참판,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였다.[주-D003] 관무안왕묘(關武安王廟) : 관우묘(關羽廟)를 가리킨다. 무안왕은 송(宋)나라 고종(高宗) 건염(建炎) 2년(1128)에 관우에게 더해진 봉호(封號)이다.[주-D004] 역순화복(逆順禍福)의 이치 : 무엇이 올바른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고 무엇이 올바른 이치를 따르는 것이며, 무엇이 화를 부르고 무엇이 복을 부르는지 설명했다는 말이다.[주-D005] 아림(娥林) : 거창(居昌)의 옛 이름이다.[주-D006] 신창(新倉) : 거창현(居昌縣)의 창고로 오늘날의 경남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일대에 있었다.[주-D007] 태상시(太常寺) : 제사와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던 관청으로 조선의 봉상시(奉常寺)에 해당한다.[주-D008] 금권(金券) : 금서철권(金書鐵券)이다. 본래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 하여 쇳조각에 단사(丹砂)의 붉은 글씨로 공신의 공적을 기록하여 공신에게 내렸다. 단사로 쓴 글씨가 잘 퇴색되었기 때문에 후대에는 은이나 금으로 글씨를 적었다.[주-D009] 대령(大嶺) : 문경새재를 가리킨다.[주-D010] 용병(用兵)을 …… 굴복시킨다 :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문도편(問道篇)〉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병가(兵家)에서 항상 주장하는 말이다.[주-D011] 금서철권(金書鐵券) : 본래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 하여 쇳조각에 단사(丹砂)의 붉은 글씨로 공신의 공적을 기록하여 공신에게 내렸다. 단사로 쓴 글씨가 잘 퇴색되었기 때문에 후대에는 은이나 금으로 글씨를 적었다. 원문의 ‘금이(金珥)’는 미상이다. ‘금이’는 금테두리를 두른 옥귀고리라는 뜻이 있으나, 이를 공신에게 내렸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혹 ‘이(珥)’는 꽂거나 바른다는 뜻도 있으므로 금 글씨를 이렇게 표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으나 이 또한 근거가 부족하여 미상으로 둔다.[주-D012] 희생의 …… 회맹(會盟)하며 : 과거에 군주가 공신(功臣)과 회맹할 때에는 희생을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그 피를 입술에 발라 서약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승현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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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4년 무신 > 5월 25일 > 최종정보
영조 4년 무신(1728) 5월 25일(을해) 비가 옴
04-05-25[39] 이정필(李廷弼)의 공사(供辭)와 관련하여 무함받은 일을 해명하고 훈공(勳功)을 사양하는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의 상소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황천(皇天)이 우리나라를 보살피시어 천고에 다시없는 난적(亂賊)을 채 열흘도 되지 않아서 토벌하여 평정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우리 전하의 성신(聖神)과 위령(威靈)이 미친 바로 종묘와 사직이 영원히 계속될 경사이니, 이제부터 신하와 백성들의 기쁨이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이어 내심 삼가 생각하건대, 보잘것없는 신은 단지 선대의 음덕에 의지하여 외람되이 관리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서 그동안의 이력(履歷)은 분수에 넘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나락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항상 두렵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어찌 천부당만부당한 훈명(勳名)이 갑자기 전혀 가당치도 않은 신에게 내릴 줄 생각하였겠습니까. 신이 너무 놀라 죽고 싶은 것은 일단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조정의 체모를 손상하고 서울이나 지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음직(蔭職)에 있는 천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장부에 공훈이 나열된 사람들과 동일시하여 외람되이 사양하는 소장을 올리겠습니까. 그러나 내심 몹시 민망하고 절박한 사정이 있어 참람한 죄를 짓는 것을 피하지 않고 대략 공을 세운 것이 없는 실상을 드러내 아뢰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은 영읍(嶺邑)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웃 고을과 인접한 경계에서 미친 역적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날뛰는 일을 당하였습니다. 3월 24일에 도신이 신을 차임하여 우방장(右防將)으로 삼아서 신으로 하여금 병사를 내어 적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단지 전령(傳令)을 보냈기에 그 당시에 비록 이미 군병을 모아 점고한 상태였지만, 신은 부절을 합쳐 보고 군병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내용으로 도신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래서 25일 오후에 감영의 비장(裨將)이 비로소 발병부(發兵符)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26일에서야 겨우 군병을 정돈하고 행장을 꾸려서 27일에 출발하였습니다.
양장평(羊膓坪)에 당도하여 각 읍의 군병들과 시기를 정해 모이느라 하루를 허비하고 이틀을 넘겨 비로소 합천(陜川) 읍내에 도착하여 적을 상대로 결진(結陣)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하세호(河世浩)라는 역적 장교가 진 앞에 와서 싸움을 걸기에 신이 장교로 하여금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승전(勝戰)한 보고를 힘껏 자세히 말하게 하였습니다. 하세호가 믿지 못한 채 증빙할 만한 문서를 보여 달라고 청하기에 신이 거기다 더해서 도순무사가 승전을 보고한 전령을 내보이니 하세호가 얼굴빛이 변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의 장교가 공을 수립하는 데 온 힘을 다 바칠 계책을 하여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포박하고 하세호를 시켜 문서를 가지고 와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이런 내용으로 도신에게 일의 전말을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이런저런 사정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이는 왕사(王師)가 여러 차례 승전한 뒤에 남은 위세가 역적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하니, 신이 어찌 한 가지라도 계모를 내고 책략을 계획하여 적의 세력을 막은 것이겠으며, 또 어찌 한 번이라도 화살을 쏘고 칼끝을 겨누어 전공을 거둔 것이겠습니까. 게다가 군대의 행렬이 수일 지나서야 비로소 적의 소굴에 도착하여 참으로 지체한 죄를 지었으니 도둑의 세력을 조장하게 만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공로를 세웠다고 은전을 베푸시니 사리로 따져 보아도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신이 이 소식을 들은 뒤부터 오장(五臟)이 떨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갖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끝내 감히 염치없이 명을 받들어 감당하지 못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만번 죽음을 당할 죄를 짓는 것을 무릅쓰고 우러러 일의 실정을 드러낼 계책을 하였습니다.
어제 비로소 경사(京師)에 와서 삼가 전 군수 이정필(李廷弼)의 공사(供辭)를 보았는데 그가 계획하여 적을 사로잡은 일을 모두 아뢰었습니다. 신은 적을 치러 군대를 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정필은 덫을 설치할 기회를 엿본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적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이익을 얻은 것이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각각 동쪽과 서쪽에 있으면서 적진이 그 사이를 막고 있어서 그가 조처를 취한 것을 까마득히 모르다 보니 영문에 보고하는 첩정(牒呈)에 아울러 논하지 못하여 허실(虛實)이 뒤섞이고 공죄(功罪)가 뒤바뀌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은 참으로 신의 죄입니다. 비록 그가 끌어댄 김게(金垍)의 초사(招辭)를 보더라도 신이 터럭만큼도 힘을 바친 실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이 만약 태연하게 공훈을 봉하는 대열에 염치없이 있는다면, 이런 것이 어찌 칼을 잡은 건 장가(張哥) 세 사람인데 목숨을 내놓은 건 이가(李哥) 두 사람이라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 공사 가운데 여러 차례 적의 수급을 요구했다거나 전령(傳令)을 보이며 잡아 끌어냈다는 등의 말은 실로 인정으로 보든 사리로 보든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참으로 말을 허비해 가며 자세히 설명하여 옛사람의 변명하지 말라는 경계를 범하고 싶지 않지만 남의 공을 빼앗아 제 이익으로 삼다니, 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입니까. 신이 참으로 용렬하고 나약하여 심장을 갈라 보여 해명하지는 못하지만 장차 이런 면목으로 어찌 이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신이 자처하는 의리는 기필코 훈명(勳名)을 사양하고 대략이나마 본분을 지켜서 조금이라도 더러운 누명을 씻는 것일 뿐입니다. 곡진히 만물을 이루어 주는 덕을 지니신 전하께서 어찌 신의 위태롭고 절박하여 지극히 간절한 심정을 굽어살펴 주시지 않아서 끝내 신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 되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감히 다급한 목소리로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은 성상께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특별히 헤아려 살펴 주시어 신의 성명(姓名)을 훈공(勳功)이 기록된 문서에서 삭제하도록 속히 명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외람되이 성상을 번독스럽게 한 죄로 비록 수없이 주륙(誅戮)을 당하더라도 실로 달게 받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 녹훈(錄勳)은 실로 공의(公議)를 따른 것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속히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주-D001] 여러 …… 요구했다 : 이해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을 중심으로 한 난이 일어났을 때 당시 합천 군수(陜川郡守)였던 이정필(李廷弼)이 조성좌(曺聖佐), 조정좌(曺鼎佐) 등의 역적을 잡았는데,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이 금양역(金陽驛)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적을 사로잡았다는 기별을 받고는 군교(軍校)를 보내 사로잡은 적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45년(영조21) 10월 10일, 이정필의 아들 이준휘(李儁徽)가 아비를 변명하기 위해 올린 상소에 자세히 보인다. 이보혁은 이때 합천의 역적 조성좌의 목을 베어 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인데, 이에 대해 이정필은 이보혁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주장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21年 10月 10日》[주-D002] 전령(傳令)을 …… 끌어냈다 :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합천 군수 이정필은 군사를 버리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망하고 마음대로 적의 괴수를 베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1745년 이정필의 아들 이준휘가 올린 상소에, 당시 이 일로 이정필을 잡아들일 때 감영의 비장이 성주 목사의 전령을 내보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英祖實錄 4年 3月 30日》 《承政院日記 英祖 21年 10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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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1년 을축(1745) 10월 10일(무신)
21-10-10[04] 아비 이정필을 위해 변명한 급제 이준휘의 상소
급제(及第) 이준휘(李儁徽)가 그의 아비 이정필(李廷弼)을 위해 상소하여 신변(申辨)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아비는 무신년 2월에 비로소 합천(陜川)에 부임하였는데, 3월 21일 역적 이정좌(李鼎佐)가 토민(土民)이라고 일컫고 보기를 청하여 청주(淸州)가 패한 소식을 전하면서 안음(安陰)의 적세(賊勢)를 대단히 칭찬하자, 신의 아비는 곧바로 이정좌와 그의 친족인 이성좌(李聖佐)를 가쇄(加鎖)를 씌워 가두고 순영(巡營)에 치보(馳報)하였습니다. 22일에 안음의 적들이 갑자기 흉한 격문을 보냈는데, 신의 아비는 또 그 격문을 가져온 자를 잡아서 순영으로 보내어 곧바로 효시(梟示)하도록 청하였으며, 24일에는 안음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순영과 병영(兵營)에 치서(馳書)하여 발병 토적(發兵討賊)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25일 거창(居昌)이 함락되자, 신의 아비는 순영에 보고한 뒤에 소속(所屬)인 3읍(邑)의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초계(草溪)는 발병할 의사가 없었고, 삼가(三嘉)는 우영장(右營將)이 막아서 중지하였으며, 의령(宜寧)은 관청이 비어 조발(調發)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에 적세는 더욱 급하여지고 군(郡)의 병졸은 단약(單弱)하여 구원을 청하는 길은 병영이 순영보다 좀더 가까웠는데, 동정을 자세히 들으려면 직접 가는 것만 못하므로 이에 천총(千摠) 김게(金垍) 등을 불러서 약속하기를, ‘내가 내일 돌아올 터이니 너희는 성을 굳게 지키며 동요하지 말고, 구원병을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26일에 드디어 진주(晉州) 감영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 27일에 돌아오니, 본군(本郡)의 좌수(座首) 정상림(鄭商霖)이 이미 적의 내응(內應)이 되어 적도(賊徒) 수백 명을 이끌고 들어와서 두역적을 탈옥시키고 관군(官軍)을 협박하여 군성(郡城)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아비는 경내(境內)에 숨어 있으면서 먼저 해인사(海印寺)의 승군(僧軍)을 모집하고, 또 삼가(三嘉)의 군사 중에서 적에게 위협당하는 자들을 달래어 적을 공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인하여 아객(衙客)인 노세엽(盧世燁)으로 하여금 샛길로 좇아 김게에게 밀통(密通)하여 바깥에는 복병(伏兵)시키고 안에서 내응하게 하였습니다. 30일 밤에 김게 등이 방포(放砲)하는 것을 신호로 먼저 적장(賊將)이 앉아 있는 곳의 병풍을 발로 차고, 곧바로 장막(帳幕)의 네 귀퉁이에 세운 대를 뽑으면서 엄습하여 적장 이성좌와 이정좌를 때려 죽이고 허택(許澤)을 뒤좇아 죽였으며 조덕좌(曺德佐)는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노세엽이 밖으로부터 좇아가 사로잡은 것이 2명이고,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4월 초하룻날 아침에 김게 등이 신의 아비를 진중(陣中)에 맞아들이었는데, 사로잡은 적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매달고 인하여 김게를 포장하였습니다. 김게가 말하기를, ‘어제 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과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이 금양역(金陽驛)에 와서 진을 쳤는데, 여기서 10리 되는 거리입니다. 이웃 고을을 대접하는 도리로서 적을 사로잡은 기별을 새벽에 알렸더니, 아침에 갑자기 읍내로 진을 옮기고는 군교(軍校)를 보내어 사로잡은 적을 달라고 합니다.’ 하므로, 신의 아비가 묻기를, ‘성주 군교(星州軍校)도 약속하고 함께 공격하였는가?’ 하니, 김게가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기에 성주 군교를 그냥 돌려 보냈습니다. 이보혁과 정양빈이 처음에는 김게를 협박하여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가, 신의 아비가 이미 진(陣)에 있음을 알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더니, 인하여 여러 차례 말하기를, ‘만일 보내 주지 않으면 마땅히 역습(逆襲)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성주 목사의 할 말인가? 조정에서 만일 듣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하자, 마침내 말하기를, ‘비록 수급(首級) 하나라도 꼭 보내달라.’고 하므로, 신의 아비가 보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합천 군교들이 자신들의 칼 맞은 자국과 피 묻은 옷을 보이며 말하기를, ‘내 머리는 보낼 수 있어도 이것을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므로, 신의 아비는 억지로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감영에 보고하고 수급을 보내려 하였더니, 여러 군교들이 또 말하기를, ‘순영에 보내려면 성주 진영(陣營)을 거쳐야 하는데 빼앗길까 두렵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수급을 함(函)에 담아서 병영에 보내어 순영에 전보(轉報)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보혁은 김게가 보낸 한 장의 수본(手本)을 빙자하여 순영에 보고하며 자기가 꾸며낸 방략(方略)인양 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방법으로 신의 아비를 무함하여 말하기를, ‘적진에 투족(投足)하여 임의로 참살(斬殺)하고는 자기의 공을 삼았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네 역적을 잡아다가 미처 조치를 하기 전에 신의 아비가 그 가운데에서 훔쳐 갔다.’고도 하였습니다. 또 사로잡은 적을 경참(徑斬)한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았고, 또 구원을 청하러 갔던 것을 군(郡)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였으며, 또 정상림이 석방하였던 두 역적을 신의 아비가 일부러 놓아주었다고도 하였고, 또 병영에 먼저 보낸 것이 순영을 격노(激怒)시켰다고도 하였습니다. 과연 계파(啓罷)하였다는 소식과 신부(信符)를 빼앗는 비장(裨將)이 연달아 내려왔는데, 마침내 영문(營門)에 잡아들이는 거조까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감영의 비장 김진옥(金振玉)이 왔을 때에 이보혁 등의 지휘(指揮)를 받아 저녁 어두울 무렵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군아(郡衙)에 돌입하여 신의 아비를 잡아 뜰에 꿇리고 형틀에 달아매었는데, 형틀에 달아매는 일은 애당초 영관(營關)에서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졸들이 둘러싸고 쫓아가며 재촉하니, 온 고을의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김게를 죽여서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여 김진옥이 김게를 적당(賊黨)이라고 속여 가쇄를 씌워서 순영에 보내었는데, 순영에서 그를 참(斬)하려고 하자, 영속(營屬) 1명이 뜰에서 크게 외치기를, ‘김게는 대공(大功)이 있는데, 어찌 차마 벨 수 있습니까?’ 하니, 도신(道臣)이 비로소 놀라서 김게의 사실 내용을 묻고는 술을 주어 달래고, 위로하여 보내었습니다. 대개 이보혁ㆍ정양빈ㆍ김진옥 세 사람은 서로 체결하여 순영에 무보(誣報)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의 아비가 그 동안에 순영에 보고한 글들은 대부분 저지당하여 도신(道臣)은 신의 아비가 보고한 것은 보지 못하고, 다만 이 세 사람의 밀서(密書)만 빙거하여 이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명항(吳命恒)이 남루(南樓)에서 적괴(賊魁)의 수급을 바칠 때에 제일 먼저 신의 아비가 유공 무죄(有功無罪)한 상황을 진달하였습니다. 그 뒤에 도신과 어사(御史)가 실상을 고험(考驗)하여 정양빈은 두류 부진(逗遛不進)한 죄를 입었고, 정상림은 적을 놓아준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의 형(兄)이 두 번째 격고(擊鼓)했을 때에 판부(判付)한 것도 또한 신의 아비의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이미 통촉(洞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중신(重臣)들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실상을 캐어서 품처(稟處)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문장(文狀)이 금부에 도착한 지 지금 이미 12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것을 뜯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신의 아비는 마침내 한을 머금은 채 죽었으니, 이것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런 까닭은 공(功)도 없는 무리는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畫像)을 그려 붙이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끝내 신원(伸冤)할 곳이 없다는 말이 간혹 헌신(憲臣)의 소(疏)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야산 밑의 전공은 의심스러운데[伽倻山下戰功疑], 밝히지 못한 마음 성상(聖上)만은 아시리[未白心惟聖主知], 금대의 기린각에 화상을 그리는 날은[今代麒麟圖畫日], 갈건(葛巾) 쓰고 가림에 돌아가 숨어 살 때일세.[嘉林歸臥角巾時]’라는 만사(輓詞)는 이보혁의 사돈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또 황선(黃璿)의 죽음을 가지고 신의 아비에게 의심을 가지는 자가 있는데, 누가 이런 말을 만들어서 성상에게까지 들리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신의 아비는 김진옥에게 붙들려서 두옥(斗屋)에 갇혀 있었고, 10명의 수졸(守卒)이 주야로 감시하여 비록 장양(張良)ㆍ진평(陳平) 같은 지혜와 장비(張飛)ㆍ관우(關羽) 같은 용맹이 있었더라도 어떻게 신기스러운 술법을 부려서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의금부에 있는 문장을 가져다 보시고 일일이 감별(鑑別)하시어 신의 아비의 밝히지 못한 원통함을 명쾌하게 풀어 주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된 일을 조정(朝廷)에까지 올릴 필요가 없다.”
하고, 그 글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준휘와 동방(同榜)으로 급제한 송형중(宋瑩中)이 알성묘(謁聖廟)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준휘가 소장을 올려 자세하게 폭로한 것이었다. 뒤에 좌윤(左尹) 이보혁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머리가 희도록 늙은 나이에 어찌 차마 이미 죽은 사람과 하찮은 것을 교계하여 효자(孝子)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마는, 그 상소 중에 한두 조항은 대강이라도 변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무신년 3월 24일 우방장(右防將)으로 임명을 받아 각 고을의 병사를
양장평(羊腸坪)에 모이도록 기약하고 그믐날 저녁에 합천(陜川) 읍내로 진군하여 적과 대진(對陣)하게 되었습니다. 적의 장교 하세호(河世浩)가 왔다갔다 하면서 도전(挑戰)하기에 신은 역(逆)과 순(順)의 이치로 깨우쳐 주고 안죽(安竹)의 전공(戰功)을 역설(力說)하였더니, 하세호가 비로소 두려움을 느끼고 그날 밤에 적을 사로잡아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 신이 보낸 간첩승(間諜僧) 해림(海琳)이 와서 말하기를, ‘정상림(鄭商霖)이 도망가자 적진이 자못 동요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하세호가 과연, ‘장교가 적을 사로잡았다.’는 글을 가지고 왔기에, 곧장 ‘결박하여 군전(軍前)에 보내라.’는 뜻으로 제송(題送)하였고, 가쉬(假倅) 김진옥(金振玉)을 시켜서 함거(檻車)를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도록 사로잡은 적을 보내 오지 않으므로 변고가 있는가 의심하여 경기(輕騎)로 적진에 가까이 가서 보니, 합천쉬(陜川倅)가 이미 진중(陣中)에 좌정(坐定)하여 사로잡은 적의 목을 벤 다음이었습니다. 합천의 적이 평정된 뒤 신은 곧 회군(回軍)하여 함양(咸陽)의 노상에 달려가서 도순무사(都巡撫使)를 뵈었습니다. 도신(道臣)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날로 순영(巡營)에 나아가서 비로소 도신이 수정(修整)한 공죄 계초(功罪啓草)를 보고 물러나와서 이정필(李廷弼)이 갇혀 있는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정필이 군(郡)을 버리고 적을 놓아주었다는 말을 신이 한 것으로 의심하고 화를 내므로 신이 그 계초(啓草)를 내어 보이니, 이정필이 의심을 풀었습니다. 당시의 사실은 이러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왕사(王師)가 연이어 승리하자, 그 위세에 멀리서도 두려움을 느끼어 적들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신은 일찍이 화살 하나 쏘지 않았고 적군과 한 번 교전(交戰)한 일도 없는데, 요행스럽게도 훈적(勲籍)에 올랐으니, 신은 진실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가령 신이 적의 수급을 얻어 공을 구할 생각이 있었다면, 김진옥은 가쉬면서도 오히려 이정필을 영문(營門) 밖에서 형틀에 묶어 꿇렸는데, 신은 바야흐로 장령(將令)을 받아 대군(大軍)을 거느리는 처지에 있었으니, 비록 이정필을 적과 아울러 잡아오더라도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어찌 구차스럽게 적의 수급 하나를 얻으려고 구걸하겠습니까? 지금 적을 경사(京師)에 함송(檻送)하려는 뜻으로 한 번 왕복한 것을 가지고 적의 수급을 요청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정필이 구원군을 청하러 갔다가 얻지 못하고 단신으로 돌아가 숨어 있었다면 관군(官軍)이 입군(入軍)할 때에 마땅히 뛰어나게 서로 알렸어야 할 터인데, 밤새도록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아무 소식이 없었으니, 그가 경내(境內)에 있는지 또는 설시(設施)하는 일이 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 보첩(報捷)하는 장계(狀啓)에 함께 논할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이정필이 폐고(廢錮)당한 것이 비록 신으로 말미암지는 않았으나, 신은 일찍이 가련하게 생각하였는데, 지금 그의 말이 어찌 이렇게 서로 반대됩니까?”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자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주-D001] 무신년 : 1728 영조 4년.[주-D002] 영관(營關) : 감영의 공문.[주-D003] 격고(擊鼓) : 임금의 거둥 때에 원통한 일을 임금에게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것.[주-D004] 판부(判付) : 임금의 재가.[주-D005] 기린각(麒麟閣)에 …… 붙이고, : 기린각(麒麟閣)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린을 얻고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선제(宣帝)가 여기에다 공신(功臣) 11명의 화상(畫像)을 그려서 걸어 두었음. 여기서는 공신의 자리에 오르는 뜻으로 쓰였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조면희 (역)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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