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비원(祕苑)에 관한 영상
-이 정 균-
가을 햇살이 고궁의 기와 위에 떠오를 때 나는 돈화문 옆 창덕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창덕궁의 아름다운 풍경 중 돋보이는 것은 궁 북쪽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後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이 정원의 명칭은 '후원'이 가장 많고, 이외에도, '금원(禁苑)', '북원(北苑)' 등이 있다. '금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원의 이름을 두고 갑론을박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祕苑)'이었다.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는 궁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주는 궁이라 할 수 있다.
창덕궁은 왕실 가족의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이제 고요히 사람들을 품는다.
돌계단을 오를 때마다 신발 밑으로 스며드는 세월의 숨결이 느껴진다.
수백 년의 발자취가 눌러놓은 돌바닥은 여전히 따뜻하고, 묵묵하기만 하다.
임정전을 거쳐 대조전 옆으로 나와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화려한 궁궐 속에서도 이런 소박한 자연이 부드럽게 물들인다.
세상과의 거리가 한결 멀어지고,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이곳에 누구나 잠시 ‘오늘’을 잊는다.
비원의 숲길을 걷다 보면 발끝에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작은 개울이 졸졸 소리를 낸다.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들며 길 위에 금빛 무늬를 수놓는다.
이 길을 왕과 왕비, 그리고 궁녀들이 걸었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그들 역시, 잠시 이 숲 속에서 평화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 생각이 들면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진다.
오늘의 나는 Ai 로 역사를 검색하며 걷지만, 마음은 어느새 조선의 시간 속에서 헤맨다.
숲의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며 속삭인다.
“모든 것은 흘러가되, 아름다움은 남는다.”
비원의 길 끝에서 다시 돈화문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깨닫는다.
짧은 산책이라 여겼던 길이, 사실은 나를 조선의 시간으로 이끄는 여정이었다는 것을.
아마 내가 이씨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라 그런지 얼마 전 한글날에 느꼈던 바람의 빛이 지나간다.
이곳을 찾는 또 하나 발걸음은 돈화문에서 낙선재의 담장을 돌아서면 ‘비원’이라 불린 창덕궁 후원이 열린다. 왕실의 정원이었으나, 동시에 마음의 피난처였다.
이곳의 길은 인공의 곡선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닮았다. 조선의 정원은 꾸밈보다 순응을 택했다. 그 안엔 대칭의 질서 대신, 바람과 빛이 빚은 조화가 숨어 있다.
‘人’자 지붕 끝에서 완성되는 상생의 마침표는 딱딱한 건축구조가 마치 사람의 온기로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이는 왕의 통치가 권위에서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삶터와 맞닿아 하나로 아우러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면 하늘도 흔들리고, 마음도 흔들린다.
정자 기둥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면서 권력의 무게보다 삶의 덧없음을 더 깊이 깨달았을 그의 고요가 자연의 그림자에 스며 있었다.
그 햇살은 지금도 역사 속에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후손-전주이씨(효령) 20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