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東萊博議동래박의
- 事實사실과 解釋해석-
* 飛龍비룡 辛鐘洙신종수 總務총무님 提供제공.
- 고전연수원 143기 _ 東萊博議동래박의 강좌 샘플(서현경 선생님) https://www.youtube.com/watch?v=jD82FwcbYqI&t=12s |
* 徐賢卿서현경(1969년 출생) 교수: |
延世大學校 國文科 大學院 문학박사, 成均館翰林院 翰林階梯 졸업(한림원장상 수상), 한국고전번역원 校勘·標點 專門委員(現), 韓國 古建築 人文學 硏究所 代表(現), |
한국고전번역원 > 기관소개 > 일반현황 > 미션과 비전 |
- 사실과 해석-『동래박의(東萊博議)』의 경우 https://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31465&page=1&menuId=0&bc=0 |
事實사실과 解釋해석-『東萊博議동래박의』의 境遇경우
1. 들어가는 말
『東萊博議동래박의』는 宋송나라 學者학자인 東萊동래 呂祖謙여조겸(1137-1181) 先生선생이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에 記錄기록된 事件사건들에 對대해서, 自身자신의 視角시각으로 分析분석하고 評論평론을 加한 一種일종의 ‘歷史역사 column集칼럼집’이라고 할 수 있다. 『東萊博議동래박의』는 우리가 無心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事件사건들의 裏面이면을 파헤치고 內容내용을 緻密치밀하게 分析분석하여 論理的논리적으로 敍述서술해 주는 冊책으로 定評정평이 나 있다.
아래에 引用인용하는 글은 『東萊博議동래박의』 앞-部分부분에 있는, 「鄭莊公정장공과 共叔段공숙단」, 「潁考叔영고숙이 武姜무강을 만나게 하다[潁考叔還武姜영고숙환무강]」, 「潁考叔영고숙이 수레를 다투다[潁考叔爭車영고숙쟁거]」 이렇게 세 篇편이다. 論意논의의 背景배경 이야기가 되는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의 記事기사를 紹介소개하고, 그 記事기사에 대한 東萊先生동래선생의 分析분석 및 評論평론을 要約요약해서 紹介소개하고자 한다.
東萊博議 卷1 01-01 鄭莊公共叔段 鄭나라 莊公과 共叔段 01-02 潁考叔還武姜 潁考叔이 武姜을 돌아오게 하다 01-03 周鄭交惡 周나라와 鄭나라가 서로 미워하다 01-04 宋穆公立?公 宋나라 穆公이 ?公을 세우다 01-05 衛州? 衛나라 公子 州? 01-06 臧僖伯諫觀魚 臧僖伯이 觀魚를 諫하다 01-07 鄭敗燕 鄭나라가 燕나라를 패배시키다 |
東萊博議 卷3 03-01 ?薛爭長 등侯와 薛侯가 禮를 행함에 先後를 다투다 03-02 潁考叔爭車 潁考叔이 兵車를 차지하려고 다투다 03-03 齊魯鄭入許 齊?魯?鄭나라가 許나라로 進入하다 03-04 息侯伐鄭 息侯가 鄭나라를 토벌하다 03-05 羽父弑隱公 羽父가 隱公을 시해하다 03-06 臧哀伯諫納?鼎 臧哀伯이 ?鼎을 宗廟에 들여놓은 것을 간하다 03-07 晉穆侯命二子名及晉封曲沃 晉 穆侯가 두 아들의 이름을 짓고 晉나라가 [아들 成師를] 曲沃에 봉하다 |
2. 世上세상을 속이려 했지만-정장공(鄭莊公)과 공숙단(共叔段)
【배경 이야기】
鄭정나라 武公무공이 婦人부인 姜氏강씨[武姜무강]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姜氏강씨는 큰아들-뒷날 莊公장공으로 卽位즉위함 - 은 미워하고 둘째인 共叔段만을 사랑하여, 그를 太子태자로 세우자고 男便남편 武公무공에게 여러 番번 請청하였지만, 武公무공은 끝내 이를 許諾허락하지 않았다.
武公무공이 죽은 後 莊公이 卽位즉위하자 어머니 姜氏강씨는 共叔段에게 땅을 封봉해줄 것을 莊公에게 要請요청하였다. 莊公이 共叔段을 京경땅에 封봉해주자 共叔段은 그곳에 가서 살면서 城壁성벽을 높이 쌓았다. 이를 알게 된 莊公의 臣下 祭仲채중이 말하였다. “地方지방 都邑도읍인데 城壁성벽 높이를 百백 雉치가 넘게 쌓는다면 나라에 威脅위협이 될 것입니다.” 莊公이 말하였다. “姜氏강씨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데 어쩔 수 있겠소?” 祭仲채중이 말하였다. “姜氏강씨의 慾心욕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莊公이 말하였다. “不義불의를 많이 行하면 반드시 自滅자멸할 것이니 그대는 暫時잠시 기다려 보게.”
이윽고 共叔段은 西鄙서비와 北鄙북비 두 곳에 命令명령을 내려 莊公을 背反배반하고 自己를 따르라고 하였다. 그러자 公子인 莒거가 莊公에게 말하였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습니다. 將次장차 어찌하시렵니까?” 莊公이 말하였다. “내버려두어라. 災殃재앙이 저절로 이를 것이다.” 共叔段이 마침내 두 고을을 自己 것으로 만들자 公子 莒거가 또 말하였다. “이제 칠 때가 되었습니다. 저렇게 勢力세력이 두터워졌으니 將次장차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질 것입니다.” 莊公이 말하였다. “義의롭지도 않고 親친하지도 않은 集團집단이 무리가 많아진다면 將次장차 무너질 것이다.”
共叔段이 本格的본격적으로 鄭정나라를 攻擊공격하려고 하였다. 莊公은 公子 莒거에게 수레 二百이백 乘승을 이끌고 京경 땅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京경 땅 사람들이 共叔段에게 反旗반기를 들었다. 共叔段이 鄢언(?)이라는 곳으로 逃亡도망가자 莊公은 또 그를 鄢언에 가서 쳤다. 그러자 共叔段은 다시 共공 땅으로 逃亡도망쳤다. (<좌전> 은공 원년의 기사.)
莊公은 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不幸불행한 王이다. 게다가 同生동생만 감싸고 돌던 어머니는 放恣방자해진 그 同生동생과 함께 마침내 反逆반역을 일으키고 莊公은 어쩔 수 없이 兄弟間형제간에 征伐정벌을 할 수밖에 없는 悲劇的비극적인 狀況상황에 處처하게 된다. 그래서 當時당시 鄭정나라 사람들도 莊公을, ‘차마 어머니를 이기지 못하여 아우를 害치게 되었고’, ‘아우의 작은 잘못을 차마 處罰처벌하지 못하여 마침내 큰 어지러움을 當하게 되었다’고 同情동정하기까지 한다. 위의 記事기사를 보고 나면 普通보통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一般的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東萊先生동래선생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鄭莊公정장공과 共叔段공숙단」의 첫머리는 이렇게 始作시작된다.
낚시꾼이 물고기를 속이지 물고기가 어떻게 낚시꾼을 속이며, 사냥꾼이 짐승을 속이지 짐승이 어떻게 사냥꾼을 속이겠는가? 이렇듯이 莊公이 共叔段을 속이지 共叔段이 어떻게 莊公을 속이겠는가? 또 낚시 바늘에 미끼를 달아서 물고기를 誘引유인하는 것은 낚시꾼이고, 陷穽함정을 파서 짐승을 誘引유인하는 것은 사냥꾼인데, 사람들은 낚시꾼을 탓하지 않고 물고기가 미끼를 貪탐낸 것을 탓하며, 사냥꾼을 탓하지 않고 짐승이 陷穽함정에 빠진 것을 탓한다. 世上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東萊先生동래선생의 논리에 따르면 莊公은 共叔段을 속이려는 狡猾교활한 낚시꾼이요 사냥꾼이며, 共叔段은 이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한 마리 물고기요 짐승일 뿐이다. 莊公은 同生동생을 죽여 없애려고 于先 自己 속마음을 감추어 同生동생이 慾心욕심대로 하도록 놓아두고 그의 惡악을 漸漸점점 키워서 마침내 反亂반란까지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東萊先生동래선생은 甚至於심지어 莊公의 속마음을 이렇게까지 類推유추해 낸다.
罪죄가 작을 때 서둘러 그를 다스리면 사람들이 나를 支持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 그의 惡行악행이 커져서 훤히 드러났을 때 다스리면 사람들이 나의 行爲행위에 對대해서 別별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蔡仲채중이나 公子 莒거는 이런 莊公의 陰凶음흉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共叔段의 都城도성이 法度법도를 넘었다고 諫言을 하고, 共叔段이 百姓백성들을 많이 얻을까봐 諫言을 하였으며, 또 鄭정나라 사람들은 莊公을 오히려 同情동정하기까지 하였으니, 東萊先生동래선생이 볼 때 이는 온 朝廷조정의 卿, 大夫들과 온 나라 사람들, 더 나아가 天下 後世 사람들까지 모두 莊公의 計策계책에 빠진 것이다. 온 世上을 相對상대로 속임수를 썼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詐欺劇사기극을 벌인 셈이다.
그렇다면 莊公의 속임수는 成功성공을 거둔 것인가? 이미 東萊先生동래선생에게 그 마음을 看破간파 當당했으니 失敗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東萊先生동래선생의 論理논리에 따르면 失敗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自己 自身을 害해치기까지 하였다. 남을 속이려면 반드시 먼저 自己 自身을 속여야 하는 法. 莊公은 남을 속이기 爲위해 自身을 속인, 그래서 結果的결과적으로 自身이 더 많은 害를 입었던 것이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속임을 當한 者가 잃은 것은 매우 가볍지만 속인 者가 잃은 것은 매우 무거우니, 이는 낚시꾼이 스스로 미끼를 먹은 꼴이요, 사냥꾼이 스스로 陷穽함정에 빠진 꼴이라. 天下의 가장 拙劣졸렬한 者가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東萊先生동래선생) 처음에는 莊公을 天下의 가장 陰險위험한 者로 規定규정하고 始作시작하였으나, 끝에서는 莊公을 天下의 가장 拙劣졸렬한 者로 規定규정하고 마무리짓노라.
3. 잘못을 고치는 方法방법-潁考叔영고숙이 武姜무강을 만나게 하다[潁考叔還武姜]
【배경 이야기】
鄭莊公정장공은 마침내 어머니인 姜氏강씨를 潁영 땅에 있는 城성에 가두고 나서 말하기를, “黃泉황천에 이르기 前에는 決결코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不及黃泉 無相見也]”고 盟誓맹세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말한 것을 後悔후회하게 되었다. 潁考叔영고숙이 이것을 알고는 禮예를 갖추어 莊公을 찾아뵈었다.
莊公이 그와 함께 食事식사를 하는데 潁考叔영고숙은 飮食음식을 먹으면서 고기는 먹지 않고 옆에 따로 놓아두는 것이었다. 莊公이 그 까닭을 묻자 潁考叔영고숙이 對答대답하였다. “素因소인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늘 제가 먹는 것을 맛보십니다. 그런데 아직 임금님의 국은 맛보지 못하셨으니 이걸 가져다 드리고 싶습니다.” 이를 보고 莊公이 말하였다. “너는 가져다 드릴 어머니가 있지만 나는 없구나.” 그러자 潁考叔영고숙이 말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莊公은 自身이 어머니를 두고 했던 盟誓맹세를 말해주고 또 이렇게 한 것을 後悔후회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潁考叔영고숙이 對答대답하였다. “임금께서는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萬若만약 땅을 파서 黃土황토물이 나오는 곳[黃泉황천]에 이르러 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서로 만난다면 그 누가 盟誓맹세를 어겼다고 하겠습니까?” 莊公이 그 말대로 따라 行행하니 마침내 母子모자 사이가 옛날과 같이 되었다.(<좌전> 은공 원년의 기사.)
아우와 함께 叛亂반란을 일으킨 어머니에 對대해 憤怒분노한 莊公은 ‘黃泉황천에 이르기 前전에는 決결코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고 盟誓맹세한다. 그러나 그것은 一時的일시적인 憤怒분노의 爆發폭발일 뿐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天理천리는 거스를 수 없는 法법이라 莊公은 곧 後悔후회하지만, 임금이 한 番번 했던 盟誓맹세를 되돌릴 수도 없고 하여 葛藤갈등과 煩悶번민에 빠진다. 이를 안 潁考叔영고숙이 飮食음식을 가지고 莊公을 說得설득해서 어머니인 武姜무강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 것을 놓고 東萊先生동래선생은 天性천성을 回復회복시킨 것이라 하였다. 하루아침의 忿怒분노하는 마음이 가라앉자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오르니 이는 바로 莊公이 가지고 있던 天性천성이요, 潁考叔영고숙은 但只단지 그 天性천성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의 실마리를 끌어내 드러나도록 해준 것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潁考叔영고숙은 그렇게 함으로써 莊公의 커다란 惡악을 뒤집어 世上세상을 뒤덮을만한 큰 善선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潁考叔영고숙에 대한 稱讚칭찬은 거기까지이다. 東萊先生동래선생은 이렇게 뒤를 잇는다.
아아, 愛惜애석하구나. 潁考叔영고숙은 그 本質본질은 알았다지만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活用활용할 줄은 몰랐으니 이 점에 有感유감이 없을 수 없겠다. 莊公이 潁考叔영고숙에게 어머니를 두고 盟誓맹세한 일을 말했을 때 潁考叔영고숙은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취했을 때 한 말은 술이 깬 뒤에는 實行실행하지 않는 것이요, 미쳤을 때 했던 行動행동은 미친-病병이 나은 뒤에는 하지 않는 法법입니다. 이미 술이 깼는데도 굳이 그것을 實行실행한다면 이는 술이 덜 깬 것이요, 미친-病병이 다 나았는데 아직도 그런 行動행동을 한다면 그 미친-病병은 틀림없이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다. 임금께서 어머니에게 盟誓맹세했던 말을 後悔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요, 後悔후회한다면 틀림없이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안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고치기를 꺼린다면 이는 아직도 後悔후회하지 않는 것이요, 이는 곧 아직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애―初초에 홧김에 했던 盟誓맹세는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니 이는 取消취소해도 無妨무방하다. 그냥 어머니를 만나면 된다.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潁考叔영고숙은 이렇게 말하지 않고 억지로 莊公을 위해 말을 꾸며내서 ‘땅을 파고 黃土황토물이 나오는 곳[黃泉황천]에 가서 만나라’고 ‘黃泉황천’의 뜻을 巧妙교묘하게 풀이해 주었으니, 이는 結局결국 莊公으로 하여금 ‘잘못을 꾸며대고 그릇된 行動행동을 가리는[文過飾非문과식비]’ 地境지경에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莊公의 天性천성이 이제 막 回復회복되려고 하는 瞬間순간에 潁考叔영고숙은 느닷없이 人慾인욕으로 이를 가렸으니 참으로 痛歎통탄할 일이라는 것이 東萊先生동래선생의 主張주장이다. 그래서 莊公의 天理천리를 열어준 者도 潁考叔영고숙이지만 莊公의 天理천리를 막아버린 者도 潁考叔영고숙이라고 하면서 東萊先生동래선생은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萬若만약에 莊公이 多幸다행히 孔子나 孟子를 만났더라면 한 가닥 後悔후회하는 마음을 실마리로 삼아 그 天理천리를 넓히고 廓大확대시켜 온 天下천하에 가득차게 하여 위로는 틀림없이 舜순임금 같은 孝子효자가 되고, 아래로는 틀림없이 曾參증삼 같은 孝子가 되었을 텐데 어찌하여 그저 鄭정나라 莊公으로 그치고 말게 하였단 말인가? 아깝구나, 莊公이 孔子나 孟子를 만나지 못하고 潁考叔영고숙을 만났음이여.
4. 이 마음을 미루어 저기에-潁考叔영고숙이 수레를 다투다[潁考叔爭車 영고숙쟁거]
【배경 이야기】
鄭伯정백(鄭莊公정장공)이 將次장차 許허를 征伐정벌하고자 하여 太廟태묘에서 武器무기를 나눠줄 때, 子都자도가 潁考叔영고숙과 수레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潁考叔영고숙이 수레의 끌채를 끼고 逃亡도망을 치자 子都자도가 창을 뽑아 들고 그를 쫓았다. 큰길에 이르러 놓치게 되자 子都자도가 크게 성을 내었다. 그 後에 魯노나라 隱公은공이 齊侯제후와 鄭伯정백을 모아서 許허 땅에 이르렀을 때, 潁考叔영고숙이 鄭伯정백의 깃발인 蝥弧모호를 들고 먼저 城에 오르는데, 子都자도가 그를 밑에서 쏘아 떨어뜨려 죽였다.(<좌전> 은공 12년의 기사)
◯ 鄭伯정백: 鄭莊公정장공(紀元前 757년 ~ 紀元前 701년, 在位: 紀元前 744년 ~ 紀元前 701년), 姓성은 姬희이고, 이름은 寤生오생으로 鄭武公정무공의 아들이다. 春秋時期춘추시기 鄭정나라의 3代대 君主군주로 42年 동안 在位했다. 母親모친 姜氏강씨(武姜무강)가 同生 段단을 偏愛편애한 것을 빌미로 段단이 反逆반역을 일으키자 이를 迅速신속히 鎭壓진압한 後 母親모친과 訣別결별했으나 潁考叔영고숙의 奇智기지로 和解화해하였다. |
- 每日頭條 > 淺談《春秋》中的「鄭伯克段於鄢」 https://kknews.cc/history/plr8nez.html#google_vignette |
여기 潁考叔영고숙은 앞의 潁考叔영고숙과 같은 사람이다. 潁考叔영고숙은 自身자신의 孝誠효성으로 情의 마음을 感動감동시켜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回復회복하게 했으니 眞實진실로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許허를 征伐정벌할 때는 수레 하나를 놓고 다투다가 結局결국 몸이 죽고 不孝子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그 理由이유는 무엇인가? 한 곳에서의 마음 씀씀이를 다른 곳에 미루어 適用적용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東萊先生동래선생은 이 事件사건을 놓고 이렇게 決論결론을 내린다.
萬一만일 潁考叔영고숙이 어버이를 섬기는 恭敬공경함을 미루어 宗廟종묘에서도 恭敬공경함을 지켰더라면 반드시 敢감히 太廟태묘에서 수레를 다투지는 않았을 것이요, 어버이를 섬기는 嚴肅엄숙함을 미루어 軍士들 앞에서도 嚴肅엄숙함을 지켰더라면 반드시 敢감히 큰길에서 끌채를 끼고 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그가 이 마음을 다른 곳에 미루어 適用적용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篤實독실하고 純粹순수한 孝子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끝에서는 “사납게 싸우다가 父母까지 危殆위태롭게 하였다”는 經界경계를 免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너스. 어떤 이가 이렇게 물었다. “潁考叔영고숙이 許허를 칠 때, 몸을 輕率경솔히 다루어 먼저 올라갔으니, 어찌하여 그 爻를 미루어 適用적용시키지 못하였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건 좀 苦悶고민해 보아야 할 問題문제인 것 같다. 戰爭전쟁터에 나가 勇敢용감히 싸우는 것은 忠충이지만 그 몸이 죽고 나면 父母가 크게 傷心상심하실 테니 이는 곧 不孝불효가 아닌가? 忠과 孝효는 果然과연 兩立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의 歷史역사 속에도 外賊외적의 侵入침입에 맞서 義兵의병을 이끌던 선비가 父母喪부모상을 當당하자 다 팽개치고 떠나는 바람에 그만 義兵의병이 支離滅裂지리멸렬 瓦解와해되고 말았다는 記錄기록이 있지 않던가? 東萊先生동래선생은 이에 對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明快명괘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수레를 다툰 것은 私私로운 일이고 不孝이지만, 먼저 올라간 것은 公的공적인 일이고 孝이다. 그 몸을 사랑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孝효이고, 그 몸의 危險위험을 잊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忠충이지만, 忠과 孝가 어찌 두 가지의 道이겠는가? 曾子증자께서도 ‘戰爭전쟁터에서 勇氣용기가 없는 것은 孝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潁考叔영고숙의 勇氣용기는 바로 曾子증자의 이른바 孝인 것이다. 그러나 먼저 올라가다 敵적에게 입은 傷處상처로 죽은 게 아니라, 뒤에서 子都자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은, 私私로움 때문에 죽었지 公的인 일로 죽은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이 마음을 미루어 저기에 適用적용시키지 못한 것에 對대해 내가 가장 愛惜애석해 하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아니면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 그래서 누구나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보고 함께 겪은 事實사실조차도 서로 다르게 記憶기억하고 陳述진술하고 解釋해석하는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事件사건이나 사실도 그러할진대 過去과거의 歷史역사에 對대해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過去과거의 歷史역사는 남의 눈을 通하여 한 번 整理되고 걸러진 狀態로 오늘에 전해진 것이라 그것이 果然과연 眞實진실과 얼마나 가까울 것인지는 그 누구도 壯談장담할 수 없으리라.
『東萊博議동래박의』는 東萊先生동래선생이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을 읽고 그 안에서 우리가 無心코 지나치기 쉬운 事件사건들의 뒤에 숨어있는 眞實진실을 파헤치고 內容내용을 再解釋재해석해 주고 있다. 물론 그 解釋해석이 때로는 지나치게 分析的분석적이고, 多少다소 억지로 말을 만들어낸 部分부분이 있다는 批判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不拘불구하고, 大部分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無心히 지나친 部分부분을 指摘지적하고 파헤치는 東萊先生동래선생의 分析力분석력과 論理力논리력만큼은 높이 評價평가해야 할 것이다.
古典고전, 그 中에서도 特히 歷史역사 資料자료를 읽고 그것을 飜譯번역 或은 解釋해석하면서 接하는 數많은 人物인물들의 行動과 事件 속에는 分明, 오늘날 우리가 되새기고 敎訓교훈으로 삼아야 할 內容들이 無窮無盡무궁무진할 것이다. 그것을 오늘의 敎訓교훈으로 오롯이 살려내기 爲해서는 勿論물론 사람의 心理심리와 世上세상의 理致이치를 꿰뚫어보는 知慧와 冷徹한 批判意識비판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東萊博議동래박의』는 이런 점에서도 우리에게 하나의 典範전범을 提示제시해 주고 있다. 燕巖연암 朴趾源박지원이 그의 小說소설 「兩班傳양반전」에서, “兩班양반은 五更오경에 일어나서 燈盞등잔불을 켜고 눈은 코끝을 보면서 발꿈치를 모아 꽁무니를 괴고 『東萊博議동래박의』를 얼음에 박밀듯이” 외워야 한다고 強調강조한 것이 決결코 그냥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글쓴이 : 조경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