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는 조선왕조실록 "夜"사 ㅡ12
야사가 전하는 조선의 마지막 왕후(명성황후)-
2008년 프랑스가 공개한 명성황후 초상화
그녀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의존할 곳 없이 자랐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된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친정일가였다.
시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의 친정 동생에게 양자로 들어온 양조카의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민첩하고
영특해 대원군의 부인, 즉 부대부인인 시어머니의
천거로 대원군에 의해 왕비로 간택되어 1886년
(고종3년)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궁에 들어왔다.
민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해 국정이
어지럽게 된 고종 이전의 3대(순조, 헌종, 철종) 60여년 동안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부대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일찍이 부형을 여의고 단순한 모녀의 가계가 마음에
썩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민비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이전의 왕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천정하거나 명문가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이 아니라,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이기도 했다.
왕보다 더 주목을 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진 실세였다.
그녀가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 달리 일생을 두고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황후가 대원군과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배후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였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실권(實權)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인 조성하를 중심으로 한 세력, 조두순, 이유원 등 노대신 세력, 김병국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세력과 힘을 합쳐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
을 양주 은골에 은퇴시켜 물러나게 하였다.
대원군을 실각 시킨 명성황후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하였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월급)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 군인을 없고 쿠테타를 감행하자, 민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민비는 친청사대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의 불만을 샀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모르는 체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어지러운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 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친러 정책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하였다.
하지만 그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명성황후를 접견했던 영국인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조선인치고는 작지 않은 키였으며, 세련되고 우아하였다고 한다.
분을 칠하고 화장하였으나 창백하고 슬픈 기색이 역력하였다고 한다.
황후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대응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의 눈동자에서 매우 활발하고 민첩한 두뇌 회전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하였다.
그녀의 남편인 고종황제도 회고에서 황후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비할 수 없이 뛰어났고, 자신이 고민이 있을 때, 솔직히 털어놓고 답을 속시원히 얻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었다고 한다.
이 말을 조합해 보면 명성황후는 우아하면서도 지적이고
세련된 현모양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예나 권력욕은 넘치게 많았으며 국제 정세도 잘 이용해 교린 정책에 능란하였고 고종과 황후는 이미 그때부터 미국에 의지하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