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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 같은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히브리서 11:8-16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9)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11)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12)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나 늙은 아브라함에게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갈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녀들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룬 것입니다. 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1. 하나님만 믿고 세상을 떠나라.
요즈음에는 머리카락만 깎고 나오지만 옛날에는 이발소에서 면도까지 했다. 그런데 면도칼이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을 내어 놓고 있다. 면도해 주는 사람이 ‘경력이 얼마인지? 혹시 정신 질환은 없는지?’ 등을 묻지 않고 목을 맡긴다. 한 달 내내 사업장에서 수고해서 번 돈을 은행에 저축을 한다. 만일 은행을 믿지 못한다면 그 많은 돈을 아내에게 맡기지 어떻게 은행에다 맡길 수 있겠는가? 목이 마르면 물이나 음료수를 사먹는다. ‘그 속에 독극물을 탄 물은 아닌지? 오염된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고 그냥 먹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 신앙의 삶에서 믿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아니 상상치 못할 정도로 크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성경을, 누구보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제부터라도 부족된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연약한 믿음을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바꾸어야 하겠다.
히 11:6 / 여러분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이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믿음이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거니와 믿음이 없으면 천국을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은 기정된 사실이요 또한 그렇게 믿고 있다. 믿음이 있기에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며, 예배를 비롯하여 충성봉사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고, 제자들 또한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하나님을 믿기에 갈 바를 모를지라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 아브람은 믿음이 있었기에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날 수 있었다.
창 12:1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지금까지 살았던 곳, 지금까지 함께 살았던 사람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은 혼합적인 삶을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에 대하여 이렇게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1:8-10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되기 전의 아브람은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참된 신앙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한다.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그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황당하고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겠는가?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75년을 살았다. 결혼도 그곳에서 했다. 그곳은 자신의 안정된 산업과 친한 친구들과 정겨운 가족 친지들이 있는 땅이다. 서로가 울타리가 되어 의지하며 살아갔다. 또한 몸에 베인 관습과 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그 땅을 떠나서 산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을 때에 그대로 따랐다. 이렇게 믿고 따르는 아브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셨고 또 아브람처럼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의롭다고 하셨다.
창 15:5-6 / 그리고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을 이으셨다. `아브람아, 보거라. 저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하늘에 저렇게 총총히 반짝이는 별을 다 셀 수가 있겠느냐? 네 후손이 하늘에 떠 있는 저 무수한 별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6) 아브람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굳게 믿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믿는 아브람을 흐뭇하게 생각하시고 그를 인정해 주셨다.
사도 바울도 아브람의 믿음을 예로 들면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롬 4:13-25 / [믿음으로 이루어진 약속]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14) 그런데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의미가 없다. 믿음이란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15)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복과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진노를 사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은 어길 수밖에 없는 율법을 갖지 않는 방법뿐입니다. 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주는 선물인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복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다 받아들이십니다. 이 약속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장래에 될 일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주실 것이며 그 아들에게서 많은 자손이 나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19) 그의 강한 믿음은 자신의 나이가 이미 백 살이 다 되어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거나 아내 사라 역시 아기를 갖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하는 사실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20) 염려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강하게 자라 아직 그 일이 실현되기도 전에 자기에게 베풀어질 복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약속도 실행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할 때이다.
롬 4:23-25 /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여 의롭다고 인정하신 이 복된 선언이 기록된 것은 단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24) 우리들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아브라함을 받아들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25)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함께 이 찬송을 불렀으면 한다…….
♬ ❶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3 뒤돌아서지 않겠네 ❷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 3 뒤돌아서지 않겠네 ❸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 3 뒤돌아서지 않겠네 <후렴> 어떠한 시련이 와도 수많은 유혹 속에도 신실하신 주님 약속 나 붙들리라 세상이 이해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여도 신실하신 주님 약속 나 붙들리라 결코 돌아서지 않으리
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굳이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는가?
단순하게 생각할지라도 아브람과 후일 그의 자손들이 그곳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보자. 사실 애굽은 요셉에게 큰 빚을 진 곳이며, 모세도 바로의 딸 공주의 아들이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그곳에서 정권을 잡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 출생 전부터 애굽으로 하여금 단련하는 풀무불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처럼 부렸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이르러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주셨다.
그렇다면 애굽사람들의 핍박이 없었다면 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모세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저들은 애굽에서 에덴동산과 같은 세상혜택을 누리면서 영생은 뒤로 한 상태에서 육신적으로 편히 살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모세는 별도였다. 모두가 모세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면 애굽에 살면서 저들을 복음화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히 11:24-26 / 모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애굽 왕의 손자로 불리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26)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브람 자신은 충분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아브람의 자손들이 갈대아 우르에 살면서 아브람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신 것은 그곳이 세상을 복음화 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창 12:1-3 /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갈대아 우르는 아브람이 인생의 출발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믿음의 첫 발걸음이다. 성경에서는 우르를 갈대아 우르라고 칭하는데, 갈대아는 이라크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의 지역을 말한다. 이 우르가 한 때는 수메르 제국의 수도로서 많은 도시를 지배하였다. 이미 4천 년 전부터 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번성하여 당시 인구가 약 삼십 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대에는 도시가 번창을 하면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문화가 함께 유입되는 특성이 있어서 이곳 우르는 달 신 나나를 특별히 숭배하였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이다. 고대 사람들은 도시 이름을 정할 때 도시의 내력과 실상을 살핀 뒤 그와 관련된 이름을 지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르는 ‘목마르다, 폐허가 되었다, 황폐하다’는 의미가 있다.
이 지방은 겉으로 볼 때 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발달한 부유의 도시지만 뭔가 모르게 사람들을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도시인 것 같다. 아브람은 문명의 도시, 거대한 신전이 마을 중심의 언덕에 버티고 있는 곳에서 일찍부터 많은 우상을 접하며 자랐는데, 이 사실을 후대의 여호수아가 이렇게 소개하였다.
수 24:2-3 / 여호수아가 온 겨레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 옛적 너희의 조상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 살 때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살지 않았더냐? 아브라함과 나홀과 데라가 너희 조상들이 아니었더냐?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이기도 하였다. 3) 그렇지만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데리고 나와 가나안 땅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다. 또한 자식들도 불어나게 하여 이삭까지 낳게 하지 않았더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때부터 우상을 섬겨왔다는 의미로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장사를 하였다고 추측한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화신(火神) 숭배자였고, 직업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브라함도 문명의 부요와 풍요 속에서 살았지만 그러나 말할 수 없는 영적 목마름과 공허 가운데 지냈음이 짐작된다. 그곳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그곳 사람들처럼 죄악에 빠져 경건을 잃고 믿음의 생활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던 롯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왜 그곳을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벧후 2:7 / 그러나 주께서는 롯을 소돔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인 그는 날마다 소돔 사람들의 끔찍스런 악행을 보고 몹시 마음 아파하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특히 경건하게 살고자 애를 쓰는 우리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고난을 각오하면서라도 세상을 떠나라고 하시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건(敬虔)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 걸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에 유명한 경건주의자였던 윌리엄 로오(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유명한 책 「경건한 삶을 위하여」에서 경건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의 정신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그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은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경건이 적용되어야 할 영역으로 시간 사용문제, 재물의 사용문제, 기도, 겸손, 순종 등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신앙생활을 세상에서의 축복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게 되고, 사회적인 지위가 올라가게 되고, 권력을 가지게 되면 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원리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이런 점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웁게 살아야 할 무거운 책임과 그로 인하여 받게 될 불이익과 고난도 있다는 사실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
딤후 3:12-17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의 특성을 설명하시는 산상보훈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생명의 길을 ‘좁고 험한 길’(마 7:13-14)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과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삶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말하기보다는 쉽고 좋은 것만 골라서 가르치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을 항상 애매모호(曖昧模糊)하게 가르친다. 요즈음에는 축복받는다는 것과 지키기 쉬운 것은 가르치지만 지키기 힘든 것은 아예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 23:2-4 /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 과거나 지금도 ‘교인들이 시험에 들까 염려하여 조심스럽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분명한 선을 그셨다.
눅 18:18-30 / 한번은 유대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 22) ‘그러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다가 네 재물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3)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듣자 침울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24) 예수께서는 그가 가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6)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우리가 거기에 도착하면 나를 두고 말한 옛 예언자들의 예언이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내게 침을 뱉고 채찍질하며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눅 18:31-33)
그러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말씀이 수수께끼처럼 들렸던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은 최고의 수준이라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조차 이해를 못하고 자기네 제자들을 가르치니 그들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보다 훨씬 못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영생은커녕 어디로 갈 것인지?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 선생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니고데모를 보자.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나라의 표적을 보여 주실 때에 충격을 받고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런저런 말을 하시지 않고 한 마디로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 3:3-7)라고 니고데모의 영적상태와 그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셨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거니와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럴지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기 위해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고, 주야로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이렇게까지 도우시며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하셨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마 5:17-20 /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쓴 책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라 하여 이를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일까지 말씀해 주시며 빨리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하셨다.
마 7:13-14 /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무섭게 책망 및 경계를 하시면서 저들의 교훈과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마 16:5-12 /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에 닿은 후에야 비로소 먹을 것을 준비해 오는 것은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이때 예수께서는 `정신을 차리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7) 제자들은 자기들이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고 생각하였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하느냐? 9)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덩어리로 내가 5천명이나 먹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러고도 몇 광주리가 남지 않았느냐? 10) 또 내가 4천 명을 먹였을 때도 얼마나 남았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그런데도 내가 먹는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고 생각하느냐? 다시 말한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12) 그제야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룩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7번이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책망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끝까지 따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6:28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유대인들이 물었다. 이 말을 다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이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종교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행위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 질문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을 듣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일로 판단되어 영생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주 명쾌하면서도 상상치도 못한 확실한 대답을 해 주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지금 자기네들에게 말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네들의 교훈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지 않는다고 하며 길가밭처럼 생명의 씨가 되는 말씀들을 내뱉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란 유대인들이 말한 하나님의 일과는 분명히 달랐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유대인이 말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보이려는 종교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메시아를 믿는다’란 말은 지식적으로 ‘성경을 믿는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믿음(believe in)과도 다르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능력이나 베푸는 선지자로 알았다.
요 3:1-2 /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회견을 청해 왔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는 것’이란 중생의 씻음 곧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구원을 받은 후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아 그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는 성화의 삶 곧 영생에 들어갈 성도들이 살아가야하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on) 믿음의 집을 짓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아예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영생은커녕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20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조금 깨달았다고 다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성도가 지켜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마지막 시험을 하신 것과 같을 수도 있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다. 베드로처럼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끝까지 따라야 한다.
요 6:60-63 / [영적 생명]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말씀만 하시는구나. 어느 누가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불평하며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그러면 인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63)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요 6:66-69 /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떠나갔다. 67) 그러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 하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69)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 잘못된 누룩과 같은 신앙교훈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큰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마 7:28-29). 예수님의 권위가 율법학자와 무엇이 다른가?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그리했을 것이다. 아무리 모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로부터 풍겨나는 위엄이나 인품, 영성 혹은 뭔지 모르는 분위기에서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청중들이 느낀 가장 큰 권위 중의 하나는 바로 가르침의 내용들이다. 마태복음 5-7장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커다란 주제(主題)들이 나온다. 이런 주제는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가르친 주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큰 권위가 있는 것이었다.
❶ 예수님의 가르침은 천국이 중심이다. 지상이 아닌 천상, 현세가 아닌 내세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장소이다. 마태복음 5-6장입니다. 팔복의 시작과 마침은 천국이었다(5:3, 10). 하나님께 상을 받는 곳도 하늘이다(5:12, 6:1). 재물을 쌓아 둘 곳도 하늘이다(6:20).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5:29-30). 세상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5:45). 한 마디로 천국이 신앙의 중심이다. 천국 중심의 신앙은 분명히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에서 잘 되는 법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❷ 예수님은 가르침은 영혼이 중심이다. 육체보다 먼저 영혼이 잘 되는 길을 가르치셨다. 팔복은 육체보다는 영혼의 축복이다(5:3-10). ‘육신을 위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6:25-33).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여섯 가지 기도 제목 중에 다섯 가지가 영적인 것들이다(6:9-13). 우리의 생명은 영혼의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육체 중심의 율법들과 대조된다. 저들이 가르친 것들은 주로 할례, 안식일, 결례법, 음식물에 관한 규례들, 절기 등 대부분이 육체적인 규례들이다.
❸ 예수님은 정죄보다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다. 랍비들은 성경을 육법전서로 생각했다. 율법을 근거로 정죄하고 재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에 중점을 두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5:7). 제물 바치는 것보다도 형제 화해가 먼저이다(5:24).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오히려 악한 자들 선히 대접해야 한다(5:39-42).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5:44).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한 것을 기도 응답에 반영하신다(6:14-15).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형제를 비판하는 대신에 자기 눈의 들보를 뽑아낸다(7:1-5). 인생은 짧다. 지나온 날도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남은 날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짧은 날들을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쓴다면 너무나 아깝다. 부지런히 용서하고, 부지런히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제이다.
❹ 그리고 모든 평가는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려고 행하라고 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곧 겉모양 신앙보다 내면의 신앙을 강조하신 것이다. 마음의 살인, 마음의 간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5:27-32). 사람 앞에서 헛맹세를 할 필요가 없다(5:33-37). 구제, 기도, 금식도 하나님께 보이면 된다(6:1-18). 재물로 주인 삼지 말아야 한다(6:24).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7:13). 거짓 지도자들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7:15).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하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주로 사람에게 보이는 것들이다. 음식, 복장, 기도, 금식, 안식일 법 등 대부분이 외형적인 것들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중요한 주제들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는 일이다. 참 신앙의 가치는 어떤 주제를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들인가? 아니면 서기관들처럼 주변적이고 시시콜콜한 주제들인가?’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품위 있는 신앙생활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허약하고 무능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신앙을 깊이 살펴보시라. 내가 생각하는 주제들이 무엇일까? 아니 무슨 주제로 설교하기를 바랄까? 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제들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주제들을 따르고 있는가? 천국 중심인가? 아니면 세상 중심인가? 내세(來世)가 중심인가? 현세(現世)가 중심인가? 천국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가? 천국 얘기 하면 잠이 오는가? 천국 얘기 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가? 영혼이 중심인가? 육체가 중심인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이 중심인가? 영혼의 안식, 영혼의 기쁨, 영혼의 생명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신앙의 중심이요 영원한 소망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요 평안이요, 안식이 되도록 말이다.
▶ 그러면서 우리의 영적상태를 예수님의 마음과 뜻처럼 많이 끌어올려야 한다.
비판과 정죄로 사는가? 아니면 용서와 사랑으로 사는가? 예수님의 목표는 용서와 사랑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용서와 사랑이다. 사랑의 주제에 매달릴 때에 우리의 삶은 사랑의 삶이 될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동하나? 아니면 하나님께 보이려고 행동하나? 참 신앙은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이려고 행할 때에 인간적인 갈등이 사라진다. 원망, 시기, 불평, 다툼, 자연히 해소된다. 영원한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질 크나큰 위로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의 주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 자녀가 되게 하고, 천국 자녀로 품위 있게 살도록 만들어준다.
그러기에 청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 내용과 주제들이 권위 있다고 인정했다. 그들이 다 예수님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도 산상수훈 및 설교 말씀을 따라야 될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럴지라도 우리라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제들에 감동받아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따라야 할 것이 아닌가?
▶ 후일 사도 베드로도 이러한 말씀에 동조했다.
벧후 1:2-6 /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더욱더 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배우십시오. 3)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위대한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생활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선한 품성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4) 그리고 그 같은 권능으로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정욕과 부패에서 해방되어 그분의 품성을 나누어 받게 된 것입니다. 5) 그러나 이런 은사를 받아 간직하려면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6) 더 나아가 여러분은 욕망을 버리고 인내와 경건을 몸에 익히며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왜 소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것을 듣고 보았는데 이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벧후 1:9 /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위해 강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죄에 물든 옛 생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요즈음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들은 예수님만을 믿어야 한다는 점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여 다른 문으로 들어가도 나름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불교나 유교나 모하메드나 우상을 섬겨도 구원을 얻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특징은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지 절대 진리란 없다는 것이다. 이 철학을 종교에 적용한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외치는 설교가 희소(稀少)하다. 죄에 대한 심각성과 죄에 빠졌을 때에 죄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기에 벗어날 수 있는 것을 경험하지도 못한다.
여기에서 과거 물 위를 걷다가 바람과 파도를 보고 물에 빠진 경험이 있었던 베드로의 외침을 보면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적이 있으셨다. “ …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마 6:12-13) 죄악 세상에 살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지 않으면 유혹에 빠지거니와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악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야 죄악에 빠지지 않거니와 죄악의 물결에 휩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벗어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우리가 가진 믿음조차 지켜나가기가 어렵다. 베드로가 작은 소녀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였다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찌 믿음을 지켜나갈 수가 있겠는가? 베드로는 3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식어진 사람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보다 믿는 것을 포기하거나 아예 떠나가 버릴 것이다.
2. 아브람의 순종을 보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
▶ 잠시 이삭의 순종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삭과 리브가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일찍이 아브라함이 살던 시절에 있었던 것과 같은 매우 심한 기근이 또다시 들었다. 그래서 이삭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다스리고 있던 그랄로 갔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창 26:1-3 / 애굽으로는 내려가지 마라. 내가 일찍이 가서 살라고 말해 두었던 이 땅에서 그냥 살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또 네게 복을 내리리라. 이 온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내가 일찍이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였던 것을 다 이루리라.
이어서 4, 5절에서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을 예로 들어 이삭도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복을 이어서 이삭에게도 약속해 주셨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리하여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서운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나안 땅에 있는 그랄에서 살았다.
가나안 땅은 흉년이 들면 도저히 살수 없는 곳이다. 팔레스타인 땅은 일 년 내내 비가 오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우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게 된다. 그러나 애굽은 양식이 풍족하였다. 그 이유는 마르지 않는 나일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애굽이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남쪽 국경 지역인 그날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는 것을 막으셨다.
우리가 생각할 때 가나안 땅에 살라고 하셨으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흉년이 들어 도저히 먹고 살수 없게 되었는데도 떠나지 말라고 하시는가? 약속의 땅에 왜 흉년이 오게 될까? 이삭은 어렸을 때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대단한 신앙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아브라함의 신앙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이을 자가 맏아들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신앙은 실제 문제에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고 성장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먹을 것이 없고, 사업이 망하든지 실직해서 대책이 없을 때 혹은 결혼한 지 오래인데 아이가 생길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질 때에도 믿음을 주장할 수 있어야 말씀이 자신의 신앙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다. 기근과 흉년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거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창세기 26:3-5에서 하나님께서는 네 가지를 약속하셨다. ❶ 기근이 있지만 참고 견디면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❷ 약속의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사람들 곧 약속의 씨를 주겠다. ❹ 네 후손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반석과 견고한 믿음이 되지를 못하여 때로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인하여 많은 역경과 고난도 겪었다. 그렇지만 그 후 아브라함이 되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순종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도 주셨다. 이삭도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배우게 되었다. 야곱도 요셉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을 받는 것과 성숙과 믿음의 비결은 순종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정말 멋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나아만의 피부가 소년의 살결처럼 깨끗해졌고 가나의 혼인집 하인들이 순종하매 최고의 포도주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은 우리를 곤고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으로 복을 주시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순종은 복을 받는 통로임을 알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자.
히브리서 5:8-9에서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였는데 누구의 이야기인가? 예수님의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순종함이 뒤따라야 한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간다면 그것은 신뢰가 아니다. 이해가 되어야, 납득이 되어야, 자기 의견하고 일치되어야지만 따라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령을 하셨을 때에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는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지시할 땅으로만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이라는 말씀은 가장 안전한 길이다. 양은 목자, 어린이는 부모님의 인도하심만을 받으면 된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사실을 명심하자.
다시 아브람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떠나라고 하신다. 이해가 되겠는가? 하나님의 이 황당한 요구에 대해 아브람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진지하게 고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황당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 아브람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고 빠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 12:4). 그 후 아브람은 비싼 값을 지불하고 믿음의 조상, 순종의 사람이라는 별칭을 얻고, 그 동안 순종했던 순종에 가장 큰 순종을 더함으로 상급을 받게 되었다. 순종하는 만큼 복을 받는다는 공식을 만들었다.
창 22:16-18 /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고 분명히 맹세하노라.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게 바쳤으니 17) 내가 네게 복을 내리리라. 한없이 복을 내리리라. 내가 분명하게 약속한다만 네 후손이 하늘에서 총총히 빛내는 별처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지리라. 네 후손들이 그 원수들을 쳐부수고 원수들의 성을 정복해 버리리라. 18) 또한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뭇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네가 내 말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선교 초창기에 침례교 선교사님으로 오신 말콤 C. 펜윅 선교사님의 일화이다. 어느 날 펜윅 선교사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무를 하나씩 주면서 무 잎은 땅 속으로, 무는 하늘로 올라가도록 심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은 ‘아마 선교사님이 서양에서 무를 심어보지 못했나봐, 무가 열매인 줄로 잘못아신 모양이지?’하며 전부 무를 땅 속으로 무 잎사귀는 하늘로 오게 심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은 무를 하늘로, 무 잎사귀는 땅 속으로 심었다. 동료들이 이 사람을 보고 ‘아니! 선교사님이 모르셔서 그렇게 시킨 건데 무식하게 무를 그렇게 심으면 어떡하느냐?’며 흉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펜윅 선교사님이 돌아오셔서 자기의 말 대로 무를 거꾸로 심은 제자만을 칭찬하였다. “내가 무 심는 법을 몰라서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순종하는지?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싶어서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사울왕을 향한 사무엘 선지자의 가슴 아픈 충고도 마음에 새겨두자 /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실 때에 사울왕은 좋은 양과 짐승들을 산 채로 숨겼다. 그리고 이 일을 꾸짖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들만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그때 사무엘은 충고를 하였다.
삼상 15:22-23 / 그런데도 사무엘이 또 다시 사울을 책망하였다. “여호와께서 무엇을 더 좋게 보실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오.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화목제물을 더 좋게 생각하실 것 같소? 똑똑히 들으시오. 당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보다 더 좋은 제물이 없을 것이오! 23)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점쟁이의 속임수와 같고, 여호와의 말씀보다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오. 이제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저버린 것같이 여호와께서 당신을 저버릴 것이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없소.”
▶ 우리 자신들을 깊이 돌아보며 묵상해야 점이 바로 순종이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뽑으셔서 1,500여 년 동안을 율법으로 훈련한 민족이다. 오랜 계시활동을 통해서 누누이 메시야를 보낼 것이며 너희는 메시야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 어느 유대인을 막론하고 ‘당신은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가?’고 묻는다면 100% 모두가 ‘순종하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맹세까지 할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왜 영접하지 아니하였을까? 표면적인 이유가 많았다. 베들레헴 출신이 아니라는 점(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과 촌구석 나사렛에서 자랐다는 것 그리고 명문가문이 아니라는 것, 배우지 못했으며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 아니라는 점 등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귀신들이 쫓겨 갔으며, 병자들을 고치셨고, 심지어는 맹인을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다. 아무도 그 말씀에 반박할 수 없을만한 권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거역의 영-불순종의 영, 고집의 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고 그 수하에 복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들도 왜 복종이 되지 않는지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신이 진정 메시아라면 우리에게 속 시원히 말해 보시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런 원망의 뜻이 따로 있었다.
‘진정 메시야라면 왜 하필 나사렛 촌구석에서 나셨습니까? 당신의 제자들도 모두 촌티가 납니다. 이들은 도무지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불한당과 같은 자들이군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며, 금식도 하지 않고, 안식일 규례를 지키지 않는군요. 당신도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합니까? 당신이 하는 모든 말씀들은 우리를 비꼬는 듯합니다. 부자나 권세있는 자들이나 많이 배운 자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왜 이들의 태도가 이처럼 건방질까? 그렇다고 그들이 표면적으로 죄인이거나, 무식한 자들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아니다. 누구보다 세련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자부심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들 속에는 거역의 영이 가득했던 것이다.
왜 이들에게 거역의 영이 가득한가? 그것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신념 정도일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로들의 유전은 몇 백 년에 걸쳐서 완성이 되었는데, 처음의 의도는 ‘율법을 어떻게 하면 더욱 잘 지킬 수 있을까’였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교묘하게 이것을 속임수로 이용했다. 본질의 핵심을 흐려놓고 엉뚱한 것을 믿게 하였던 것이다.
▶ 예를 들어본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요구하셨다.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즉 일하지 말라는 것은 방법론이고, 그 목적은 거룩한 생활이다. 그러면 당연히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가 주된 관심이어야 하는데, 마귀는 핵심을 등뒤로 돌리고 엉뚱한 것에 관심이 쏠리게 만들었다. 엉뚱하게도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더 집중하였다. 본래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에는 불순종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발생하였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꾐에 빠져서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계명의 본질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키기 못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고 병자를 고치는 거룩하고 경이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정면으로 대적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일에 사단처럼 대적하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신앙심이 투철한 자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으로 보일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또 그렇게 법을 지켰으니 나의 생활이 거룩하게 되었다는데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세리와 같은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자신들은 하라는 대로 했으니 벌을 면하고 복을 받을 것이라는 자부심까지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마음과 경건한 삶에는 관심이 없거니와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이 경건한 것처럼 여긴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역이 아니라 순종의 사람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메시아는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아였다. 즉 자기들의 생각에 따르는(일치되는) 메시아를 원한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네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에 불과하였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 자기네들 주장과 같은 ‘아멘’하고 틀린 것은 ‘노멘’하면서 자기네 생각이 옳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주장하려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고 죄인, 창기, 세리들처럼 울면서 기도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 .
자기네 생각대로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으니 어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그러한 것을 고치라고 권면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다고 외면하는 아니 오히려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짓고 있으니 … .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계명을 지키려는 열심으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좋은 열매를 맺힐 수가 있을 터인데 …. 어쩌면 예수님도 이런 것을 아시고 저들에게 심한 책망을 하신 것 같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신 후에 몹시 주리셨을 때에 마귀가 세 가지 유혹을 하였다(마 4장). 만약 예수님이 마귀가 요구한 세 가지를 다 들어주었다면 마귀가 예수님을 믿었을까?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예수님이 표적을 보이셨다면 저들이 예수님을 따랐을까? 결코 아니다. 물론 사울이었던 사도 바울은 경우는 달랐다. 마귀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자기네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셨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마귀는 거역의 영이기에 그렇다 할지라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회개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터인데 … .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는 저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께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저들이나 우리 모두를 향해 보여주실 표적은 다 보여 주셨다. 그 이상 메시아라는 증거가 들어난다 해도 저들은 결코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까지 좇아가서 계속 방해를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기도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스스로 의인이 된 것처럼 자부하거니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경건하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았거니와 귀에도 들리지도 않는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만 이같이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을까? 우상숭배란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며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이 더 옳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 말씀을 곁에 두고 묵상하여야 한다. 그리고 순종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몇 가지 순종을 하였다고 하여 전체적으로 순종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아니 매일같이 스스로를 돌아보자.
히 4:11-16 / 그러므로 우리도 이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넘칩니다.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가르고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합니다. 13) 하나님께서는 누가 어디에 가 있든지 그 사람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 숨겨질 수 있는 피조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4)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바로 우리를 도우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16)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필요에 따라 주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 544장 / ❶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❷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❸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❹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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