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절대 무명, K감독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청바지와 청자켓의 터프한 모습. 머리를 뒤로 넘긴 올백 스타일.
포마드 바른 머리에는 민트 바닐라 향이 물결치고 있다.
사각 형태의 얼굴. 아래턱에 짙은 터럭만 달았다면 영판 산적이라 할 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영화 제목이 '산적'인데, 제목에 걸맞은 감독이 나타난 셈이다.
K감독이 출연진과 스태프에게 인사하고 당부한다.
촬영 기간 동안 개인 행동을 용납치 않는다는 협박도 덧붙인다.
걸걸하고도 허스키한 목소리 역시 산적 닮았다.
K감독이 도리우찌를 쓰고 메가폰을 잡았다. 이제 본격적인 촬영이다.
산적이 미인을 묶은 포승줄을 풀어주려는 찰나.
"컷! 컷! 컷!"
K감독은 한 번만 해도 될 '컷'을 신경질적으로 연거푸 뱉는다.
"야, 카메라! 앵글 잘 잡아! 조명도 왼쪽으로 조금 방향 틀어!"
K감독의 느닷 없는 거친 말에 카메라와 조명 감독의 눈이 동그래진다.
"너는 히프를 이렇게 밀어 넣어야지!"
미인이 자신의 엉덩이를 툭 툭 치는 K감독을 돌아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K감독이 여자 검객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너는 저쪽으로 가!"
여자 검객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모두들 불쾌하다 못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감독이 배우의 연기와 동선과 카메라 위치와 조명 각도까지 완벽하게 통제해야 한다지만 이건 심하다.
계속된 촬영에서도 K감독의 '거친입'과 '못된손'이 거침없이 나풀댄다.
남녀 배우와 스태프 가리지 않고 엉덩이에 불이 났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환갑을 넘긴 무술감독 뿐.
역시 환갑과 무술의 세계는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촬영을 모두 마친 후,
여배우 혜미가 숙소 회의실에 여자들을 모았다.
거친입은 참을 수 있다. 영화를 찍다 보면 감독이 답답해서 그럴 수 있으니.
그러나 여자 엉덩이를 건드린 건 명백히 성추행이다.
패미니즘이 대세인 이 시대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고다.
혜미의 선동으로 미투 선언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K감독이 누구 누구 여배우의 엉덩이를 손으로 치거나 만진 사실이 있음.
누구 누구 여자 스태프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 사실이 있음.
"그러고 보니 여자 화장실을 기웃거리거나 들어가는 걸 본 것 같아."
여배우 선옥이 말했다.
"그럼 완전 변태구나!"
혜미의 선언에 다들 공감했다.
회의 분위기가 뜨거워져 갔다.
"이참에 K감독을 완전히 보내버리자. 소송이나 합의를 통해 위자료를 받아낼 수도 있고."
"선옥이는 여자 화장실에서 성폭행 당했다고 해라. 그건 좀 심한가? 그럼 성폭행 당할 뻔했다고 해라. 젖가슴 스쳤다는 경희는 확실히 건드렸다고 하고. 또..."
가는 이슬비가 굵은 소나기로 변해갔다. 조금 있으면 토네이도로 변할 듯하다.
땅거미가 짙어질 즈음, 마침내 미투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K감독은 이제 파괴될 일만 남았다. 자업자득이다.
내일이 D-Day. 오늘은 일단 모두 촬영 엔딩 만찬에 참석키로 했다.
만찬장 식탁 위에는 한식 요리와 양주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만찬장 앞 주빈 자리에는 무술감독과 꽃 장식 모자를 살짝 눌러 쓴 중년의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년 여성은 분홍 투피스와 메이크업과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처음 보는 여성인데,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다.
무술감독이 일어섰다.
"그럼 '산적' 엔딩 만찬을 시작하겠습니다."
성폭력범 K감독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행사를 시작한단 말인가.
무술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먼저 제 아내인 K감독의 감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행사장이 웅성거렸다.
무술감독 옆의 중년 여성이 꽃 장식 모자를 벗으며 일어섰다.
"여러분 영화 찍느라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걸걸한 남자 목소리는 여전히 K감독이다.
그런데 K감독이 여자였던가!? 모두들 경악했다.
"제가 말이 거칠어 곤혹스러웠죠? 죄송합니다. 특히 여성분께 신체 접촉 자주 한 거 같은데, 언니로서 사랑의 스킨십이라 생각하고 너른 이해를 구합니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K감독이 정말 여자라니!
그리고 언니라니! 사랑의 스킨십이라니! 징그럽다 못해 혐오스럽다.
혜미가 옆자리 선옥에게 속삭였다.
"K감독이 여자 화장실 이용했다며?"
"여자니까 당연히..."
"내일이 D-Day인데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여자가 여자 엉덩이 건드린 것도 성추행 맞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모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혜미의 가방에 든 미투 선언서에는 물음표만 잔뜩 쌓여가고 있었다.
첫댓글 오해와 조작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독이기도 하구요..
인간관계에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따뜻한 정과 배려와 역지사지 정신이 필요한 세상이기도 하구요..
일단은 감독이라도 여자 엉덩이 툭툭친 건 잚못이라고 쓰려다가... ^^
코미디 극본을 쓰게나.
크크, 역시 또 반전의 백미를 보이는군요.
사각형 얼굴 부인 모시고 환갑 넘긴 무술감독님도 대단하네요.
이쁜 말궁뎅이는 한번 슬쩍 만져보고싶죠. 클 나~ !
짧은 글임에도 상황의 전복과 반전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여자에게 신체 접촉을 해도 성추행이라고 합니다.
피해자가 성적 수치감을 느꼈다면 그렇습니다.
성희롱. 없어져야 할 것은 맞는데 기준이 참 모호하단 생각도 있습니다.
화원 선생님 말씀대로 피해자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거나 수치감을 느꼈다면
오로지 성립이 되버리니 말이죠.
반전을 진짜 반전에 쓰신 거네요.
세상엔 여자 아니면 남자니까요.
남자 인줄 알았는데 여자라... 사람을 파멸시킬수 있는 오해가 난무 하는 세상을 이렇게 쉽게 반전으로 풀어버리시다니!
토요일 아침, 달달한 댓글... 반가운 까치가 왕림한 느낌입니다..
옛 직장에서 '남녀 직원 둘이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어요.. 미투에 휘말리지 않게...
너무 엄격한 규제라고 생각하며 반전을 엮어 써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웃음 가득하시구요...